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플랜 사차원 유럽 여행 - 읽고만 있어도 좋은
정숙영 지음 / 부키 / 2006년 5월
절판


두려운 건 있었다. 혼자라는 것, 그것이 무엇보다 두려웠다. 여행에 동참할 지인을 찾을 시간도 없었고, 어디서 동행을 찾아야 할지도 몰랐기에, 무식한 추진력을 미덕 삼아 혼자 떠나는 여행을 감행했다. 하지만 비행기 좌석에 앉는 순간, 아니 인천 공항 행 버스에 오른 순간부터 혼자라는 사실은 뼛속 깊이 스며들었다. 화장실 가고 싶을 때 잠시 짐 봐줄 사람이 없다는 사소한 것부터, 독일에서 언니를 만날 때까지는 사방 몇 십 킬로미터 이내에 생면부지의 사람들만 존재할 거라는 광역의 현실까지. 아무리 깡 좋고 개념 없는 나라고 해도 이 사실은 마냥 두렵기만 했다.
에라, 모르겠다. 차라리 잘된 일이잖아. 원하는 게 없으니 길거리에서 돌 하나 주워도 얻은 것이요, 길가에 있는 이름 모를 무덤에 적힌 비문만 읽어도 배우는 것일테니. 깨끗한 백지가 되어 여행 동안 백지를 채워 나가 보는 거다. -21쪽

어렴풋이 무언가가 머릿속에서 떠올랐다. 나의 여행이 어떻게 될 것인지, 내가 어떤 여행을 하게 될 것인지, 앞으로 무엇을 어떻게 해 나가야 할 것인지.
그래, 즐기는 거구나. 유명한 것을 보아야 여행이 아니리라. 딱히 무엇을 해내야 여행이 아니리라. 목적과 동기에 대한 강박은 개나 물어 가라. 길에 닿는 모든 것이 나의 여행이며 그것들과 스칠 때 그 순간의 감상, 시시각각 오감으로 다가오는 모든 것, 그리고 그것을 즐기는 것. 그것이 나의 여행이리라.
그래, 이렇게 하자. 과정이야 눈물겨운 삽질의 연발이겠지만, 그 과정 끝에 이런 것이 기다린다면 나는 기꺼이 삽질 대마왕이 되어 주리라. 내 발걸음이 원하는 곳을 돌고, 내 눈에 드는 것을 보며 내 마음으로 이해하고 느껴 주리라. -33쪽

공강믜 즐거움. 함께 길을 가는 즐거움. 나름대로 혼자 여행을 즐기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그가 나타나 그런 것을 알려 주었다. 이런 종류의 느낌. 이렇게 죽이 맞는다는 것은 함께 여행을 시작했다고 해서 느낄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삶에서 스쳐 가는 모든 사람과 친구가 될 수 있는 것은 아니듯. -66쪽

쉰다는 것, 씻는다는 것, 빨래할 수 있다는 것. 이런 것들을 '대단치 않게' 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큰 축복인지. 배낭여행은 내게 이렇게 사소한 것까지 다시 생각하게 만들고 있다. 피렌체는 르네상스와 메디치를 보여 주는 대신, 범사에 감사함이라는 소박한 진리를 가르쳐 주었다. 길바닥에 뿌린 눈물이 헛것은 아니었던 거다. -75쪽

'죽기 전'이라는 말이 초속 120킬로미터로 날아와 내 가슴속에 묵직하게 박혔다. 맞다. 어차피 내 인생은 한 번뿐. 어쩌면 두 번 다시 못 올지도 모르는 유럽. 내가 언제 죽을지 아무도 알 수 없다. 앞날을 알 수 없다면 '죽기 전'에 해야 하는 것은 어쩌면 지금 당장 해야 할 일일지도 모른다. -105쪽

여행이란 게 말이지, 몇 개 나라를 갔고 무슨 도시를 갔는지, 유명한 박물관을 몇 개 봤는지가 중요한 게 아니야. 정말 좋아하는 것을 발견하는 것. 이것이 진짜 여행이지. 마음에 드는 그림 있으면 오랫동안 쳐다도 보고, 좋은 사람 있으면 같이도 다니고, 책이나 남의 평판이 아닌 네 마음과 감성, 그리고 느낌에 기대는 여행, 그게 좋은 거야. -15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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