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막을 건너는 여섯가지 방법
스티브 도나휴 지음, 고상숙 옮김 / 김영사 / 2005년 1월
구판절판


인생이란, 특히 변화의 시기에 있어서 인생이란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것과 같다. 끝은 보이질 않고, 길을 잃기도 하며, 오도가도 못하는 신세가 되었다가 신기루를 좇기도 한다. 사하라 사막을 건너는 동안에는 언제 건너편에 다다를지 알 수가 없다. 우리의 인생도 많은 부분이 그 모습과 닮았다. 목표를 볼 수가 없고, 목적지에 다다랐는지 여부도 알 길이 없다. 그리고 도대체 인생의 목적이란 것이 무엇인가?-16쪽

인생이 불확실해 보이고 앞을 내다볼 수 없을 때, 계획과 경험이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을 때, 우리는 바로 사막에 있는 것이다. 이것이 바로 사막의 가장 힘든 점이고 그래서 사람들이 산을 더 선호하는 것인지도 모른다. 산은 사막보다 덜 애매하니까. 마라톤을 처음 뛰는 것은 산세가 험한 산을 오르는 것과 같다. 완주를 할 수 있으리라는 보장은 없지만, 어떻게 훈련을 해야 하는지 그리고 어떻게 달려야 하는지를 알려 주는 상세한 책자가 있다. 마라톤에서 문제가 되는 것은 불확실성이라고 하는 희미한 적이 아니라 체력과 의지이다. 나도 모르게 살금살금 다가오는 적보다는 눈에 보이는 적이 낫다. -23~4쪽

우리가 인생이라는 사막을 건널 때 혹은 변화의 사막을 건널 때, 나침반은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역할을 한다.
첫째, 길을 잃었을 때 방향을 찾아 준다.
둘째, 우리를 더 깊은 사막으로 이끌어 준다.
셋째, 우리가 목적지보다 여정 자체에 중점ㅇ르 둘 수 있게 해준다. -38쪽

목표를 갖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다. 문제는 산꼭대기 이외의 다른 것이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는 것이다. 심각한 위기 상황이면 빚을 청산하는 것이 정말 중요할 것이다. 그러나 최종 결과를 생각하지 않으면 새로운 무언가가 등장한다. 그러나 여기에서 조심하지 않으면 그것조차 또 다른 목표 또는 또 다른 계획이 되고 만다. 따라서 우리는 바로 눈앞에 있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중요하지 않은 지금 현재에 모든 주의를 집중하여야 한다. 이것은 대부분의 사람들이 살아가는 방법에 있어서 엄청난 변화를 의미하며, 우리를 인도해줄 의미 있는 나침반 바늘이 되어 줄 수 있다.
우리는 변화의 사막에 있지 않을 때에도, 나침반 바늘을 찾고 있지 않을 때에도 눈높이 낮추기를 실행할 수 있다. 매일 지금 이 순간에 완벽하게 충실히 산다면 어떨까? -49쪽

하루나 일주일쯤 나침반을 따라가보라. 그리고 인생이라고 하는 거대한 사막 안에 있을지라도 자신이 걷고 있는 사막의 이름을 불러보고, 존재 방법, 살아가는 방법의 방향을 선택하라. 그리고 한동안 그 길을 따라 걸으면서 "내가 점점 나의 사막 깊숙이 들어가고 있는 것인가?"라는 질문을 계속 던져라. 궁극적으로 사막을 건널 수 있는 방법은 그것밖에 없다. 사막 안으로 더욱 깊숙이 들어가는 것 외에는 다른 수가 없는 것이다. 나침반은 여러분이 이러한 여행을 충실하게 할 수 있도록 도와줄 것이며, 여러분에게 의미가 있는 그런 방향을 꾸준히 제시해줄 것이다.
현재 진행형이라는 동사 시제가 있다. 우리의 나침반을 그렇게 생각하면 된다. 인생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여행을 하는 동안 나침반은 우리가 현재, 이 순간을 잃지 않도록 도와 준다. 방향 감각만 올바르게 잡혀 있으면 길을 잃었을 때도, 지도가 쓸모없는 그런 곳에서도 우리는 계속 앞으로 나아갈 수 있다. -56~7쪽

지금 건너고 있는 사막을 한번 생각해 보자. 어떤 종류의 오아시스가 필요한 걸까? 잠이 부족한 것은 아닐까? 매주 마사지를 받아야 하는 것은 아닐까? 나침반 바늘을 생각해 봐야 하는 것은 아닐까? 아이들이나 배우자와 또는 오래된 친구와 의미 있는 시간을 갖고 싶은 건 아닐까?
그러고 나서는 오아시스를 침해하는 야만인들의 목록을 작성한다. 친구나 친척, 동료, 아이들, 직장 상사, 고객, 의무, 프로젝트, 해야 할 일, 완벽주의적인 성격 등..
그리고 마지막으로 자기만의 오아시스를 보호할 벽을 세운다. 사막과 오아시스를 구분 짓는 분명한 경계선을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각오를 해야 한다. 오아시스의 필요성을 믿지 않는 비신도들이 여러분을 시험에 들게 할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오아시스를 믿지 않는 이교도들이 판을 치는 세상에 살고 있다. 심지어 우리 자신도 일부는 이교도이다. 스스로가 자기 자신을 해치는 최악의 야만인이 될 수도 있다. '아니오'라고 하지 못하는 것은 비열한 짓이다. 오아시스에 걸어 놓는 빗장을 풀어 주는 것과 같다. 완벽주의를 추구하는 습성에 젖어 있는 내 안에서는, 다음 사막을 건널 때까지 오아시스에서 쉬지 않-74~5쪽

고 계속 가다 보면 나중에 훨씬 더 멋진 휴식이 기다리고 있을 것이라는 속삭임이 들린다. 그렇다. 유목민 복장을 한 산악인이 가장 위험한 야만인이다. -75쪽

오아시스에 멈춰야 하는 또 다른 이유는 생각할 시간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오아시스에서는 그 적막과 고요함 덕분에 지금까지 건너온 사막을 뒤돌아볼 여유가 생긴다. 만약 이미 어떤 문제가 발생했다면 그것에 대해 생각해 보고 해결책도 강구해 볼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앞을 내다보고 지금 올바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는지 살펴볼 수도 있다. 이렇듯 오아시스에 머무는 시간은 큰 그림을 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한다. 사하라 사막의 오아시스 대부분은 고속도로 교차점이나 대상들이 다니는 길 위에 있다. 오아시스에서 생각을 해본 후 방향을 바꿀 수 있다.
우리는 대부분 위기가 닥치거나 비극적인 일이 발생했을 때 또는 중요한 생일에만 우리가 그때까지 따라온 내면의 나침반을 바라보고 인생의 방향을 다시 살펴본다. 때로는 이렇게 자연스러운 기회조차 활용하지 못할 때도 있다. -77~8쪽

정체된 상황은 바로 우리의 자신만만한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 내어야 다시 움직일 수 있음을 의미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우리의 자아에서 공기를 조금 빼면 현실 세상과 좀 더 가까워지고 좀 더 인간적이 될 수 있다-109쪽

겸허해진다는 함은 그저 자기가 완벽하지 못하다는 것 그리고 영원한 존재가 아니라는 작은 진실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약점까지 포함하여 있는 그대로의 자신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겸허함이며 이를 통해 더 높이 일어설 수 있다.-11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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