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처방해드립니다
카를로 프라베티 지음, 김민숙 옮김, 박혜림 그림 / 문학동네 / 2009년 4월
품절


어떻게 봐도 작가는 자기가 창조한 모든 등장인물이 될 수 있어요. 책 한 권을 쓰고 있을 땐 그 책이 되는 거예요. 책을 쓰는 내내 머릿속이 그 책 생각으로 가득 차 있을 테니까요. 만약 그렇지 않다 하더라도 사람들은 작품으로 작가를 기억하잖아요. 우리가 작가들이 겪었던 창작의 고통이나 이웃들과의 불화와 우리를 동일시할 수는 없지 않겠어요? 그래서 등장인물들과 동일시하는 거죠. 앨리스, 그렇지 않니? -34~5쪽

당황할 필요 없네. 젊은이. 내 감정을 상하게 할까봐 노심초사할 필요 없다고. 우리도 이 성스러운 곳을 '정신병원'이라고 부르고, 또 우리 스스로를 '미치광이'라고 불러. 우리도 우리가 정상......인들과 완전히 똑같지 않다는 걸 알아. 다른 사람들보다 조금 더 공상에 빠져 지내기는 하지. 하지만 그게 우리를 기분 나쁘게 만드느냐 하면 아니, 오히려 그 반대야. 도대체 누가 매사에 제정신이기를 원하겠나? 지나치게 '제정신'인 사람들은 서로 너무 쉽게 얽히고설켜 일을 복잡하게 만들지. 서로가 서로를 속박하는 거야. 으하하하! -47쪽

책! 다른 책들처럼 <보물섬>도 말이야, 하나의 설계도면일세. 일개 집을 넘어서 상상력으로 만들어낼 수 있는, 더 많은 것들이 있는 도면 말일세. 매혹적인 인물들이 사는 하나의 세상이지. 그 도면은 간단해. 몇 장의 종이 위에 글자가 줄지어 있을 뿐이지. 하지만 한 사람 한 사람의 독자가 자기 상상력으로 창조해내는 세계는 그 책-도면을 넘엇 무궁무진하다네. 책에 있는 모든 것도 담고 있겠지만, 그보다 훨씬 많은 것들을 담고 있지. 이 집처럼 말일세. 이 집도 건축가가 도면에 그어놓은 선이 나타내는 것을 모두 다 가지고 있겠지. 하지만 다른 것들도 많이 있잖아. 바로 우리를 포함해서 말이야! -50쪽

"아까 약국에 간다고 하지 않았나요?"
"약국이잖아요. 여기는 서점 약국이에요. 보세요......"
노부인이 책장에서 책 한 권을 꺼내더니 창백한 남자에게 건네며 말했다.
"아침에 열 쪽, 정오에 또 열 쪽, 그리고 자기 전에 스무 쪽 읽으세요."
남자가 고개를 위아래로 크게 끄덕이더니 겨드랑이에 책을 끼우고는 사라졌다. -54쪽

"정말 돈키호테가 책 때문에 미쳤을 거라고 생각해요? 야비하고 잔인한 세상에서는 한시라도 더 살 수 없어서 미쳐버린 게 아닐까요? 전 그나마 돈키호테가 책을 많이 읽었기 때문에 비참하게 늙지는 않았다고 보는데요...... 정의가 없는 세상을 체념한 채 사는 사람과 이를 바꾸기 위해 투쟁하는 사람 중 누가 더 미친 걸까요? 그게 비록 풍차를 상대로 싸우는 것일지라도 말이에요."
"하지만 책은 우리를 현실에서 멀어지게 만들잖아요."
루크레시오가 말했다.
"거리를 두게끔 돕는 거죠."
노부인이 콕 집어 말했다.
"책을 읽을 때 사람들은 어떤 방식으로든 이곳 환자들과 똑같이 행동해요. 특정 등장인물과 우리 자신을 동일시하고 그들의 모험을 재현하지요. 이게 당신이 말한 대로 잠시나마 우리의 일상에서 스스로를 멀어지게 하는 거죠. 하지만 만약 그 책이 좋은 책이라면, 그러니까 우리의 상상력을 자극하고, 생각하게 만들고, 새로운 질문을 하게 만든다면, 나중에 우리가 현실세계로 돌아왔을 때 우리를 좀더 강하고 지혜롭게 만들어줄거예요."-55~6쪽

이야기 책은 사건을 간단하고 정리된 형태로 들려주죠. 그래서 우리가 기억하고 배우고, 또 우리 머릿속에 정리하는 걸 도와줘요. 어린애들이 같은 이야기를 반복해서 듣고 싶어하는 건 자기가 그 정보들을 제대로 기억하고 있고, 또 머릿속에 잘 정리해놓았다는 걸 확인하고 싶어하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이야기 자체를 즐기기도 하지만, 자신이 그 이야기를 제대로 기억하고 이해하고 있다는 걸 확인하는 게 아이들을 안심시키기도 하고요...... 우리 어른들에게도 그와 비슷한 일이 일어나죠. 좋은 책이나 좋은 이야기를 읽으면 우리가 사는 세상을 더 잘 이해하게 되고, 또 생각을 정리하는 데 도움을 받기도 하잖아요. -57쪽

"좋은 영화를 한 편 보고 나면 머릿속으로 몇 시간이고 그 영화를 생각하면서 시간을 보낼 수 있는걸요."
"맞는 말이에요."
에멜리나가 동의했다.
"하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에는 책을 읽는 동안에 비해서 상상력을 펼칠 기회가 별로 없어요. 영화는 다 만들어진 완제품을 제공하거든요. 등장인물들을 보여주고, 그들의 목소리를 들려주고, 행동을 보여주죠......하지만 책을 읽을 때는 말이에요. 당신 눈앞에 조그만 검정색 부호들이 일렬로 배열되어 있을 뿐이에요. 스무 개 남짓의 문자들이 쉬지 않고 반복되고 조그만 그룹을 지어 서로 뭉쳐 있을 뿐이죠(이 환상적인 존재들이 바로 단어예요). 이렇게 많지도 않은 자료들로 당신은 머릿속에 상상과 생각을 통해 완전한 하나의 세계를 만들어내는 거예요......우리가 책을 읽을 때마다 정신이 놀라운 작업을 실현하는 거죠. 이 멋진 훈련이 우리를 단련시키고, 또 내적으로 성장하게 만드는 거예요......-6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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