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선 편집자는 플래너다. 무에서 유를 만들어내는 발안자다. 플랜 없이는 아무것도 시작되지 않는다. 아이디어에 따라 베스트셀러도 나올 수 있고 스테디셀러나 명저도 나올 수 있다. 편집자는 그 탄생 과정을 지켜볼 수 있다는 특권이 있다. 출판계에는 감나무 밑에 세 명은 누워 있다는 말이 있다. 뒤에서 상세히 설명하겠지만 오해를 무릅쓰고 말하자면 편집자는 모방도 두려워해서는 안 된다. 물론 표절은 안 된다. 아이디어란 모방의 변형에서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라 생각한다. -18~9쪽
대형 서점에는 POS 시스템이 도입됐다. 계산대에서 바코드를 읽어 하루의 매출을 금방 알 수 있다. 그 때문에 서점에서는 빨리 팔리지 않는 책을 꺼리게 됐고 서점의 서가는 잡지 중심, 코믹 편중의 상품 구성으로 흘러가고 있다. 모름지기 책의 생명은 다양성인데 독자들은 다양한 책을 만날 기회가 줄고 있는 셈이다. 뒤에 가서 자세히 설명하겠지만 책은 한 종 한 종의 내용이 제각기 다른 상품이다. 한 권의 책이 어떤 사람에게는 무엇으로도 대신할 수 없는 존재지만, 관심 없는 사람에게는 그저 무거운 물건에 지나지 않을 수도 있다. 후자는 읽고 싶지도 않은 책을 선물로 받아본들 기쁠 리 없다. -48쪽
알다시피 서점의 서가에는 질릴 정도로 별의별 책이 진열되어 있다. 고시점은 더더욱 놀라게 한다. 이 이상 무슨 책이 더 필요하냐는 의구심이 들 수도 있다. 그러나 인간의 욕구는 무한한다. 세상에 대해 더 알고 싶어 하고 풀어 밝히고 싶어 한다. 그걸 가능하게 하는 건 말밖에 없다. 우리의 욕망을 충족시키는 도구로 문자와 언어를 능가하는 것을 여태껏 보지 못했다. 언어의 동물인 인간에게 활자만큼 강력한 힘을 발휘하는 것이 없었다.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런데 수년 전부터 사회는 급격한 변화를 겪었다. -64쪽
기획에는 제한이 없다. 하면 안 된다는 것이 없다. 책이라는 형태를 띠고 독자들이 사서 읽어주기만 하면 뭐든 괜찮다. 나는 늘 기획을 삼각형이라 생각한다. 각 꼭지점은 가치(임팩트), 판매 부수(채산성), 실현성으로 구성되어 있다. -73쪽
거듭 말하지만 책에는 범용성이란 없다. 처음부터 한정되어 있다. 누구든 읽을 수 있는 책은 아무도 읽지 않는 책이나 마찬가지다. 따라서 한정하기는 책의 본질이라고도 할 수 있다. 주제나 대상 독자 등을 좁힘으로써 읽는 이의 욕망을 책으로 직격할 수 있다. (중략) 단 한 가지 조건이 있다. 기획하는 사람이 독자의 처지에 설 수 있느냐 하는 점이다. 나란 존재를 잊고 독자가 되어야 한다. 자기 자신을 제도로 만들지 못하면 '한정'이란 어렵다. 바꿔 말하면 다수를 노리는 게 아니라 확실한 대상에게 미끼를 던지라는 뜻이다. -85~6쪽
편집자에게 헛된 것이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것이 단련하고 있다는 증거다. 흔히 경주마를 평할 때 피부가 얇다는 표현을 쓴다. 예민하여 당장이라도 달려나갈 것 같다는 뜻이다. 편집자도 피부가 얇아야 한다. 늘 감성을 갈고닦아야 한다. 예민한 촉각을 지니려면 공부하는 자세는 필수다. 확인하는 의미에서 덧붙이자면 여기에서 말하는 공부란 시험에 합격하기 위한 공부가 아니다. 정삼각형이 큰 책을 편집하기 위한 공부다. -99쪽
그런데 가끔 한 권의 책으로는 훌륭한 장정이라도 서점 매장에 진열되면 다른 책에 묻히는 책이 있다. 반대로 단독으로 보면 특별할 게 없는데 매장에서 독자의 눈을 끄는 장정도 있다. 무엇보다 책은 손에 들고 읽게 만들어야 의미가 있다. 장식품이 아니다. 그런 의미에서 장정은 실용품이다. 일부 예술성에 너무 치우치거나 장식만 지나친 장정을 본다. 내용은 별것 아니면서 외양만 멋들어지게 꾸민 책도 있다. 낯뜨거운 일이다. 편집자가 얼마나 힘들었을지 모르는 바 아니지만 시간이 갈수록 창피해 얼굴을 들 수 없을 것이다. 이렇듯 장정이 아무리 중요하다 해도 내용이 나쁘면 책은 가치를 잃는다는 사실을 잊지 말자. -157~8쪽
선전 문구에는 편집자만이 가지고 있는 하나의 원칙 같은 것이 있다. 우선 집필자인 저자의 의도에서 벗어나선 안 된다. 띠지만 눈에 띄어서는 안 된다는 뜻이다. 본문과 연관성이 있어야 한다. 어디까지나 광고문구이므로 독자의 눈길을 끌어야 한다. 그 중에는 독선적이고 잘난 척하는 자기만족형 띠지도 있다. 띠지 문구로 문학을 할 셈인지. 어디까지나 책을 부각시키기 위해 존재하는 것이 띠지라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되겠다. 요컨대 공간이 한정되어 있으므로 짧은 문장이 바람직하다. 간결하면서 이해하기 쉽고 강하게. 요점을 명료하게 전할 수 있어야 한다. 띠지는 책상 위에서 뜻을 음미하며 읽는 것이 아니므로 서점 매장에서만 제 구실을 하면 된다. 게다가 감각 있는 띠지 문구라는 인상을 주면 더할 나위 없다. -167~8쪽
거의 모든 신문에 서평란이 있다. 다른 미디어의 소개란에 비하면 상당한 공간이 할애되고 있다. 책의 사회적 역할이 크다는 것을 의미한다 하겠다. 광고가 충분하지 못하다 싶으면 어느 편집자든 신문 서평란에 실리기를 바란다. 특히 책은 안목 있는 서평자의 의견이 큰 구실을 한다. 범용성이 없는 대신 특정 영역에 절대적인 후각을 지닌 사람이 있는 법이다. 그런 신뢰할 만한 서평자의 안내로 독서의 재미에 눈을 뜨는 사람도 많다. -184쪽
편집자는 하드디스크 같은 존재다. 외부에 얼마나 풍부하고 우수한 소프트를 갖고 있느냐가 편집자의 가치를 결정한다. 개인의 능력이란 뻔하기 때문이다. 저자라는 탁월한 소프트와 관계를 한 번의일로 끝내는 것이 얼마나 아까운 일인지 알았을 것이다. (중략) 내가 젊은 편집자들에게 항상 하는 말이 '점點'이 아니라 '면面'의 교제를 하라는 것이다. 저자와 편집자는 원고를 쓰고 받는 '점'의 교제에서 출판한다. 그런데 5장에서도 설명했다시피 집핀을 고통이 따르는 작업이다. '점'의 교제로는 해결하지 못하는 부분이 있다. 그래서 인간의 다양한 '면'에 바탕을 둔 관계가 생겨나고 나아가서 진정한 인간관계가 싹튼다. -191쪽
편집자를 촉매라고도 한다. 편집자가 저자의 재능을 꽃피운다는 의미로 편집자의 사명이요 기쁨이다. 그리고 촉매에는 다른 의미도 있다. 편집자가 자신의 존재를 통해 다양한 인간을 관계 짓는다는 의미다. 이 또한 중요한 구실이 아닐 수 없다. -199쪽
책의 용도도 다양하며 모호하다. 필요 없는 부분도 많다. 속도경쟁 시대인 현대에 다른 미디어에 비해 뒤처져 보이는 것은 정보량이라는 관점에서 봐도 부정할 수 없다. 그러나 책은 언뜻 보기에 필요 없어 보이는 부분, 쓸모없는 부분에 존재가치가 있다. 그것은 인간의 오감과 비슷하다. 우리는 외계의 일체를 보고 감응한다. 이건 좋은 표현이 아니다. 우리는 그런 외계에 둘러싸여 있다. 처음부터 필요 없는 소리, 필요 없는 풍경, 필요 없는 냄새라고 없애버리면 인간으로서의 의미가 사라지고 만다. 당장은 필요 없을지라도 어쩌면 나중에 가서 큰 의미를 가질지도 모르는 가능성을 꺾는 수가 있다. 단기적인 목적에 맞춰 만들어진 소리, 풍경, 냄새가 얼마나 무미건조하고 허무한지 우리는 잘 안다. 그러면서도 사회는 그런 공리적, 효율적인 방향으로 치닫고 있다. -201쪽
지금 일본의 출판문화가 흔들리고 있다. 그러나 기능이 분화되고 개별화될지언정 편집이라는 기능 자체는 사라지지 않을 것이다. 다만 출판사를 중심으로 하는 출판 구조는 분명히 바뀔 것이라는 점은 예상해두는 편이 좋다. 그로 인해 오히려 의외의 기회를 낳을지도 모른다. 이 책 첫 머리에도 썼지만 창업한 지 60년 이상 된 출판사는 10퍼센트에도 못 미친다. 출판계는 변동이 심하다. 상황에 적응할 줄 아는 합리성을 지닌 출판사만 살아남는다. 코믹의 매출 저조로 시작된 이 변화는 상상 이상으로 거대할지도 모른다. -213쪽
인터넷이라는 한정되면서 폐쇄적인 도구가 오히려 살아 있다는 점에 주목하고 싶다. 책은 불특정 다수와 불특정 다수를 잇는 역할을 한다. 책을 매개로 화제가 전개되는 것을 자주 경험한다. 도구로서의 책의 특성을 다시 인식할 필요가 있는지도 모른다. 편집자도 출판사도 서점도 그동안 너무 무관심하였다. 좋은 책은 독자들이 알아서 읽게 되어 있다는 생각에서 한 발짝도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그냥 놔두어도 서점을 또 찾는 사람이 있다고 낙관했다. 그러나 다른 미디어의 발전과 새로운 자극 때문에 사실은 서점을 찾는 발길이 줄어드는 실정이다. 독서는 습관성 요소도 강하다. 한번 발길이 뜸해지면 귀찮아진다. 그 결과 출판사와 편집자는 독자의 읽는 힘이 저하하였다고 탄식한다. 자업자득이라 아니할 수 없다. -215쪽
편집자마저 자신의 껍질에 틀어박혀서는 안 된다. 저자에게 정열을 다하듯 독자에게도 정열을 쏟아야 한다. 독자에 대한 참견이야말로 편집자에게 가장 요구되는 자세라 생각한다. 물론 출판사 전체에 요청되는 자세이기도 하다. 그만큼 출판계는 절박한 상황에 놓였다. -21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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