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성의 인연>을 보고 문득 니노의 예전 작품을 뒤적거려봤는데, 때마침 눈에 들어온 <삼가 아룁니다, 아버님>. 4분기에 하는 <바람의 정원>과 같은 각본가(쿠라모토 소우)의 작품이라는 점과 그가 이제는 절필을 선언했기에 이왕이면 겸사겸사 3부작 (<자상한 시간>, <삼가 아룁니다, 아버님>, <바람의 정원>)을 함께 볼까 싶어 보게 됐다.



  카쿠라자와에서 메이지 시대에 문을 연 오래된 요정인 사카시타에서 견습생으로 일하고 있는 잇페이. 하지만 카쿠라자와에 고층 건물이 들어설 계획이 생기고, 이에 사카시타는 조금씩 흔들리기 시작한다. 여기에 사카시타의 실질적인 주인인 정계의 거물 정치가인 쿠마사와의 죽음으로 사카시타는 변화를 꾀하게 된다. 그리고 사카시타 속에서 벌어지는 갖가지 사건들과 자신의 아버지를 알지 못하는 잇페이의 이야기가 차분히 그려진다. 



  쿠라모토 소우의 작품들이 대개 그러하듯 이 작품 또한 잔잔하다. 때문에 뭔가 자극적인 요소들을 좋아하는 이라면 꽤 지루하고 재미없을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처음에는 달리 튀는 색깔이 없는 이야기에 하품이 나올 지도 모르겠지만, 그 속에서 의외의 웃음와 감동, 그리고 메시지를 느낄 수 있어서 한 폭의 따뜻한 풍경화를 보는 듯한 느낌을 받았다. 



  사카시타라는 오래된 요정을 배경으로 전통과 현대와의 조화, 점점 사라져가는 옛 것에 대한 안타까움이 이 드라마에는 잘 녹아있다. 100년 넘게 낯선 손님은 받지 않고 단골의 소개로 알음알음 장사를 해온 사카시타의 풍습이 이제는 더이상 살아남을 수 없게 되는 상황을 보며 왠지 우리 주변에서 쉽게 접할 수 있는 모습이 아닐까 싶다. 개발이라는 이름 하에 점점 삭막해져만 가는 도시의 모습은 한국이나 일본이나 다르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파트와 고층 빌라가 빼곡히 들어서 정겨움이 없어진 거리. 시대의 요구가 어쩔 수 없다지만 점점 변해간다는 것은 가슴 한 켠을 아릿하게 만드는 것 같다. 



  여기에 할머니를 둘러싼 이야기도 꽤 가슴이 아팠다. 한 때는 사카시타의 실권을 잡고 있었지만 이제는 딸에게 실권을 넘겨준 채 자신의 발언권마저 잃어버린 할머니. 딸이 몰래 사카시타를 없애고 신 사카시타 건축 계획을 세운 것을 알게 되고 가출을 했을 때 손녀를 빼고 가족들은 누구 하나 할머니가 그동안 어떤 생활을 해왔는지 알지 못한다. 정계의 괴물이라 불린 쿠마사와의 죽음을 접하면서도 첩이기 때문에 직접 찾아가지 못하고 멀리서 명복을 빌 수 밖에 없는 상황, 자신이 오랫동안 지켜온 사카시타를 무너뜨릴 수 밖에 없는 상황 속에서 할머니는 결국 무너지고 마는 모습이 너무 안쓰러웠다. 비단 드라마 속의 할머니에게 한정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 사회가 노인을 경시하는 모습이 사카시타의 이야기를 통해 잘 보여진 것 같았다. 



  '삼가 아룁니다, 아버님'이라는 제목처럼 이 드라마는 잇페이가 화자가 되어 자신을 둘러싼 이야기를 아버지에게 편지 형식으로 전개해간다. 때문에 나레이션이 꽤 많은 편인데 니노의 목소리만 들어도 사건의 분위기가 전해져 드라마 속의 이야기가 꽤 가깝게 느껴졌다. 보통의 드라마라면 잇페이의 아버지 찾기가 주된 스토리가 되겠지만, 여기서는 어디까지나 부수적인 모습으로 그려진다. 후반에 텟페이의 아버지를 둘러싼 갈등이 심화되지만 이는 흐지부지 마무리되고 만다는 점이 아쉽기도 했지만, 텟페이의 아버지가 누구냐에 관계없이 끝까지 따뜻한 시선으로 볼 수 있었던 드라마기에 미련은 남지 않았다. 텟페이는 텟페이일 뿐이니까. 



  잔잔한 가운데 중간 중간 유머가 녹아있어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품은 채 볼 수 있었던 드라마. 니노의 연기뿐만 아니라 다른 배우들도 안정된 연기를 보여주고 있어서 내용도 화면도 편안하게 볼 수 있었다. 다 보고 나니 분위기 때문인지 쌀쌀한 겨울에 제법 잘 어울리는 드라마가 아니었나 싶었다.



덧) 보통은 엔딩은 꺼버리는데, 이 드라마에서는 엔딩도 하나의 볼거리. 흑백사진 같은 장면들이 드라마의 분위기와 잘 어울린 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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