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끼리의 등
아키모토 야스시 지음, 이선희 옮김 / 바움 / 2010년 4월
품절


술을 마시고 싶지는 않았지만 내일은 한 해의 일을 마무리하는 종무식이어서 회식에 참석해야만 한다. 그 순간 입에서 쓴웃음이 흘러나왔다. 앞으로 6개월밖에 남지 않은 상황에서, 참석해야만 하는 회식이란 어떤 것일까? 지금 내가 '~해야만 한다.'라고 여겨온 것들이 커다란 소리를 내고 와르르 무너지는 듯했다. 애당초 인간관계는 미래가 있어야만 성립되는 것이 아닌가. -15쪽

세상에서 가장 큰 고독은 어느 누구도 내가 고독하다는 사실을 모르는 것이 아닐까? -16쪽

인생이 이렇게 허무할 줄 몰랐어. 영화를 보면서 앞으로 어떻게 될까 가슴 두근거린 순간, 어처구니없이 엔딩 자막이 올라가는 듯한 심정이야. 인생도 영화도, 내 멋대로 기대를 했기 때문이겠지. 솔직히 말하면 내 인생이 6개월밖에 안 남았다는 거, 아직도 남의 일 같아. 입으로는 비극의 주인공처럼 말하지만 도저히 실감이 나지 않더군. 하지만 몇 시간마다 공포가 밀려오기도 해. 나는 어떻게 되는 걸까 하고……. 아침에 세면대 거울 속에 있는 나를 봤을 때, 역 플랫폼에 서 있을 때, 휴대전화로 일 얘기를 하고 있을 때, 불시에 공포가 밀려오는 거야. 과장이 아니라 정말로 다리가 덜덜 떨린다고. -40쪽

나는 인생을 되돌아보고 싶다. 내 인생이 이런 것이었다고 확실히 알고 싶다. 인간은 죽기 직전에 자신의 인생을 주마등처럼 되돌아본다고 한다. 아니, 주마등이 아니라 더 느긋하게 되돌아보자. 남은 6개월을 아낌없이 투자해서 내 인생에 관련된 사람을 만나고, 한 사람 한 사람에게 이별을 고하자. 그것이 남은 6개월을 후회 없이 보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이제 6개월이 짧다고 한탄하는 짓은 그만두자. 그런 번뇌는 제야의 종소리와 함께 잊어버리는 것이다. -49쪽

인생은 연필로 그리는 데셍 같은 것이다. 연필로 몇 개의 선을 그리면서 조금씩 전체의 모습을 포착한다. 개중에는 아무리 봐도 실제보다 많이 삐져나온 선이 있다. 현실을 왜곡한 선이다. 지우개로 지울 수는 없지만 "지금이라면 이렇게 그릴 텐데……."라는 선을 남기고 싶다. 남은 날들 안에서 인생을 수정하고 싶었다. -135쪽

"원래 세월이란 그런 게 아닐까?"
"마치 추억 같아요."
"한마디로 정리하는군."
"그렇잖아요. 좋지 않은 건 계속해서 잊어버리고, 자신에게 좋은 것만 기억하니까요."
"그게 살아가는 지혜야. 신은 그러기 위해 인간에게 '잊어버리는 능력'을 준 거지."-182쪽

아마 거미는 청소 아줌마와 끊임없는 싸움을 반복했을 것이다. 집을 지으면 청소 아줌마가 치우고, 그러면 거미가 또 집을 짓고……. 강인한 생명력이다. 아니, 거미의 생명력이 특별히 강인한 것이 아니다. 거미는 다만 유전자의 명령에 따라 계속 집을 지을 뿐이니 단순한 본능이다. 안타깝게도 이 거미집은 내일 또 치워질 운명에 처해 있다. 그런 사실도 모르고 거미는 부지런히 집을 짓고 있다. 가령 '네 운명은 그러하다.'라고 누가 가르쳐준다고 해도 거미는 집짓기를 포기하지 않으리라. 보답을 받거나 보답을 받지 않는 것에 상관없이. 살아간다는 것은 그런 것이다. 나는 작지만 내 집을 지어왔다. 하지만 앞으로 한 달 안에 내 집은 무너진다. 거미는 무엇 때문에 여기에 집을 짓는 것일까? 오래된 집의 천장 안쪽이나 별장의 사용하지 않는 난로, 정원의 나무와 나무 사이에 집을 지었으면 헐리는 일은 없을 텐데……. 내가 거미를 가엷게 여기는 것은 주제넘은 짓일까? 거미는 아마 자신의 마지막 날을 모르리라……. -330~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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