우리 주변에서 가장 쉽게 만날 수 있는 나무가 뭘까요? 
 
  아마 많은 분들이 은행나무를 떠올리지 않을까 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서울 시내 가로수의 41퍼센트를 차지하는 나무도, 식물 천연기념물 중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하는 나무도 바로 은행나무이기 때문입니다. 구린내 때문에 코를 찡그리기도 하지만, 노랗게 물든 은행잎을 볼 때면 가을이 왔다는 사실을 실감하게 되지요. 가을이면 뉴스에서 전국의 단풍 소식을 알리기에 바쁜 걸 보면 그만큼 많은 사람들이 단풍철을 기다리지 않을까 싶습니다. 하지만 살아 있는 화석으로 불릴 정도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은행나무에 대해 우리는 식물적인 특징만 알 뿐 그 속에 담긴 이야기와 그 속에 담긴 은행나무의 정신은 미처 깨닫지 못합니다. 천년의 세월을 이 땅에서 살아온 한국인의 어머니, 은행나무. 키워드 한국문화 여덟번째 이야기 <은행나무>입니다. 


47미터로 동양 최대의 은행나무인 용문사 은행나무의 모습은 그 앞에 선 인간을 숙연하게 만듭니다.  

  짧게는 몇백 년에서 길게는 천 년에 이르기까지 긴 세월 동안 한자리를 지키며 우리 땅에서 우리 민족의 질곡의 역사를 바라본 은행나무. 그동안 소나무나 사군자 등의 식물을 하나의 문화코드로 소개한 책은 많았지만 정작 우리 주변에서 쉽게 만날 수 있는 은행나무에 대해서는 그 아름다움에 대한 이야기를 곁가지로 소개하는 정도에 그쳤습니다. 이에 <역사와 문화로 읽는 나무사전> <나무열전> <중국이 낳은 뽕나무> 등을 통해 '나무에 미친 사학자'로 널리 알려진 강판권 선생님께서 <은행나무>를 통해 전국 방방곡곡의 은행나무를 찾아가 그들의 이야기에 귀 기울여 한 그루의 은행나무를 문화, 역사학적으로 고찰해 옛사람들의 정신과 철학을 되새기는 구도자의 길을 나서기 시작하셨습니다. 


오랜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아름다움을 뽐내는 영국사 은행나무. 이곳에서 올 4월 3일 당산제가 열린다고 합니다.
 

  은행나무를 찬미하는 글은 많지만 은행나무에 대한 전설은 문헌상 거의 남아 있지 않다고 합니다. 하지만 입에서 입으로 전해지는 설화는 은행나무의 삶만큼이나 강한 생명력을 자랑합니다. 마의태자와 의상대사의 전설이 얽혀 있는 용문사 은행나무, 보조국사 지눌의 지팡이에서 자라났다는 전설이 전하는 청도 적천사의 은행나무 같이 굵직한 인물들과의 사연이 얽힌 은행나무에서부터 신통한 뱀이 살고 있어 마을을 지켜준다는 평범한(?) 마을 설화가 전하는 은행나무까지 그동안 그저 완상의 대상으로만 생각한 은행나무에는 생각보다 많은 이야기가 얽혀 있었습니다. 전 세계의 1종 1속으로 친척 하나 없는 은행나무는 이렇게 많은 이야기를 품으며 때로는 어머니 같은 보살핌으로, 때로는 모두의 소망을 들어주는 너그러움으로, 때로는 아픈 마음을 위로해주는 따스함으로 한국인의 '정신적 지주'로 자리 잡습니다. 이런 풍습은 오늘날까지 이어져 지금도 전국 곳곳에서 은행나무에 제를 올리고 기원을 드린다고 하네요. (4월 3일에 영국사 은행나무 당산제가 있다고 하니 관심 있으신 분들은 가보셔도 좋을 듯합니다.)

 

 
섬계서원의 은행나무의 모습. 이렇듯 은행나무는 유교 문화재와 잘 어우러져 있습니다.

  은행나무에는 이런 이야기만 얽혀 있는 것은 아닙니다. 서원, 고택, 정자, 성균관, 향교 같은 유교 관련 유적지에서는 어김없이 은행나무를 만날 수 있습니다. 이는 공자가 제자를 가르쳤다는 '행단'에서 유래한 것인데, 사실 행(杏)은 살구나무를 의미하지만, 긴 수명과 친인척 하나 없다는 특징이 유교의 유구한 정신과 독자성을 드러내기에 안성맞춤이었기에 의도적인 선택이 행해진 듯합니다. 실제로 강판권 선생님께서 찾아나선 유교 유적지에서는 공부를 할 때도, 잠시 머리를 식힐 때도 늘 은행나무를 만나게 됩니다. 아마도 유생들이 은행나무처럼 강인한 꿈을 꾸길 바라는 마음이 담긴 배치가 아니었나 싶네요. 


표지에 사용한 이유신의 <행정추상도>입니다. 표지 디자인을 하면서 은행나무가 들어간 그림을 찾기 무척 어려웠는데, 운 좋게 만난 그림. 가을날 은행나무 아래에서 노니는 선비들의 모습에서 여유가 느껴졌습니다.  

  강판권 선생님께서는 자신의 강의를 듣는 학생들에게 "캠퍼스 안의 은행나무가 몇 그루나 있는지 세어오라"는 과제를 낸 적이 있다고 하십니다. 우리가 매일 스쳐가듯 만나는 은행나무. 모든 식물이 추위를 이겨내고 새싹을 틔우기 시작한 봄날, 가을날의 단풍 구경도 좋지만, 때로는 평범해보이는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는 것도 즐거운 경험이 되지 않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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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11-03-31 15: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훌륭한 책 소개예요. 은행나무가 친척 하나 없는 나무였군요. 그토록 수명도 긴데 친척도 없고, 하지만 널리 퍼져 두루 사랑받고 있으니 외롭진 않을 거예요. 책이 근사해 보여요.^^

이매지 2011-03-31 15:58   좋아요 0 | URL
친척 하나 없지만 우리 삶 곳곳에 있는 나무예요^^ 많이 예뻐해주세요! ㅎㅎㅎ

2011-03-31 15:5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31 15:5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3-31 20:3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1 09:41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4-02 01:1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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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4-04 09:47   UR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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