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서 결혼 안 할 거야?" 질문을 반복한다. (중략) "트럼프를 한 장씩 나눠 준다고 쳐." "뜬금없이 무슨 소리야?" "예를 들자면 말이야. 예를 들어, 스페이드 10 같은 게 손에 들어오면 스톱 할지 교환할지 고민되잖아. 10이란 숫자가 미묘하니까. 더 좋은 카드가 들어오려나 싶기도 하고 말이야. 에이스나 4같으면 판단하기 쉽겠지만." "남자 친구가 스페이드 10이구나?" 히구치는 자리에 없는 그 청년이 얼마나 원통할까, 생각했다. "아니면 그림카드일지도 모르겠네." "절대 아니야." 히라노는 강하게 부정했다. "뭐, 외모만으로는 11 비슷하긴 해. 잭에 나오는 남자 같은."하며 웃는다. -17쪽
"아직 젊은 사람이라 지나치게 이상론을 펼친다"라는 핀잔을 듣자, "저는 이상을 실현하기 위해 정치가가 됐습니다"라고 조용히 말한 사람이었다. "참, 남편은 그러던데." 히구치가 말했다. "저런 미인한테 장가가서 행복하겠다고?" "아니. 그게 아니라." 히구치는 쓴웃음을 지었다. "나라를 위해서라면 자기 인생은 어찌 되든 상관없다고 진심으로 생각하는 정치가는 얼마 없다고." "그렇겠지. 정치가가 죽게 되는 건, 병에 걸리거나 비리가 들통 나 자살하는 경우뿐이니까."-21쪽
"이름이란 게 참 중요해. 이름을 붙이면 이미지가 생기고, 그 이미지에 따라 생각이 좌우되니까." (중략) "그래서 말인데 공안이니 뭐니 하는 것은 이미지가 많이 따라다니잖아. 치안유지라는 말도 그렇고 안전보장도 그렇고, 뭔가 미심쩍다는 이미지가 있단 말이지. 애당초 국가라는 단어가 무서운 느낌이니까." (중략) "그러니까 그런 곳에는 무언가 추상적인, 이래도 좋고 저래도 좋은 이름을 붙여야 돼. 이를테면 종합정보과 같은. 무슨 일을 하는지는 모르지만 '정보, 중요한 거지'하고 일반인들은 생각하잖아. 잘 몰라도 나쁘지 않은 부서라는 이미지도 생기고, 공안과보다야 훨씬 낫지."-31~2쪽
충고하는데, 정치가 같은 훌륭하신 분들은 말이야, 중요한 일은 일반인들한테 설명 한마디 안 하고 물밑에서 착착 진행시켜. 그러니까 조심하는 게 좋아-33쪽
고정관념을 갖고 사물을 바라보면 버드나무도 유령으로, 자연현상도 적의 음모로 보이게 마련이지만, 이처럼 가네다 총리 살해와 관련된 자들이 사건이 지난 지 얼마 되지 않아 줄줄이 사망했다는 사실은 아무래도 흥미를 끈다. -81쪽
"평화롭네. 사건이 난 걸 모르나." "그럴지도 몰라. 오늘은 쉬는 날이라 만화방에서 빈둥대는 모양이야. 그런데 참 이상하지. 아무리 큰 사건이 터져도, 회사에 가고, 일도 하고 말이야. 전기뱀장어 구경도 가고. 전쟁이 터졌다고 해도 결국 그날 미팅은 그대로 추진될 것 같고. 개인 생활과 세계란 게 완전히 별개가 됐어. 사실은 이어져 있는데." "그렇지."히구치는 동의한다. 세계적인 큰 소동이 일어나도 내가 신경 쓰는 것은 딸의 건강 상태와 남편의 출장 일정이며, 저년 메뉴와 인터넷에서 찾은 화장품 가격이겠지, 하고 생각한다. -153~4쪽
"불꽃놀이는 다양한 장소에서 다양한 사람이 보는 거잖아. 내가 보고 있는 지금, 어쩌면 다른 곳에서 옛 친구가 같은 것을 보고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 유쾌하지 않아? 아마 말이지, 그런 때는 상대도 같은 생각을 하지 않을까, 난 그렇게 생각해." "같은 생각?" 아오야기는 무심코 반문했다. "추억이란 건 대부분 비슷한 계기로 부활하는 거야. 내가 떠올리고 있으면 상대도 떠올리고 있지."-210쪽
"우리가 짐을 운반하지 않으면 이 나라는 불능 상태에 빠진다고. 인터넷이니 뭐니 해도 실제 문건은 우리가 운반을 하니까."택배기사 동료 중 하나가 예전에 했던 말이 떠올랐다. "인터넷은 정보는 운반해도 물건은 운반 못하지. 그러니까 택배기사를 좀 더 대우해줘야 한다고 생각하지 않아?"그 동료가 입바른 소리를 하자 자리에 있던 다른 동료들도 "두말하면 잔소리지"하며 분위기를 끌어올렸다. -233쪽
"정보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거지. 자네는 범인이지만 증오해야 할 역겨운 인간이 아니야. 용서받을 수는 없지만 동정 못 할 것도 없지. 그런 범인상으로 만들어줄 수 있어." "정보를 조작하겠다고?" "이미지." 사사키는 짧게 말했다. "이미지란 게 그런 거 아닌가? 별다른 근거도 없이 사람은 이미지를 갖게 되지. 세상은 이미지로 움직여. 맛은 똑같은데 어느 날 갑자기 레스토랑이 번창하는 것은 이미지가 좋아졌기 때문이야. 서로 모시려고 아우성치던 배우의 일감이 떨어지는 건 이미지가 나빠졌기 때문이고. 총리를 암살한 남자인데도 큰 미움을 받지 않는 것은 공감할 수 있는 이미지가 있기 때문이지."-259쪽
애인과 친구는 어떻게 다른가 하면 말이야. 예전에 히라노가 주장한 일이 있었다. "애인은 있지, 헤어지면 기본적으로는 친구 사이로 돌아갈 수 없어"하고 그녀는 잘라 말했다. "돌아가는 사람들도 있지 않나?" "절대 무리야. 뭐, 물론 예외는 있겠지만 기본적으로는 헤어진 옛 남자 친구의 인생은 자신의 인생과 무관해지지. 어디서 뭘 하든 상관 없어. 안 그러면, 그 순간 함께 있는 애인이나 배우자한테 실례잖아." 배우자라는 딱딱한 표현이 재미있어 기억에 또렷이 남아 있다. "그런데 참 신기하지. 사귈 때는 허구한 날 연락하던 사이인데, 헤어지고 몇 년 지나면 전혀 관계도 없이, 영원히 접점도 없이 살아가니까. 신기하지." 히라노는 그런 말도 했다. -301~2쪽
"편집됐어요. 그런 텔레비전에 안 나왔더라고요."히구치도 웃음밖에 안 나왔다. 다수 의견이나 여론, 시청자의 흥미나 취향에 맞지 않는 정보는 내보내지 않는다. 아니 내보낼 수 없다는 것이 매스컴의 속성이다. 그래서 매스컴은 안 된다고 말할 생각이 없다. 하지만 매스컴이란, 그리고 보도란 그런 것이다. 거짓말은 하지 않지만 내보내는 정보의 취사선택은 한다. -346쪽
우리 같은 대중이란 잘난 놈들이 정한 대로 끌려갈 뿐이야. 우리가 코 앞에 닥친 일이나 연애에만 매달린 사이 멋대로 일을 진행하고, 그러다가는 문제가 되는 짐짝만 덜컥 떠맡긴다니까. 그래가지고, 잘난 놈들은 저런 감시카메라 너머에서 놀라 쩔쩔매는 우리를 비웃고 있지. -379쪽
생각해보면 우리는 말이에요, 멍하게 있는 동안에 법률은 만들어지고, 세금이나 의료 제도는 바뀌고, 그러다 또 어디서 전쟁이 나도 그런 흐름에 반항할 수 없도록 되어 있잖아요. 좀 그런 구조라고요. 나 같은 놈이 멍하게 있는 사이에 자기들 마음대로 다 밀어붙이죠. 전에 책에서 읽었는데, 국가란 국민의 생활을 지키기 위한 기관이 아니래요. 듣고 보니 그렇더라고요. -40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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