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다의 기별
김훈 지음 / 생각의나무 / 2008년 11월
절판


모든, 닿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품을 수 없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만져지지 않는 것들과 불러지지 않는 것들을 사랑이라고 부른다. 모든, 건널 수 없는 것들과 모든, 다가오지 않는 것들을 기어이 사랑이라고 부른다. -13쪽

행복에 대한 추억은 별것 없다. 다만 나날들이 무사하기를 빌었다. 무사한 날들이 쌓여서 행복이 되든지 불행이 되든지, 그저 하루하루가 별 탈 없기를 바랐다. 순하게 세월이 흘러서 또 그렇게 순하게 세월이 끝나기를 바랐다.
죽을 생각 하면 아직은 두렵다. 죽으면 우리들의 사랑이나 열정도 모두 소멸하는 것일까. 아마 그럴 것이다.
삶은 살아 있는 동안만의 삶일 뿐이다. 죽어서 소멸하는 사랑과 열정이 어째서 살아 있는 동안의 삶을 들볶아 대는 것인지 알 수 없다. 그 사랑과 열정으로 더불어 하루하루가 무사할 수 있다는 것은 복받은 일이다. -31~2쪽

그 아이는 아마 월급쟁이로서 평생 살아가게 될 것이었다. 진부하게, 꾸역꾸역 이어지는 이 삶의 일상성은 얼마나 경건한 것인가. 그 진부한 일상성 속에 자지러지는 행복이나 기쁨이 없다 하더라도, 이 거듭되는 순환과 반복은 얼마나 진지한 것인가. 나는 이 무사한 하루하루의 순환이 죽는 날까지 계속되기를 바랐고, 그것을 내 모든 행복으로 삼기로 했다. -33쪽

인간은 보편적 죽음 속에서, 그 보편성과는 사소한 관련도 없이 혼자서 죽는 것이다. 모든 죽음은 끝끝내 개별적이다. 다들 죽지만 다들 혼자서 저 자신의 죽음을 죽어야 하는 것이다. 죽음은 언어화되지 않고 공유되지 않는다. -38쪽

휘몰이 장단으로 글을 쓸 때, 내 사유는 급박하게 솟구치는 언어 위에 서려서, 연결되거나 또는 부러진다. 사유가 부러지고 다시 이어지는 대목마다 문장이 하나씩 들어선다. 이런 문장들은 대체로 짧고 다급하다. 문장은 조바심치면서, 앞선 문장을 들이박고 뒤따르는 문장을 끌어당긴다. 휘몰이로 몰고 나가는 문장은 거칠다. 나는 이런 문장을 한없이 쓰지는 못한다. 힘이 빠지면, 내 문장은 중모리쯤으로 내려앉는다. 중모리 문장은 편안하다. 사유는 문장 속에 편안하게 실린다. 휘몰이 문장을 쓸 때는 사유가 문장을 몰고 가지만, 중모리 문장을 쓸 때는 문장이 사유를 이끌고 나가는 것 같다. 그래서 중모리 문장을 쓸 때 내 몸은 아늑하다. 그 아늑함이 한가하고 또 부질없이 느껴질 때, 나는 다시 휘몰이 쪽을 넘보는데 휘몰이 문장을 불러오려면, 사유의 질감을 바꿔야 한다. 이 전환은 쉽지 않다.
한 개의 문장을 하나의 우주로 만들어 보고 싶은 충동에 시달릴 때, 나는 진양조로 나아간다. -58쪽

나는 고향이라는 어휘가 물고 늘어지는 정한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 진화할 수 없는 비논리성이 그 정한의 바탕을 이루는 듯싶다. 나는 고향도 없고 타향도 없는 세상이 좋다. 고향이라든지 타향이라든지 하는 그런 어휘가 아예 없는 세상에서 나는 살고 싶다. -95쪽

설 연휴가 끝나고, 사람들은 다시 서울로 돌아와서 도심은 교통체증에 막혀 헐떡거리고 있다. 사람들이 명절이면 기어이 돌아가는 그 고향이 아직도 그들의 고향일 것인가. 당신들의 고향은 아늑하고 포근한 어머니의 품인가. 정말로 그러한가. 불타버린 남대문의 잿대미를 바라보면서 나는 사람들이 고향으로 가는 것이 아니라. 고향의 영원한 허상을 향해 기를 쓰고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싶었다. 사람들아, 설에 고향에 다녀온 사람들아, 불타버린 내 고향의 남대문을 보아라. 그리고 내 고향 서울을 다시는 타향이라고 말하지 마라. 타향 위에 고향을 건설하지 못하는 한 당신들은 영원히 고아이며 실향민인 것이다. 내 고향 서울에 이제 남대문은 없다. -103~4쪽

우리는 인간이라는 이름에 값할 수가 없는 것이죠. 우리는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어요. 거기에 승복할 수가 없음에도 불구하고 또다시 인간이기 때문에 거기에 끝없이 또 짓밟힐 수밖에 없습니다. 짓밟혀가면서 또 끝없이 저항하는 것이죠. 이런 모습들을 소설로 감당해내기에는 저의 역량은 부족합니다. 다만 그것을 들여다보고 있을 뿐입니다. 또 그것을 통해서, 그것과 더불어 인간의 아름다움을 증명한다는 것..., 얼마나 어려운 일이겠습니까? -140쪽

이 세상에 언어가 존재하는 목적은 오직 하나입니다. 언어는 소통을 위해서만 존재합니다. 시나 소설들도 다 소통을 꿈꾸면서 존재하는 예술입니다. 소통이 목적이 아니라면 언어는 이 세상에 존재할 필요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우리가 의견과 사실을 구별하지 않고 말을 해버리면, 이런 언어는 인간의 소통에 기여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인간의 인간 사이의 단절을 심화시킵니다.
요즘 우리 사회의 가장 큰 언어적 비극은 듣기(hearing)가 안 된다는 것이죠. 우리는 채팅만 하는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듣기가 안 되니까, 청각장애인들이 다 모여 있는 거죠. 인간의 언어에는 네 가지가 있는데, 말하기, 듣기, 읽기, 쓰기입니다. 말하기는 쓰기와 같은 것입니다. 그것은 내가 나를 드러내 보이는 행위죠. 그리고 듣기는 읽기입니다. 이것은 내가 세상을 받아들이는 행위입니다. 그러니까 인간의 언어는 말하기와 듣기 두 가지가 있는 것입니다. -148쪽

지금은 채팅만이 있고 듣기가 전혀 안 되는 시대에 살고 있는 것이죠. 혼자서 담에 대고 떠들어대는 것과 마찬가지로 비극적인 언어현상이 벌어지고 있습니다. 또 하나 비극적 것은 의견과 사실을 뒤죽박죽해서 말한다는 것이죠.
신념의 언어보다 더 중요한 것은 자기 주변의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태도입니다. 젊은이들은 자기 주변을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힘이 너무 부족해요. 우리 젊은이들은 자기 주변과 세계를 정서적으로 인식하는 성향이 강합니다. 세계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던 아이들이 자라면 그 아이는 대개 그 세계를 이념적으로 이해하는 그런 인간이 되어버리더군요.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언어의 훈련과 밀접한 관련이 있습니다.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한다는 것은 어떤 현상이나 사태를 보고 이것은 무엇이냐는 의문을 제기하는 태도일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는 질문을 제기하고 거기에 대답을 모색하는 것입니다. 이것은 무엇이냐, 이것은 왜 이런가, 이것은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 것인가, 또 이것이 앞으로 변화함에 따라서 이것과 관련된 여타의 수많은 조건들은 또 어떻게 변하는 것이냐 같은 의문을 제기하고 대답을~-148~9쪽

모색하는 노력이 세상을 과학적으로 들여다보는 태도이겠지요. 소설을 쓰는 사람도 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들여다보지 않으면 그걸 만들어낼 수가 없는 것이죠. 그런데 세계를 정서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혹은 이념적으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은 그런 의문을 제기하기보다는 이런 의문을 제기합니다. 이 사태는 내 마음에 드는가, 내 마음에 들지 않는가. 이 사태는 내가 보기에 아름다운가, 추한가. 사람을 볼 때는 저자는 내 편인가, 아닌가. 저자는 내 적의 편인가, 아닌가. 저자는 내 편인 것 같지는 않은데, 저자는 내 적의 적이기 때문에 저자는 아마도 나의 편일 수도 있을 것이다 같은 난폭한 망상에 집착하는 것입니다. 그것이 세계에 대해서 질문을 제기하는 방식의 차이인 것입니다. 나는 우리 젊은이들이 세계를 과학적으로 인식하는 사람이 되기를 바랍니다. 세계에 대한 과학적 인식이라는 것은 정서를 배반하는 것은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서로 배척된 것이 아니지요. -149~15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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