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저드 베이커리 - 제2회 창비 청소년문학상 수상작
구병모 지음 / 창비 / 2009년 3월
절판


아버지는 동화 속의 새엄마가 '절대로' 없다고 단언했으나 '절대로'만큼 폭력적인 말이 세상에 어디 있을까. 동화가 아무리 가공의 이야기라도 덮어놓고 허튼소리는 하지 않는다. 시대와 문물이 변한대도 사람의 속성에 그리 극적인 변화는 일어나지 않는다. -26~7쪽

텔레비전 주말 드라마를 보면서, 사람들은 외로워도 슬퍼도 울지 않고 참고 또 참는 캔디형 주인공을 보고 말한다.
-저 병신 천치 같은 것, 왜 저러고 당하고 살아? 다 일러바치고 확 나와 버리면 되잖아?
그러나 그리 말하는 이들도 실은 알 거다. 이상과 철저히 거리를 둔 현실을, 호락호락하지 않은 세상이 주는 무게와, 목적을 이루기 위해 어쩔 수 없이 필요한 최소한의 금전적인 지원을. 원하는 것을 얻기 위해 조금은 감수해야 할 여러 유형의 폭력이 있다는 체념적인 단정. 일단 닥치고 집을 나와 청소년쉼터에서 미래를 준비하는 아이들은 아마도 생명의 위협에 가까운 폭력을 피해 도망쳤거나, 견뎌본들 나중에라도 얻을 것 없는 가난한 집에 미련을 버렸거나 둘 중의 하나이리라는 폭 좁은 편견. 기타 강간이나 임신 절도 등의 문제는 가난과 폭력의 별책 부록 같은 것이리라고. 영악한 건지 고지식한 건지, 대학에 가면 당면한 문제 가운데 최소한 몇 가지는 해결된다는 전통적이고 막연한 중류 계층의 믿음. 남들이 밟은 대로 따라가는 길. 그리로 가려면 물질적인 조건은 가능한 한 충족될수록 유리하다. -42~3쪽

*마인드 커스터드푸딩
시험이나 출장 등 중요한 일을 앞둔 당일에 마인드 컨트롤이 잘되지 않을 때 부정이 타지 않도록 몸속에 부적을 섭취해주세요.
*메이킹 피스 건포도 스콘
사과하고 싶은 사람에게 주세요. 100프로 화해합니다. 그러나 미안하다는 마음보다 어쩔 수 없이 사과한다는 마음이 앞서면 효력을 내지 못할 것입니다.
*브로큰 하트 파인애플 마들렌
실연의 상처를 빨리 잊을 수 있게 도와줍니다. 하지만 주인장으로선 그다지 추천하고 싶지 않아요. 상처를 빨리 잊는 데에 집착하는 사람은 그만큼 새로운 사랑도 무성의하게 시작하기가 쉽답니다.
*노 땡큐 사브레 쇼꼴라
정말 사귀고 싶지 않은 사람에겐 고백받았다면? 이걸 대답으로 주세요. 한마디로 '먹고 떨어질 겁니다.'-61쪽

*비즈니스 에그 머핀
새 사업이나 장사를 시작하는 집에 선물 세트로 갖다 안기세요. 엄청난 성공이나 부귀를 안겨주진 못하지만 장사를 꾸준히 지속하고 싶다면... 이게 행운을 가져다줄 거예요. 최소한 말아먹을 일은 없을 거랍니다. 그러나 자꾸만 무리하게 사업을 확장하려는 욕심 많은 사람에게는 듣지 않아요.
*메모리얼 아몬드 스틱
이걸 먹고 명상에 잠기면 잊어버렸던, 또는 가장 기억하고 싶지 않았던 과거의 일이 머릿속에 또렷이 떠오릅니다. 나의 잠재의식 속에는 뭐가 있을까? 내가 모른 척 덮어둔 기억은 무엇일까? 모험심과 호기심이 넘치는 분들이라면 시도해볼 만하네요.
*에버 앤 에버 모카 만주
전학이나 유학, 이민 등 멀리 떠나는 벗에서 선물하세요. 당신을 결코 잊지 못할 것입니다. 그 사람의 힘든 순간, 기쁜 순간마다 당신이 떠올라 당신을 찾지 않고는 못 견딜 거예요. -62쪽

*도플갱어 피낭씨에
주문에 따라 이걸 먹고 잠들면 다음 날 내가 가기 싫었던 학교나 회사에 또 하나의 내가 대신 가줍니다. 맘 편히 집에 있거나 땡땡이를 치세요. 단 정말로 도플갱어가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 가보면 절대 안 됩니다. 다른 사람들이 둘을 동시에 발견하거나 둘의 눈이 마주치면 둘 중 하나가 영원히 사라져버릴 수 있습니다. 어느 쪽이겠어요?-62~3쪽

원래 모든 이야기 속에서는 이런 상황에서 바로 저런 것, 굳게 닫힌 문에 격렬한 호기심을 느끼고 다가가 문손잡이를 돌려보거나 서랍을 당겨보는 법이었다. 처음에는 잠겨 있는 것처럼 보이다가, 어느새 손잡이는 스르르 돌아가고 또 다른 세계가 열린다... 내지는 그 안에 무시무시한 무언가가 들어 있다...는 게 대략의 설정이며, 그런 이야기 속에서 반복되는 화소(話素)란 대체로 함정이었다. 금기의 문을 열면 푸른 수염의 컬렉션이 되어버린다. 또는 몸이 돌덩이가 되어 굳어버린다. -69쪽

달콤한 과자를 구워내는 그의 표정은 조금도 달콤하지 않았고, 맛이나 향기로 치자면 오히려 스파이스 향신료의 매운맛에 가까워 보였다. 이걸 먹는 손님들의 행복한 표정을 생각하면 저도 모르게 미소가 떠올라요-텔레비전에 나오는 수많은 빠띠씨에들은 주어진 대본이라도 외듯 한결같이 말했다. 하지만 그가 손님들에게 주는 것은 등을 기대고 안주해도 좋은 행복이 아니라 무거운 책임감이었다.
입으로는 신경 쓰지 말라고 했지만 그의 뒷모습은 조금 쓸쓸해 보였다. -93쪽

처음에는 분명 몸을 피하는 것이 목적이었지만, 지금은 조금만 더 이들을 들여다보고 싶은 마음이 컸다. 그가 굽는 빵의 결마다 사람들의 어떤 욕망이 배어 있는지, 그 위에 얹어놓은 잼마다 어떤 악의가 끈적하게 매달려 있는지. -115쪽

숙명과 현상의 관계는 닭과 달걀 같아. 약간 종교적 관점에서 보자면 모든 사람과 사물과 사건은 이유를 갖고 거기 있는 거라고들 해. 하지만 그의 생각은 달라. 아무런 목적도 의지도 없는 채로 우연히 거기 있었던 것들이 서로를 향해 손을 뻗으면서 그때부터 이유를 만들어간다고 해. 그렇게 만들어진 이유들의 흩어짐이 대원리 또는 숙명을 이뤄. 이건 그의 생각일 뿐이고 너는 나름대로 네 사정에 맞게 생각해. 그는 우주의 소리를 듣지만 실은 우주에 대해 다 알지 못하니까. 그걸 알면 진작 그의 육체와 영혼은 분자단위로 흩어져서, 존재의 비존재도 아닌 상태가 되지 않았을까. -121쪽

종류를 불문하고 감정의 폭발적인 상승은 언제나 경계할 대상이다. 비이성적인 행위를 촉발하는 에너지의 출처는 대체로 욕망과 맥락이 닿아 있으니까. 고대부터의 모든 종교가 보여줬듯이 극단적이고 끓는점이 낮은 사랑은 공격과 폭력을 부른다.
사람의 감정이 한 덩어리의 밀가루 반죽과 같다면. 나는 아직 누군가를 좋아해본 적이 없지만 그럴 만한 사람이 설마라도 나타나면, 한 덩어리의 감정을 최대한 가늘고 길게 뽑을 거다. 솜씨 좋은 장인이 뽑아낸 면발만큼이나 가늘고 길게. 굵고 짧게 토막 나는 감정이라면 분노만으로도 충분해.
이 손님은 아마도 굵고 짧은 사랑을 한 모양이다. 첫눈에 마음에 든 상대에게 체인 월넛 프레첼을 선물한 뒤 접근에 성공. 그 감정의 유통기한은 삼 개월. 참치 통조림만도 못한 사람의 감정. -131쪽

옛이야기에서와 달리 지금 사람들이 마법의 과자를 절실히 필요로 하는 건 당장의 물리적이고 물리적인 필요보다는 대체로 추상적이고 감정적인 문제 때문. 과열된 감정은 눈에 보이지 않기 때문에 수소를 가득 담은 풍선만큼이나 끝없이 상승할 수 있다. 감정과 풍선의 공통점은 비가시권의 높이에서 제풀에 폭발해버린다는 것.
그에 비하면 현실이란 그넷줄이나 위로 튀어오르는 공과 같이 얼마나 건조하고 절망적인지. 언제나 눈에 보이는 곳까지밖에 오르지 못하며, 땅이 잡아당기는 힘을 뿌리치지 못하고 다시 내려오니까. -139쪽

자신의 아픔은 자신에게 있어서만 절댓값이다. -163쪽

...무엇보다도 사람의 감정은 어째서, 뜨거운 물에 닿은 소금처럼 녹아 사라질 수 없는 걸까. 때로 어떤 사람들에게는 참치 통조리만도 못한 주제에.
그러다 문득 소금이란 다만 녹을 뿐 사라지지는 않는다는 걸 깨닫는다. 어떤 강제와 분리가 없다면 언제고 언제까지고 그안에서. -18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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