밤은 짧아 걸어 아가씨야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0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서혜영 옮김 / 작가정신 / 2008년 8월
구판절판


알겠니. 여자란 시도 때도 없이 철권을 취둘러서는 안돼. 하지만 이 넓은 세상에서 성인군자는 그야말로 한 줌, 남은 건 썩은 못된 놈이든가 멍청이든가, 아니면 썩은 못된 놈이면서 멍청이야. 그러니까 때로는 그러기 싫어도 어쩔 수 없이 철권을 휘두르게 되지. 그럴 때는 내가 가르쳐준 친구펀치를 써. 굳게 쥔 주먹에는 사랑이 없지만 친구펀치에는 사랑이 있어. 사랑이 가득 찬 친구펀치를 구사하며 우아하게 살아갈 때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생이 열린단다. -9쪽

나는 '태평양 물이 모두 럼주라면 좋겠는데' 하고 생각할 만큼 럼주를 사랑합니다.
물론 럼주 한 병을 아침에 우유 마시듯이 허리에 손을 올려놓고 그대로 다 마셔도 좋지만 조심성 있는 아가씨라면 그런 자그마한 꿈은 마음의 보석 상자에 담아놓아야겠지요. 아름답고 조화로운 인생을 살아가려면 그러한 사소해 보이는 일에도 조심을 해야 한답니다.
그 대신 나는 칵테일을 즐겨요. 이런저런 칵테일을 고를 때는 마치 예쁜 보석을 하나씩 고르는 것 같아 기분이 매우 호사스러워집니다. 아카풀코나 튜바리버나 피나콜라다. 나는 물론 럼 이외의 칵테일에도 흥미가 많아서 그것들과도 적극적으로 음주의 정을 나눕니다. 나온 김에 더 말하자면 칵테일만이 아니라 모든 술하고 적극적으로 소통하자는 마음입니다. -16쪽

"부모가 자식에게 바라는 건 그저 행복했으면 하는 것뿐이야. 네 부모님도 분명 그렇게 생각할 거야. 나도 부모니까 알아."
"하지만 행복해지는 건 마음대로 되는 게 아니잖아요."
"물론 그렇지. 부모도 해줄 수는 없는 일이지. 스스로 행복을 찾는 수밖에. 하지만 딸의 행복을 위해서라면 난 뭐든 아낌없이 해주고 싶어."
정말 멋진 분이구나, 심성이 맑기도 해라, 하고 나는 생각했습니다.
"젊은이는 행복이란 무엇인가, 늘 그걸 물으며 살아야 해. 그렇게 살 때 비로소 인생이 의미를 갖게 되지."
도도 씨는 그렇게 단언했습니다.
"도도 씨에게는 뭐가 행복인데요?"
그는 내 손을 잡았습니다.
"이렇게 지나쳐 가는 사람과 친구가 되어 그 사람과 즐거운 시간을 함께 보내는 것. 이것이 내 행복일지도 몰라." -25~6쪽

"넌 진짜 잘 마시는구나. 정말 밑 빠진 독이 따로 없군." 사장님이 말했습니다. "너 도대체 주량이 얼마니?"
나는 가슴을 쫙 폈습니다. "거기에 술이 있는 한."-63쪽

책들은 말한다. "우리를 읽고 조금은 똑똑해지는 게 어때, 친구?" 하지만 나는 이제 책이라면 넌덜머리가 났다.
헌책시장의 신이여, 나에게 책 속의 지식이 아니라 현실의 윤택함부터 달라.
지식은 그런 뒤에 줘도 된다. -97쪽

나는 히구치 씨와 메밀국수를 먹으며 책과 우연에 대해 생각했습니다.
예를 들어 내가 오랫동안 찾던 책과 만나는 일. 혹은 길을 걸으며 생각했던 책이 때마침 눈앞에 나타나는 일. 내용도 보지 않고 사 온 서로 다른 책들 속에 같은 사건이나 인물이 나오는 일. 또는 옛날에 내가 샀던 책이 헌책방을 돌고 돌아 다시 내게로 돌아오는 일.
이만큼 많은 책들이 사고 팔리면서 세상을 돌아다니니 그런 우연이 생기지 말란 법도 없습니다. 아니, 우리는 우연이라고 생각하지만, 실은 그건 복잡하게 얽힌 인과의 끈을 못 봐서 하는 말일지도 모릅니다. 책을 둘러싼 우연에 마주쳤을 때 실로 나는 운명 같은 뭔가를 느낍니다. 그리고 나는 그걸 믿고 싶은 사람입니다. -109쪽

상사병이란 '연모하는 마음이 상대에게 전달되지 않아 병적인 상태가 되는 것'을 말한다. 사랑은 인간이 걸리는 온갖 병에 들지 않는 병이라, 갈근탕을 먹어도 낫지 않았다. -300쪽

세상에는 대학생쯤 되면 연인이 있어야 한다는 편견이 있다. 그러나 그건 그야말로 편견일 뿐이다. '대학생쯤 되면 연인이 있다'라는 편견에 등 떠밀린 어리석은 학생들이 이리 뛰고 저리 뛰어 신분을 번지르르 치장한 결과 누구에게나 연인이 생기는 괴현상이 발생한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더욱더 편견을 조장한다.
허심탄회하게 나 자신을 바라봐야 한다. 나 또한 그 편견에 등 떠밀린 건 아닐까. 고고한 남자임을 내세우면서 실은 유행에 취해 사랑을 쫓아다닌 것은 아닐까. 사랑을 탐하는 아가씨는 귀엽기나 하지. 하지만 사랑, 사랑, 하며 눈을 희번덕거리는 남자들의 그 으스스함이란!
도대체 나는 그녀에 대해 무엇을 알고 있는 걸까. 눈에 못이 박힐 지경으로 바라본 뒤통수 외에 무엇 하나 아는 게 없다 해도 지나치지 않다. 그런데도 어찌하여 반했다고 하는가. 근거가 불분명하다. 그건 단지 내 마음의 공허에 그녀가 어쩌다 빨려 들어온 것에 불과한 게 아닐까. -321쪽

그렇게 모든 걸 다 고려해야 한다면, 도대체 어떻게 남녀가 서로 교제를 시작할 수 있겠는가. 제군이 요구하는 것 같은 순수한 연애는 어차피 불가능한 일이 아니겠는가. 온갖 요소를 검토하고 자신의 의지를 남김없이 뜯어봐야 한다면 우리는 허공에 멈춰 선 화살처럼 한 걸음도 내딛지 못하지 않겠는가. 성욕이든 허영이든 유행이든 망각이든 멍청이든, 그 무슨 말을 듣더라도 다 인정하겠다. 모두 다 맞겠지. 하지만! 비록 그 끝에 기다리는 것이 실연이라는 나락이라 하더라도, 그 모든 것을 감수하고 어둠 속으로 뛰어들어야 할 순간이 있지 않겠는가. 지금 여기서 뛰어들지 않으면 미래영겁을 어두컴컴한 청춘의 한구석에서 뱅글뱅글 배회하며 보내게 되지 않겠는가. 제군이 바라는 게 그건가. 그녀에게 마음을 고백하지 못한 채 이대로 내일 홀로 죽는다 해도 후회는 없을 거라고 말할 자 있는가? 만약 있다면 한 발 앞으로! -34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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