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못 읽는 남자 - 실서증 없는 실독증
하워드 엥겔 지음, 배현 옮김 / 알마 / 2009년 7월
절판


라디오 방송작가는 경제적으로 작문하는 법을 배운다. 30초짜리 발언을 15초로 줄일 때 어떤 왜곡도 없이 해내기는 불가능하다. 방송인은 내용을 주제에서 벗어나지 않게 편집하고 경제적으로 줄이는 법을 배운다. 원칙을 배워나가면서 기량을 발전시키는 것이다. -52쪽

신문이나 병문안 카드를 읽으려 애쓰지 않을 때라면 실독증은 나를 괴롭히지 않았다. 하늘도 푸르게 보였고 태영도 병원 창문에서 빛났으며 갑자기 세상이 낯설게 느껴지지도 않았다. 실독증은 오직 내가 책에 고개를 처박을 때만 존재했다. 내게 실독증을 데려와 '그래, 문제가 있지'라고 상기시키는 주범은 인쇄물이었다. 자연스레 독서를 피하고 싶다는 유혹이 생겼다. '무언가가 너를 괴롭힌다면 그걸 멀리하라. 그래도 지구는 돌고 돌 테니.' 그런 해법이 통하는 이들도 있겠지만 나에게는 어림도 없었다. 나는 작가다. 더구나 끊임없는 독서가였다. 어떻게 독서를 멈출 수 있겠는가?
병원에게 깨달은 것은 책읽기가 아무리 느리고 어려울지라도-지독히 당혹스러울 때도 있지만-나는 어쩔 도리 없는 독서가라는 것이다. 뇌에 들이닥친 돌풍도 나를 바꿔놓지는 못했다. 나는 열혈 독서광이다. 심장을 멈출 수는 있을지언정 독서를 멈출 수는 없다. 독서는 내게 뼈이자 골수, 림프액이자 피다. -80~1쪽

작업을 하다가 쓴 지 일이 분만 지나도 못 읽는 글이 화면에서 깜빡이는 것을 보노라면 대체 왜 이런 고생을 사서 하는지 나 자신도 궁금해졌다. 무엇 때문에 이 미친 짓을 하는 걸까? 대체 무엇을 증명하려고? 이미 책을 열 권이나 썼는데 이 고생을 자초할 까닭이 있나? 이제 더는 키보드에 손에 얹을 필요도 없었다.
그러나 이런 불평은 오래가지 않았다. 글쓰기는 '내가 하는 일'이었다. 나는 글에 중독된 사람이다. 비록 진지한 예술가 자격을 요구한 적도 문학을 한다고 행세하여 비난받은 적도 없지만 나 자신이 범죄소설을 거뜬히 써낼 수 있는지 알고 싶었다. 그것이야말로 평생 가장 잘 맞았던 직업이었으니까 말이다. -157쪽

작가로 살아가며 고대하는 것 중 하나가 원고를 집에서 출판사로 보낼 때의 두근거림이다. 아이를 학교에 처음 등교시킬 때처럼 기막힌 기분이다. 이것은 한 권의 책이 뛰어든 여정의 시작이다. 이제 책은 출판 시장의 전쟁터와 서평의 지뢰밭을 거치고 마케팅의 위험성과 구매자들의 변덕을 온몸으로 버텨내야 한다.
물론 완전히 잘못된 생각이다. 내가 색스 박사에게 보낸 편지에서처럼 한 권의 책은 작가의 서재를 여러 번 떠났다가 여러 번 떠났다가 여러 번 되돌아온다. 언제나 미지막 순간까지 손질을 거쳐야 한다. 이 마지막 순간이 여러 번 되풀이될 때마다 각종 배송 회사들이 돈을 번다. 작가는 원고를 집 밖으로 보낼 때마다 이번이 마지막이기를 바란다. 다음번에는 그 책이 활자로 조판되거나 교정쇄로 넘어갔는데 최소한 최종고가 되어 있기를 바란다. 하지만 그럴 리 만무하다! 최종 순간의 정밀 편집 과정은 항상 더디게 진행되므로 마치 원고가 우리 집 위층 작업실에 투명한 고무줄로 묶여 있어 책이 편집자의 책상에 도달하자마자 도로 튕겨 돌아온다는 착각마저 든다. -182~4쪽

사는 게 그렇다. 좋은 날도 나쁜 날도 있다. 때로는 힘들고 혼란스럽지만 그 다음 날에 일이 쉽게 풀리면 보상이 된다. 열심히 일하면 보람이 있는 것이다. 그러나 어려울 때도 쉬울 때도 모두 같은 것의 부분일 뿐이다. T.S.엘리엇이 항상 지적하듯 오르막길도 내리막길도 다 같은 것이다. 그래서 머리가 혼란스러운 나머지 원고를 휴지통에 던져버리고 싶을 때조차도 나는 이것이 내가 하고 싶은 일이며 나의 작품이 나와 서로 어울린다는 사실을 잘 알고 있다. 우리는, 작품과 나는 떼려야 뗄 수 없는 사이다. -19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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