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교(12세기 일본 시인)를 읽는 것도, 사가구치 안고(20세기 초 일본 소설가)를 안 것도 봄은 아니었다. 그들이 지닌 벚꽃의 이미지에 압도당한 나는 벚꽃이 피기를 학수고대했다. 그러나 막상 피고 보니 그저 성가실 뿐이었다. 로버트 B 파커를 읽고 맥주가 마구 당겨서 마시고 봤더니 자신은 맥주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는 사태와 비슷할지도 모른다. 처음에 마음을 사로잡은 이미지가 너무 근사한 나머지 실물에 만족하지 못하는 것이다. 하긴 나는 벚꽃만 그런 것이 아니었다. 소설 줄거리가 꽤 그럴싸해서 본편을 읽어보니 기대에 못 미친다든지, 잘 만든 예고편이 끌려 영화를 보고 실망하는 일이 한두 번이 아니다. -18~9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