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평점 :
품절



  일본소설의 유용성은 단연 '망상'에 있지 않나 싶다. 정말 어디 쓸래야 쓸 수도 없을 것 같지만 갑갑한 일상에서 분명 유쾌한 바람을 불어넣어주는 것. 뭔가 일정에 쫓기다보니 복잡하고 딱딱한 책은 눈에 들어오지도 않고, 뭔가 말랑하면서도 유머러스하고 재기넘치는 작품을 찾다가 만난 것이 모리미 도미히코였다. <유정천 가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다다미 넉장반 세계일주>에 이어 네번째로 읽게 된 그의 작품. 비교적 신작인 2009년 작이라 이전에 읽었던 작품과 조금은 달라지지 않았을까 걱정도 됐지만, 읽어보니 딱 모리미 도미히코에게 기대했던 바 그대로를 담은 작품이었다.

  해파리 연구를 위해 교토에서 멀리 떨어진 노토에 간 주인공 모리타 이치로. 딱히 즐길거리라고는 수족관에서 돌고래를 보는 것과 온천 정도밖에 없는 곳이고, 만나는 사람도 같은 연구실에서 그를 지도해주는 다니구치 뿐. 그나마 다니구치란 인물은 금요일 밤이면 실험실 한구석에서 만돌린을 뜯으며 자작곡을 고래고래 부르고, 뭔지 모를 강장동물을 담가놓은 콜라를 정력증강제라며 마시는 괴팍한 캐릭터라 정상적 인간 관계를 구축하기 쉽지 않다. 이에 고독을 달래기 위해, 인간의 따뜻함을 느끼기 위해 모리타는 이곳저곳에 편지를 보낸다. 그렇게 마치 수련처럼 여러 사람과의 서신 교환을 하던 모리타는 편지 기술을 연마해 장래에 연애편지를 대필하는 벤처 회사를 세우겠다는 원대한(?) 목표까지 세운다. 하지만 연애편지의 기술을 습득하는 것은 녹록치 않은데...

  이 책은 전체가 편지로 구성되어 있다. 하지만 그 편지가 시간순으로 정렬된 것이 아니라, 수신자별로 정리되어 있어 앞 챕터에서 잠깐 언급된 것이 다른 챕터에서 등장하기도 하는 식으로 연결되어 있었다. 게다가 상대방이 보낸 편지는 없이 오롯이 모리타 쪽에서 써내려간 편지만 담고 있어 처음에는 이래서 어떻게 스토리가 이해가 될까 싶은 생각도 들었다. 하지만, 편지를 하나하나 읽어가다 보니 엉성하게 느껴졌던 이야기들이 조금씩 살을 붙여가는 것이 느껴졌다. 이전에 읽었던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도 그런 형식이 많았는데, 이 또한 그의 작품의 특색인 것 같다. 찔끔찔끔 이야기를 풀어내는 것 외에도 모리미 도미히코만의 특징이라면 자신의 다른 작품을 끌어들인다는 것. 이번 작품에서는 아예 노골적으로 작가 자신이 모리타와 서신을 교환하는 대상으로 등장하고, 모리타가 편지에서 언급한 소재들을 (모리타의 표현에 의하면) 표절해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쓴 것으로 나온다. 빤스 대마왕, 코끼리 엉덩이, 잉어를 짊어진 사람, 달마 오뚝이를 사과로 착각한 것 등 <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를 재미있게 읽은 사람이라면 모리타가 꺼낸 소재가 어떻게 소설로 변형되었는지 비교하며 볼 수 있을 것 같다. 

  제목 때문에 아마 많은 사람들은 '연애편지의 기술'을 습득해 어디 나도 써먹어볼까라는 생각으로 이 책에 관심을 가질 듯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이 책은 궁극의 연애편지와는 다소 거리가 있다. 늘 횡설수설 중언부언 찌질찌질한 모리타에게 얻을 수 있는 것이라곤 약간의 유머뿐. 하지만 책을 다 읽고 나면 그보다 더 소중한 것을 알게 된다. 편지라는 것은 보내는 즐거움과 받는 즐거움이라는 것. 그것이 서신왕래의 매력이라는 것. 마지막 즈음에 모리타가 "우리는 좀 더 아무렇지도 않은, 아무래도 좋은, 아무것도 아닌 편지를 많이 써야 합니다. 그러면 세상에 평화가 찾아올 것입니다"라고 쓴 것처럼 편지는 그 자체에 어쩐지 평화적이고, 따스한 분위기를 담고 있는 것 같다. 혼자 조용히 자신의 생각을 정리하고, 혼자 조용히 상대방의 편지를 읽어내려가는 시간. 이메일이 난무하는 세상에서 손으로 쓴 편지를 받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불현듯 들었다. 

  여전히 황당무계하고, 대책 없는 망상의 향연이지만, 그럼에도 한 권 한 권 모리미 도미히코의 책을 읽으면서 점점 그의 세계에 빠져드는 것 같다. 책에서 잠깐 <여우 이야기>도 제목 정도 언급되고 있는데, 조만간 <여우 이야기>도 만나봐야겠다. 궁극의 연애편지 기술은 없지만, 그보다 유용한 유머가 있는 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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