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는 길에 나는 마지막으로 부왕의 용안을 우러러보았다. 일찍이 천하를 쥐고 흔들었던 부왕, 용맹하고 오만하고 대범하고 여색을 밝혔던 부왕. 그가 이제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처럼 관 속에 누워 있었다. 나는 죽는 건 무서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예전에는 부왕이 죽지 않을 거라고 생각했었다. 그러나 그는 결국 죽었고, 말라비틀어진 나무토막처럼 거대한 관 속에 누워 있었다. -17쪽
제왕의 생애란 그렇듯 하잘것없는 말들을 견디며 쓸데없는 일을 하는 가운데 흘러가는 거라고. -21쪽
"그대는 참는 것을 배워야 합니다." 나는 도무지 각공의 말을 이해할 수 없었다. 나는 섭왕인데, 왜 내가 모든 것을 참아야만 한단 말인가? 사실 그와는 반대로 나는 내가 싫어하는 모든 것을 부숴버리고 없앨 권리가 있었다. 오동나무 숲에서 들려오는 한밤중의 울음소리까지도. -24~5쪽
나는 갑자기 기분이 나빠졌다. 그래서 연랑을 끌어내리다시피 말에서 내리게 했고, 어서 금관과 용포를 내놓으라고 윽박질렀다. 나는 금관과 용포가 내게 얼마나 소중한 물건인지를 깨달았다. 이 짧은 시간 동안의 옷 바꾸기 놀이를 통해 나는 내가 그 제왕의 표지에 얼마나 많은 미련을 품고 있는지 깨달았다. 나는 짚더미 위에 엎드려 연랑이 말을 타는 모습을 보고 있을 때의 당혹스럽고 우울한 심정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를 알 수 없었다. 나는 문득 내 섭왕의 표지가 다른 사람의 몸에도 잘 어울리며, 심지어 더욱 위풍당당해 보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환관의 누런 옷을 입고 있으면 나는 어린 내시에 불과했다. 금관과 용포를 걸치고 있어야만 비로소 제왕이었다. 그것은 아주 무시무시한 경험이었다. -98쪽
나와 팽씨의 혼인은 이 위태로운 바둑판의 포석이었다. 의심할 나위 없이 그것은 위기를 벗어나기 위한 최후의 수단이었다. 일이 그렇게 진행되는 동안 나는 국난에 직면한 여느 국왕들과 다름없이 초조하고 불안한 심사를 끌어안고 번심전에 나가 문무백관이 벌이는 날카로운 논쟁을 지켜보며 아무 대책 없이 앉아 있었다. 나는 내가 무능하여 허울밖에 남지 않은 제왕이라는 사실을 뼈저리게 느꼈다. 모든 것은 황보부인, 맹부인, 승상 풍오의 결정에 따라 진행되었다. 그래서 나는 입이 붙은 듯 한 마디도 하지 않았다. -146쪽
나의 위축되고 비관적인 감정 상태에 신경을 쓰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누구도 당당한 섭왕이 이 비상시국에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하고 멀뚱멀뚱 앉아 있을 뿐이라는 데 주의하지 않았던 것이다. -146쪽
혼례식 전날 밤, 나는 기이한 꿈을 꾸다가 깨어났다. 나는 꿈에 새처럼 궁궐 지붕 위로 훌쩍 뛰어올랐다. 궁궐의 열여덟 개의 문이 순식간에 내 뒤로 스쳐 지나갔다. 나는 꿈속에서 흰 빛이 흐릿하게 반짝이는 공터를 보았다. 역시 흐릿하여 까만 점으로만 보이는 한 무리의 사람들이 공터 주위에 가득 들어차 있었다. 광대패의 줄타기 줄이 내 머리 위에서 흔들리고 하나의 목소리가 하늘 위를 맴돌며 끊임없이 울렸다. 줄을 잡아라, 올라가라, 줄을 타라, 올라가라, 줄을 타라. 나는 줄을 잡았다. 꿈속에서 나는 새처럼 가볍게 날아올랐다. 공중의 줄 위로 사뿐히 떨어졌을 때, 내 몸은 줄과 함께 흔들리기 시작했다. 앞으로 세 걸음, 뒤로 한 걸음. 나는 더할 수 없이 가볍고 상쾌했다. 더할 수 없이 자유롭고 즐거웠다. 그리하여 줄을 타는 동안 내 영혼이 가벼운 연기처럼 하늘 저편으로 둥실 떠올랐다. -148쪽
내가 무슨 빌어먹을 개 방귀만도 못한 왕이란 말이냐? 나는 하늘 아래 가장 유약하고 무능하며, 또한 가장 가련한 제왕이로구다. 어릴 때에는 유모와 환관, 궁녀 들이 하라는 대로 했고, 글을 깨우칠 무렵에는 승려 각공이 하라는 대로 했으며, 왕이 되어서는 황보부인과 맹부인이 하라는 대로 했다. 이제 나라의 정세가 크게 변하여 민심이 흉흉하고 여기저기서 반란을 일으키고 있으니 모두 다 늦었구나. 한 자루 칼이 내 목을 노리고 달려드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나는 그저 여기서 한숨만 내쉬고 있을 뿐이다. 연랑, 말해보아라. 내가 무슨 빌어먹을 왕이란 말이냐?-217쪽
나는 가난과 굶주림이 사람을 변화시킨다는 것을 알았다. 사람이 돈이 없어 죽을 지경이 되면 누구든 사람을 죽이고 물건을 뺏는 짓을 하는 것이다. 그런데 왜 우리는 그들을 막지 못했을까? 왜 두 눈을 멀쩡히 뜨고 평생을 먹고 살아야 할 모든 재산을 순식간에 강도들의 손에 넘겨주었을까? -264쪽
우리 광대패가 지나가는 곳에서는 언제나 일종의 세기말적 향락의 분위기가 흘러넘쳤다. 사람들은 남녀노소를 불문하고 앞다투어 공연장에 몰려와서는 소문으로 들었던 줄타기 재간꾼으로 변신한 제왕의 모습을 확인하고자 했다. 줄타기 왕 광대패는 하늘과 사람이 일으킨 재앙으로 죽어가는 그들의 삶에 한때의 즐거움과 한 모금의 생기를 선사했고, 그로 말미암아 터져나오는 갈채와 환호성을 기꺼이 받아들였다. 그러나 사람들이 폐위당한 제왕에게 깎듯이 인사를 올릴 때면,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가 없었다. 섭왕을 부르는 사람들의 환호성을 들을 때마다, 나는 예전에 내가 썼던 왕관이 여전히 수많은 사람들의 눈을 속이고 있는 것 같아 크나큰 서글픔을 느꼈다. 일찍이 머리에 왕관을 썼던 사람은 이미 오래전에 함정에서 빠져나와 멀리 왔건만, 궁궐 담장 밖의 이 죄없는 백성들은 아직도 그 검은 표범의 면류관에 속고 있는 것이었다. 거대한 사기극의 주요 인물이었던 나는 가까스로 나 자신을 구원했지만, 이 순박하고 우둔한 사람들까지 영원한 미망에서 건져낼 수는 없었다. -329~3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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