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정천 가족 작가정신 일본소설 시리즈 24
모리미 토미히코 지음, 권일영 옮김 / 작가정신 / 2009년 11월
구판절판


무릇 인간이란 것들은 자기 공적을 크게 떠벌리고, 마치 제 솜씨 하나로 역사를 꾸려온 것처럼 행세한다. 가소롭다. 우습다. 가령 너구리들의 털이 숭숭한 손을 빌렸다 해도 훅 불면 날아갈 인간 나부랭이가 무얼 해낼 수 있단 말인가. 그 어떤 하늘의 재앙이나 난리도 인간과는 차원이 다른 세상을 살아가는 우리 뜻대로다. 국가의 명운은 우리 손안에 있다. -9쪽

나는 일찍이 너구리로서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그 까다로운 문제로 심각하게 고민한 적이 있다.
재미있게 사는 요령은 알지만 그 밖에 내가 무엇을 해야 할지는 알 수가 없었다.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는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최고다."
이건 그 유명한 나폴레옹이 한 말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하지 않고 빈둥거리다 보니 아무래도 재미있게 사는 것 이외에는 아무것도 해야 할 일이 없는 것 같다는 깨달음을 얻었다. -51쪽

이 세상에 널린 '고민거리'는 크게 두 부류로 나눌 수 있다. 하나는 어찌 되건 별 지장 없는 고민. 또 하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을 고민. 이 두 부류 고민의 공통점은 괴로워하는 만큼 손해라는 사실이다. 애써서 해결될 일이라면 고민할 시간에 노력하는 것이 최고다. 노력해도 해결되지 않을 일이라면 노력해봤자 헛수고다. 하지만 이렇게 깔끔하게 처리할 수 없을 때는 기분전환이란 놈이 필요하다. 그래서 작은형의 우물이 쓸모가 있는 것이다.
우물 속에서 귀를 기울이고 있는 것은 개구리 한 마리에 지나지 않기 때문에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안 된다는 사실은 뻔히 알고, 누구도 도움이 되기를 기대하지 않는다. 그저 고민을 털어놓을 뿐이다. 애당초 기대하지 않으니 영험한 효과가 없더라도 실망할 염려가 없다. 또 작은형에게 털어놓고 눈물 찔끔 흘리고 나면 왠지 속이 후련해진다. 그래서 작은형의 쓸 만한 도움말 하나 없어도 그들에게는 실제로 얻는 이득이 있다. -71쪽

"일단 먹으면 맛있게 먹어. 이건 먹는 사람의 의무지. 하지만 말이야, 자네. 사실대로 말하자면 생명을 먹는다는 것만으로도 맛있다, 이렇게 생각해야만 해. 나는 그 경지에 이르고 싶어. 그래서 여러 가지를 먹는 거지. 뭐 독이 있는 것은 안 되겠지만 말이야……. 죽으니까. 하지만 나는 우물 안 개구리에 지나지 않아. 세계로 눈을 돌려보게. 인간이란 존재는 닥치는 대로 먹지. 끔찍할 정도로 식탐을 부려. 그걸 생각하면 나는 감탄하지 않을 수 없어. 먹는다는 것은 사랑한다는 이야기야.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먹는가. 그리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것들을 사랑하는가. 인간 만세! 이런 생각이 드는 거야."
"하지만 먹히는 쪽에서 보면 만세를 부를 수는 없는 노릇이죠."
"먹히는 쪽에서야 물론 당연히 싫을 테지. 나도 곰이나 늑대에게 머리부터 아작아작 씹히기는 싫으니까. 다들 싫겠지. 그래도 먹히는 것이고, 나는 먹고 싶어. 불쌍하지만 먹고 싶을 정도로 너구리를 좋아하지. 너구리만이 아니야. 난 예쁜 것들을 먹어. 슬프지만 정말 맛있지. 여기에 바로 커다란 모순이 있어. 즉 사랑이야. 잘은 모르지만 아마 사랑일 거야. 그게 사랑이겠지."-190~1쪽

살아가는 한 이별을 겪지 않을 수는 없다.
인간이나 텐구나 너구리나 다 마찬가지다.
이별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슬픈 이별이 있는가 하면 때로는 고맙고 속 시원한 이별도 있다. 성대한 송별 파티를 하며 요란뻑적지근하게 헤어지는 이도 있고, 누구의 전송도 받지 못하고 혼자서 이별하는 이도 있다. 긴 이별이 있고 짧은 이별도 있다. 한 번 헤어졌던 이가 멋쩍은 듯이 훌쩍 돌아오는 일은 흔히 있다. 그런가 하면 짧은 이별인 줄 알았는데 쉽사리 돌아오지 않는 일도 있다. 그리고 다시는 돌아오지 않는, 생애 단 한 번뿐인 진짜 이별도 있다. -202쪽

"형, 커피도 우유도 맛이 없는데 커피우유는 왜 맛있지?"
"그건 상승효과 때문이지."
"상승효과라는 게 뭐야?"
"운명적인 만남이라는 거지. 그렇게 되면 뭐든 좋아지는 거야."-2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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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0-01-11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매지님, 안나 카레니나는 다 읽으셨나봐요. 근성으로 ^^;

이매지 2010-01-11 09:50   좋아요 0 | URL
좀 지루하다 싶으면 약간 생기가 돌고,
약간 생기가 도는가 싶으면 다시 늘어져서
오기로 읽었어요 ㅎㅎ
그래도 한 번쯤 읽어야 할 작품인 듯 :)
읽고 나니 그 여운이 기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