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현
김인숙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10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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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병들은 규율에 길들여져 있다. 저들의 대부분은 전쟁 중에 태어나 전쟁 중에 자라났으며, 곧 전쟁터에서 죽게 될 터였다. 죽음은 옆구리에 끼고 달리는 보따리 같았다. 노획으로 채워지거나, 찢겨 흩어지거나, 죽음이 무상했으므로 살아 있다는 것도 별것 아니었다. -9~10쪽

자, 그러니 꿈을 꿔봐.
어디선가 그런 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지금 죽어가는 자에게 살아 있는 마지막 생에서의 꿈은 무슨 의미를 가질까. 폭설이 쏟아지고 있었다. 언 바닥에 누운 몸이 온기를 잃어 생의 기억이 함께 차가워지고 있다. 아스라하게 남은 것들 위로는 눈이 쌓였다. 끝없이 흘러 멈추지 않을 것 같던 피도 쌓이는 눈에 묻혀 더는 보이지 않았다. 꿈을 꾼다면 저승의 꿈을 꾸어야 할 것이다. 그런데 알지 못하는 곳의 꿈은 어떤 것일까. -12~3쪽

그때 세자는 다만 한 가지를 알 수 있을 뿐이었다. 말을 아껴야 한다는 것…… 생각은 그다음에 해도 늦지 않을 것이다. -20쪽

아들을 보지 못한 도르곤에게는 여러 명의 딸만 있었다. 여자아이들의 낭랑한 웃음소리가 뜨거운 술 한 잔보다 더 뭉근하게 도르곤의 고독을 녹인다. 사내로 태어나지 않았으니, 누군가를 죽이는 일은 없을 것이다. 전쟁에 나갈 일도 없을 것이다. 비록 적에게 바쳐지고, 능멸을 당하고, 벌거벗겨져 찢김을 당하더라도…… 죽이지 않고 스스로 죽을 터이니, 그 죽음에 위안이 있을 것이다. 도르곤이 급하게 술 한 잔을 들이켰다. 뭉근해진 줄 알았던 고독이 베어내지 못한 모가지처럼 창끝에 걸려, 울컥울컥 피를 쏟아내는 듯하다. 운명이었다. 그것은 그가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누구도 무엇을 선택한 적이 없었다. 그는 그의 어미를 죽인 전 황제를 한 번도 용서해본 적이 없었으나, 용서하지 않은 적도 없었다. 선택은 그의 몫이 아니었다. -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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