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애편지의 기술
모리미 도미히코 지음, 오근영 옮김 / 살림 / 2010년 3월
품절


요시다 신사는 재수가 나쁘다고 너는 말하겠지. 분명 그 신사는 합격을 기원하는 자는 합격자 명단에서 '빠지고' 성적향상을 기원하는 자는 성적이 '떨어지는' 걸로 이름이 높은 곳이지. 그러나 달리 생각해보라고. 연애문제에 관해서만은 그 신사가 딱 안성맞춤일 거야. 왜냐하면 사랑이라는 것은, 자신은 '빠지는' 것이고 상대로 하여금 '빠지게 하는' 것이 아니냔 말이다. -14쪽

그녀가 진로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는 정보는 꽤 유익하다. 그녀에게 넌지시 고민을 물어보고 그녀의 입장이 되어 조언을 해주는 거야. 모쪼록 멋지게 조언해주겠다는 욕심을 부린 나머지 그럴듯한 '설교'를 늘어놓는 짓은 절대 금할 것. 본질을 꼬집어주거나 하는 건 더욱 안 될 일이다. 인간이란 정곡을 찔리면 고마워하기보다는 먼저 반발을 하게 마련이거든. 연애를 하는 남자는 바보가 되니까 유익한 말을 한답시고 무익한 말만 골라서 하지. 그냥 맞장구를 쳐주면서 진지하게 귀를 기울여줄 것. -28~9쪽

어떤 사람이 예쁘다는 걸 문장으로 쓰는 건 매우 어려운 법이다. '예쁘기는 예뻐' 하고 말하고 싶어지지. 그럴 때 다른 뭔가에 비유하기도 한단다. 예를 들면 '마리 선생님은 삶은 달걀처럼 예쁘다'라든가 '마리 선생님은 수수경단처럼 귀엽다'고도 하지. 그러나 자기는 '예쁘다' 혹은 '귀엽다'는 표현을 한다고 했는데도 상대는 그렇게 받아들여주지 않는 경우도 있다. 이것이 힘든 현실이다. 슬픈 일이지.
하지만 쓰기 어려운 것을 '어떻게 하면 쓸 수 있을까?' 하고 생각하는 것은 좋은 일이다. 그렇게 하다 보면 차츰 여러 가지 느낌을 표현할 수 있게 되기 때문이야. -86~7쪽

옛날 아이다호 주립대학의 고히부미(고히부미란, 즉 연애편지의 일본식 발음 '고이부미'를 이용한 말장난-옮긴이) 교수는 말했지.
"헛되이 사라진 연애편지 수만큼 사람은 성장한다."
가만히 생각하면 이건 명언처럼 들린다. 선생님은 여러 가지 명언을 알고 있으니까 이런 명언으로 너를 위로할 수도 있는 거란다. 하지만 선생님 생각에는 그런 일로 성장하는 것보다는 좋아하는 사람에게 좋아한다는 말을 듣는 게 더 바람직할 것 같다. 그런 명언은 피상적인 위로일 뿐이야. 고히부미 교수의 마음도 이해하지만 그래도 그런 건 사실은 싫겠지.
-96쪽

노토의 하늘은 어둡고 탁한 빛을 띠고 있고, 매일 아침마다 타는 노토 철도의 차창으로 보는 경치도 음울해 보입니다. 여기는 장마의 무게도 다르군요. 자신의 과거도 미래도 점점 잿빛이 되는 것 같아 수족관 돌고래에게 인생 상담을 하러 가기도 하며 정신적인 위기를 극복하고 있습니다. 활기에 차 있는 건 수국과 민달팽이뿐. -113쪽

신작 원고 잘 받았습니다.
즉시 읽어보고 화가 머리끝까지 나 있습니다. 내가 편지에 쓴 것들을 여기저기서 끌어모아 훔치고, 더구나 사전에 아무런 양해도 없었습니다. 코끼리 엉덩이도, 오뚝이와 사과도, 팬티를 벗지 않는 팬티 두목도, 잉어를 짊어진 사람도, 모조리 내가 편지에 썼던 이야기입니다. 표제에 '기회주의자'까지 훔쳐놓고 천연덕스러우니 참으로 무섭습니다.-133쪽

젖이라는 것은 왜 그렇게도 남자들을 우왕좌왕하게 만드는 걸까.
그따위, 살짝 불거져나온 살덩이에 지나지 않는 것이 왜 남자의 이성을 지배하는 걸까. 도무지 이해를 할 수가 없다. 불합리해. 부조리다. 이건 뭔가의 주술일까. 젖은 우리 눈앞에 떡하니 자리를 잡고 우리의 정신을 속박한다. 우리는 젖에 눈이 흐려지고 있다. 젖은 세상의 진실을 덮어 감춘다. 이건 자유를 요구하는 싸움이다. 젖에 의한 지배를 극복해야 비로소 진정한 인간과 인간에 의한 영혼의 교류가 가능해진다. 나에게 자유를! -151쪽

그녀에게 편지를 몇 통이나 썼지만, 우체국에 넣는 걸 포기하게 됩니다.
다시 읽어보면 부끄러워 죽겠고, '내가 무슨 소리를 쓴 거야?' 하는 기분이 듭니다. 정열은 넘치다 못해 뚝뚝 떨어질 정도입니다. 문장 역시 내가 보기에도 훌륭한 것 같습니다. 이해하기 쉽고 그리고 뜨거운 열정이 느껴집니다. 내가 쓴 편지를 받고 울려고 생각하면 울 수도 있습니다. 이 얼마나 아름다운 편지인가, 하는 생각도 듭니다. 그러나 근본적인 단점이 딱 하나 있습니다. 쓰다 보면 어느 순간부터 이상해집니다. 왜 그런지 모르지만 청정한 마음으로 쓰고 있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것입니다.
어째서 이런 일이 생기는 걸까요?
나는 뭘 잘못하고 있는 걸까요! -207~8쪽

도대체가 상대를 칭찬하는 것도 간단한 일은 아닙니다. 오히려 이건 난이도가 높습니다. 칭찬하면 할수록 거짓말처럼 되기 때문에 점점 더 정색을 하고 중언부언하는 동안 점점 더 거짓말같이 되어버립니다. 분명히 일단 한번 반해버리면 온갖 것들이 좋아 보입니다. 칭찬하려고 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것저것 닥치는 대로 칭찬하다 보니 칭찬을 하면 할수록 어쩐지 그녀가 산산조각이 나는 것 같습니다. 핵심이 되는 내용이 빠지는 것 같단 말입니다. 그녀의 옆모습이거나 짧은 머리거나, 보조개이기도 하고 귓불이기도 하고 이따금 보이는 무표정이기도 하고 그 모든 것을 합쳐 그녀에게 반한 건 아닙니다. 나는 그녀의 귓볼이 예뻐서 빠진 건 아닙니다. 내가 반한 그녀의 귓불이기 때문에 예쁘게 보이는 것입니다.
하지만 누구라도 느닷없이 보낸 연애편지를 받았는데 귓불을 칭찬한 글을 읽으면 무섭겠지요. 나도 무섭습니다. 변태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듭니다.-214~5쪽

'가을은 쓸쓸하다'고 말하는 한가한 사람들은 해마다 멜랑콜릭한 기분으로 지내면 될 것입니다. 가을은 멜랑콜릭은 신사숙녀의 취미지요. 거리를 걷는 사람들이 한결같이 우울한 표정을 하고 차가운 가을바람이 거리를 훑고 지나갑니다. 얼마나 멋진 계절인가요. -3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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