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 나는 바깥으로 들어갔다 - 스물여섯의 사람, 사물 그리고 풍경에 대한 인터뷰
최윤필 지음 / 글항아리 / 2010년 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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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깥은 안과 맞버텨야만 서는 단어다. 그래서 경계가 필요하다. 하지만 나의 경계는 아주 허술하고 느슨할 것이다. 이따금 "어떻게 이게 바깥이야?!" 하며 시비 삼고 싶은 경구도 있을 것이다. 경계의 경계가 삼엄하지 않은 사회, 안과 바깥이 평화롭게 바뀌기도 하고 섞이기도 하는 세상, 아예 구분이 무의미해지는 마당을 우리는 바란다. -5쪽

사람이든 사물이든, 공간이든 시간이든, 모든 밀려나고 사라지는 것들에는 사연이 있고 맥락이 있다. 사연이 안타깝고 논리가 부조리해도 거기에는 도덕과 당위의 맥락으로 치환되지 않는 시스템의 힘이 있다. 어떤 것을 밀어내고 사라지게 하는 데 앞장서는 것(혹은 사람 혹은 논리)들은 그 시스템의 내력벽 뒤에 숨어 도덕적 부담을 덜고, 그러면서 시스템을 두텁게 굳힌다. 시대의 조류라고도 부르고, 지배적 가치라고도 부르는 그것들이 시대와 사회를 아우르느네, 데카르트의 용어로 말하자면, 보편 이성에 닿아 있었던 때와 경우를, 서글프게도 우리의 역사책은 소개한 적이 없다. 그래서 인류는 부조리를 견디는 내성을 다윈의 비정한 가르침처럼 키워와야 했고, 그것이 때로는 맹목의 행복으로 보이기도 한다. -27~8쪽

자신의 신념이나 열정에 등 돌리는 이들 중에는 보란듯 자신의 옛 자리에 침을 뱉음으로써 새로운 의지와 입지를 굳히려는 이들이 있다. 반면에 애써 잊고자 머물던 자리로 눈길조차 돌리지 않으려거나, 늘 동경하며 가난한 집 문풍지처럼 흔들리는 이들도 있다. 그는 어느 쪽인지 궁금했고, 전자라면 변신의 명분을, 후자라면 스산한 소회라도 듣고 싶었다. 요컨대 끝내 불고가사할 수 없었거나, 못 한 이의 변명이 내겐 필요했다. -76~7쪽

상처를 건드리지 않으면서 증상에 개입해야 하는 경우처럼 특별히 섬세하게 접근해야 할 일들이 있다. 차별이 그런 경우다. 차별 현상을 해석하고 지향과 해법을 모색하는 일은, 논리의 정연함 못지않게 논리의 품격을 요구한다. 차별의 낮은 편을 편든다면서 가지런히 빗질된 이성만으로 덤벼들어 상처를 후벼 파고 차별의 구조를 굳히는 데 부역하는 예는 흔하다. 누구나 개입할 수 있지만 아무나 제대로 개입하긴 힘든 저 화사한 모순의 화단 안에서, 차별은 자란다. -130쪽

고래古來의 명망가들은 책의 가치를 떠받드는 숱한 잠언을 남겼다. 그리고 우리에게도 책을 높이는 성향이 남아 있다. 그것이 긴 세월 동안 문자문화를 전유했던 지배층의 이데올로기 때문이든 문화적으로 빈한했던 기층민들의 콤플렉스 탓이든, 책은 물신의 전일적 지배가 완성됐다는 이 시대에도 미미하나마 가치의 프리미엄을 인정받는 몇 안 되는 상품 가운데 하나다. 매주 그런 책은 쏟아져 들어오고, 어떤 책은 시장 바깥으로 쫓겨난다. 그리고 모든 신문의 출판 면은 새 책의 목록만 의무인 양 챙긴다. -15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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