위험한 독서
김경욱 지음 / 문학동네 / 2008년 9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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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것은 당신이 내게서 빌려간 마지막 책이었다. 괜찮다면 마지막이라는 말은 취소하기로 하자. 마지막이라는 말은 자신을 위무하기에 급급한 나약한 영혼들이나 쓰라지. 그러니 마지막이라는 말은 이번이 마지막. -11쪽

독서치료사. 나는 책으로 마음의 병을 어루만지고 치유하는 사람이다. 의사가 환자를 진단하고 처방하듯 나는 피상담자의 심리상태를 체크한 뒤 도움이 될 만한 책을 추천한다. 모든 약효의 팔십 퍼센트는 플라시보 효과다. 플라시보 효과로 치자면 책만한 물건도 없을 것이다. 부작용도 거의 없다. 중독? 환영할 만한 일이다.
세상에는 두 부류의 인간이 있다. 책은 안 읽는 인간과 책을 못 읽는 인간. 내 고객은 주로 후자 쪽이다. 책을 읽고는 싶지만 그럴 마음의 여유가 없다고 생각하는 사람, 어떤 책을 읽어야 할지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람을 나는 상대한다. 그들에게는 이 세상에 책이 너무 많다는 것이 문제라면 문제다. 작심하고 서점이나 도서관에 갔다가도 서가를 빼곡히 메우고 있는 책에 압도당해 발길을 돌리는 사람들, 남들이 다투어 읽는다는 책을 따라 읽어도 마음의 허기를 채우지 못하는 사람들 모두 나에게 오라. 와서 마음의 평화를 구하고 갱생을 도모하라. -12쪽

한번 지나가면 영원히 돌아오지 않는 것들이 있다. 우리가 '처음'이라 이름붙이는 모든 것이 그러하다. 따라서 모든 처음은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마지막'이다. -19쪽

현명한 독자가 되고 싶다면 독서를 통해 교훈 따위를 찾아낼 생각은 일찌감치 접어라. 독자로서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계몽이 아니라 공감이니. -21쪽

쉽게 잊히지 않는 책들은 대개 앞부분을 읽어내기가 만만치 않다. 이런 책들은 도입부의 고비만 넘기면 끝까지 읽히게 마련이지만 고비를 넘긴다는 게 녹록하지만은 않다. 생소한 문체 때문에,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튀어나오는 새로운 인물 때문에, 이런저런 대상에 대한 집요한 묘사 때문에 책장을 덮었을 수도 있겠지. 엇비슷한 이름을 가진 인물들의 복잡한 가계도를 그리다가 화가 난 나머지, 배경이 되는 고장의 지리나 풍속에 대한 장황한 묘사에 질린 나머지 혹시 영화화되었는지 수소문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영화라면 제아무리 많은 인물이 등장하더라도 문제없을 테니까. 그러나 출연료조차 요구하지 않는 책 속의 인물들은 행동보다는 말을 앞세우고 말보다는 생각을 앞세우게 마련이어서 시종 집중하지 않을 수 없다. -24~5쪽

오늘날 독서에서 작가의 영향력은 눈에 띄게 감소한 반면 독자의 영향력은 날로 강력해지고 있다. 책의 의미는 작가의 창조적 재능이 아니라 독자의 취향에 따라 결정된다. 어떤 사람들은 말한다. 책에는 독자가 메워야 할 수많은 빈칸이 존재한다고. 독자가 그것을 채우기 전에는 모든 책이 본질적으로 미완성 원고에 불과하다고. 심지어 잘나가는 텔레비전 드라마는 시청자들이 결말을 좌우하기도 한다. 당신의 취향은 불치병으로 시름시름 죽어가는 여자주인공을 벌떡 일어나게 할 수도 있고 운명의 장난으로 적이 된 연인을 다시 맺어줄 수도 있다. -32~3쪽

반복은 창조의 산파이면서 가장 치명적인 독지요. 태양 아래 새로운 것이 없다면 태양 너머를 보세요. 이 우주에서 오직 당신만이 쓸 수 있는 이야기가 있을 거예요. 아니예요. 멀리 갈 것 없이 당신 자신에 대해 써보는 건 어때요? 이 우주에 당신이라는 존재는 오직 하나뿐이니까요. -8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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