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을 잃어야 진짜 여행이다
최영미 지음 / 문학동네 / 2009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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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무엇을 보고 느끼며 생각했는지를 내게 환기시킬 사진이 없지만(돌아다니는 데 짐이 될 카메라 따위는 휴대하지 않는다는 게 내 워닉이다) 뒤늦게 날아와 책상 위를 흩어진 청구서 종이들이 그나마 도움이 된다. 어렴풋한 추억을 건져올리는 데 약간의 힌트를 제공할 신용카드 영수증과 호텔계산서를 뒤적이며, 나의 유별났던 21일을 거칠게 재구성하련다. -14~5쪽

내가 길눈이 밝았다면, 헤매지 않았다. 헤매지 않았으면 어느 화사한 봄밤에 친구도 만나지 못했고, 숨은 보물의 맛도 몰랐을 것이다. -28쪽

여행이란 내게 무엇인가? 왜 떠나느냐고 물어보면 나는 이렇게 대답하리라.
귀찮지만 나를 재생산하는 일상의 노동으로부터 벗어나고 싶어서.
쉽게 말해, 내 손에 물을 묻히지 않고 다 차려진 밥상에 앉는 재미에, 싱크대에 쌓인 더러운 그릇들을 쳐다보고 싶지 않아서 여행을 꿈꾸는 것이다. 여행은 또한 나를 압박하는 의무로부터의 해방, 직업인으로서 살아남기 위해 참석하는 의례적인 행사와 사교모임들과 가족과의 약속들로 꽉 찬 달력으로부터의 해방을 뜻한다. -64~5쪽

예술을 알면, 문학을 좋아하면 인생이 복잡해진다. 좋게 말해 인생이 풍요로워진다. 보통 사람들은 밖에 보이는 것만 보고 이렇다 저렇다 미추(美醜)를 논하는데, 예술가들은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을 다른 각도에서 보는 사람들이거든. 자신이 남다른 생을 살아야 남들이 보지 못하는 것들이 눈에 들어오는 법이다. 그래서 위대한 인생이 위대한 예술을 낳는다는, 예술가는 모두 불행하다는 신화가 성립하지. -12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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