꿀벌의 집
가토 유키코 지음, 박재현 옮김 / 아우름(Aurum) / 2009년 4월
절판


그러나 손으로 만질 수 있는 물건은 언젠가는 없어지고 부서지는 것이 아닌가. 내 기분에 따라 갑자기 싫어지는 일도 있을 것이다. 도쿄에 있는 친구 유미는 남자친구가 바뀌었을 때, 그때까지 받은 편지와 선물을 쓰레기 봉지에 담아 아무렇지 않게 버렸다. 그 편이 다시 시작하기 쉽다는 이유에서지만 절대로 재가 될 수 없는 '기억'은 어떻게 할 것인가. -48~9쪽

여기로 온 이후 오랜만에 잠이 잘 오지 않는 밤이 계속되었다.
그러나 리에, 잠깐만! 도회지에 있었더라도 자연의 변덕스러움은 다를 바 없어. 큰 지진이나 폭풍, 폭우가 발생하면, 이런 시골보다도 몇 십 배의 피해를 입지. 거리의 세련된 빌딩은 산의 거목처럼 깊이 뿌리를 내리고 있지 않아. 결국 어디에 있든 그 상황이 되면 자연을 당해낼 수 없어. 도회에 있으면 그 사실을 잊어버리니까, 오히려 더 불안한 기분도 들어.
사이좋은 유미에게 이런 느낌을 메일로 보낼까? 그러나 답장은 아마 이런 식이 될 것이다.
'리에가 말한 게 맞을지도 몰라. 그러나 역시 산이나 바닷가의 리조트에 가면 자연은 멋지다고 생각해.'
그럴 게 분명해, 리에는 한숨짓고 몸을 뒤척인다. 자연은 변덕쟁이다. 때로는 아름답고, 귀엽고, 기분을 좋게 만들고, 맛있고 그리고 상상도 할 수 없는 '무서운' 것이다. 메일로는 그것을 전할 수가 없다. 그녀를 여기에 데리고 오지 않는 한. -70쪽

꿀벌의 집의 사람들은 보통 회사와 비교하면 가족처럼 강한 결속력으로 뭉쳐 있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인상이었다. 양봉이라는 공통목표가 있는 데다 함께 일하는 시간이 길고, 공동생활을 하는 부분도 많기 때문에 단순하게 생각했지만, 사실은 끈끈하게 서로에게 의지하는 관계는 아닌 것 같다. 다른 사람의 세계에 함부로 들어가서는 안 된다고, 속을 뒤집어 보면 아케미는 그것을 알려준 것이다. 나이는 어려도 여기서는 그녀가 선배다. 꿀벌의 집에 갑자기 녹아들어서는 안 돼요. 아직도 알아야 할 것이 많이 있어요 라고. -84쪽

기세 씨(자신의 엄마를 이렇게 부르는 사람인 것이다)가 여름에도 긴 소매 옷을 입고 있는 이유를 알아? 손목에 상처가 있어. (아, 그러고 보니 온천 욕조에서...) 아버지가 가족이 있는 곳으로 돌아가버렸을 때 그랬어. 하지만 실패한 덕분에 내가 태어날 수 있었고, 그녀는 보는 바와 같이 꿀벌을 상대로 팔팔하게 살아가고 있지. 기본적으로는 살아있는 게 자연스러운 거야, 절대로 그래. 사람의 일생이란 말이지, 땅속에서 솟아나온 물이 구불구불 흘러서 마침내 바다로 흘러가는 것과 같지 않을까? 그 흐름을 도중에서 의식적으로 멈추려 하다니... 어떤 큰 이유가 있었기 때문일 거야. 자연스런 흐름에 따라 잘 살고 있는 사람은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123~4쪽

모두 시끌벅적 이야기를 나누면서 딸기를 먹고 있자니, 옛날부터 쭉 이런 화기애애한 정경이 계속되어 온 듯한 기분이 들었다. 성격도 가정환경도 다른 한 사람 한 사람을 맺어주고 있는 것은 '꿀벌'이라는 재미있는 벌레다. -136쪽

이곳 사람들은 모두 벌을 키우는 일 자체에만 지나치게 매달리고 있다는 것을 리에는 그때 실감했다. 자신이 보살피는 꿀벌들이 달콤한 황금빛 액체를 듬뿍 만들어준 시점에서, 거기서 사고가 닥 멈춰버리는 것 같다. 그러나 꿀벌도 산란을 맡은 벌, 육아를 맡은 벌, 꽃가루와 꿀을 모아오는 벌, 보초를 맡은 벌, 그리고 수벌로 확실히 분업하고 있지 않은가. 집단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어떤 역할도 없어서는 안 된다. 이 직장에 온 이후 처음으로 리에는 넘을 수 없는 '벽'에 부닥친 느낌이었다. -140~1쪽

꿀벌도 인간도 사회적 동물이라는 점에서는 공통점이 있다. 리에는 벌 사회의 겉과 속이 차츰 보였다. 비유하자면, 여왕벌은 무리 안에서는 스타 연예인과 같은 존재다. 로열젤리 등을 받으며 여유롭게 살고 있다. 그러나 그녀가 소중히 대접받는 이유는 많은 알을 생산하기 때문이다. 늘 어두운 둥지 속에 갇혀서 일벌처럼 야외로 날아다닐 자유는 주어지지 않는다. 자신이 그렇게 산다면...... 상상만으로도 소름이 끼쳤다. -142~3쪽

꿀벌을 키우는 방식에 기본은 있지만 세세한 법칙 같은 것은 없어. 그 사람이 벌을 대하는 방식이 제각각 다르니까. 나도 물론 내 방식이 있지만 겐타 군에게 강요할 수 없어. 열 명의 양봉가는 열 가지 색깔의 비밀을 안고 있는 셈이지. 그러니까 양봉이 재미있는 거야. -158쪽

생각해보면 아빠도 엄마도 딸도 오랫 동안 따로따로 살아왔다. 같은 지붕 아래 먹고 자면서도 서로 어긋나 있었다. 가족 간에 어긋나는 것이 그리 이상한 일이 아니라고 해도, 어떻게 어긋나 있는지조차 관심 없었던 것은 좀 심했다. 이런 것을 생각할 때마다 리에 안에 살고 있는 꿀벌이 쏜다. 쏘아도 내장이 나오지 않는 불사신 꿀벌이. 엄마도 그런 벌을 몸속 깊숙이 계속해서 키우며 살아왔던 것일까. 의논을 할 수도, 이제 만날 수도 없는 곳으로 가버린 아빠 때문에...-185쪽

지난 가을, 다채로운 색채의 낙엽이 떨어지는 센트럴파크를 두 사람은 손을 잡고 걸었다. 고층빌딩이 날아가버려도 뉴욕은 멋진 도시였다. 연인이 있는 곳이기 때문은 아니다. 그곳에 가서 결코 사라지지 않는 '리에의 발자취'를 남겼기 때문이다. 산토끼가 눈 위에 발자국을 남기듯이. 이전에는 늘 수면을 표류하는 듯 살아왔다. 표류하는 동안은 이상하게도 발자취가 남지 않는다. 비록 고통 때문에 발자취가 흩어져도-산토끼가 여우에게 쫓길 때처럼-그것은 존재의 증거였다. 조지도 리에도 분명 이 지구에 살고 있다고 하는. 앞으로 두 사람 사이에 무슨 일이 일어날지는 미지수지만, 일어난 일은 모두 재가 되지 않는 '기억'으로 확실히 남을 것이다. -189~9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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