붕대 클럽
텐도 아라타 지음, 전새롬 옮김 / 문학동네 / 2007년 12월
절판


내 안에서 여러 가지 소중한 것들이 사라져 간다.
언제부터였는지 그 사실을 깨달았다. 차라리 악마 같은 놈이 나타나서 이것과 이것을 가져가겠노라고 선언하고 빼앗아간 거라면 그나마 기억에 남았을 테고, 조금은 저항도 해보았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그것을 깨달은 무렵에는 이미, 전혀 적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던 사람 혹은 눈에 보이지 않는 무언가가 소중한 것을 빼앗아가고 난 후였다. 그리고 그것은 지금도 다른 것을 빼앗아갈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분명 소중히 간직하고 있어야 할 것을 매일 조금씩 잃어가고 있다. 그리고 빼앗긴 자들은 저도 모르는 사이에 차츰 빼앗는 자가 되어 간다. -7~8쪽

그때는 분명 어렸지만, 소중한 것의 본질은 빠짐없이 존재했었고, 지금 와서 돌이켜보면 그나마 그때 지키지 않았더라면 영영 되찾을 수 없었을 것도 많았다고 말할 수 있다. -10쪽

이제 뭘 할까 궁리하다가, 문득 내가 어디에 서 있는가를 생각해보았다.
5교시가 지리시간이었던 탓도 있다. 지도를 펼쳐 어디를 어떤 자원이 있고 어떤 무역이 활발한가 하는 이야기를 듣다보니, 나같이 뭐 하나 제대로 할 줄도 모르는 사람은 점점 변해가는 이 세상에 과연 설 곳이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든 것이다.
높은 곳에 올라가 세상을 둘러보고 싶어졌다. 내가 지금 서 있는 곳을 직접 눈으로 보고, 앞으로 내가 있을 곳이 정말 존재하는지를 확인해보고 싶었다. -27쪽

단시오가 자살하고 싶다는 이유는, 실연이었다.
요즘 세상에 고작 그깟 이유로 죽으려는 거냐 싶다. 하지만 사실 이유야 뭐든 상관이 없다.
때때로 이런 생각이 든다. 우리는 뚜렷한 동기라든가 이유 같은 것을 상실한 게 아닐까...
젊은 사람이 자살하거나 살인을 저지르면 텔레비전이나 신문은 동기를 찾느라 야단법석이다. 하지만 다들 누구나 납득할 수 있는 대단한 이유를 갖고 살아가는지가 의심스럽다.
예를 들면 친구가 문자를 보냈는데 답문을 깜빡했을 때, 별거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심각하게 고민이 되면서 그대로 죽어버리고 싶단 생각이 들거나, 불경스럽지만 친구가 죽어버렸으면 좋겠다 싶을 때가 있다. 부질없는 환상 같아도 우연히 타이밍이 맞아떨어지면 얼떨결에 실행해버리지 않으리란 법도 없다. -31쪽

뭔가를 버리기에는 용기가 필요하지만 타이밍을 놓치는 데에도 용기가 필요하다. -54쪽

마음속 풍경과 바깥 경치는 연결되어 있다... 직감으로 그렇게 느꼈을 때처럼 나는, 붕대를 감으면 마음이 가벼워지는 까닭은 상처가 나았기 때문이 아니라 '나는 여기서 상처를 받았다'라고 인식하게 되고, 나 아닌 다른 사람들도 '그건 상처야'라고 인정해주는 과정을 거치게 되어 마음이 편해지는 게 아닐까, 하고 생각했다. -74쪽

이름이 생긴 거야, 시오. 우울했던 일, 납득이 안 갔던 일, 못 참을 일이라며 마음에 쌓아두었던 일들. 그 감정에 붕대를 감았더니 이름이 붙은 거야. '상처'라고 말야. 상처받으면 아프고 누구나 침울해지는 게 당연해. 하지만 그래봤자 상처일 뿐이니까, 치료하면 언젠간 분명히 낫는 거잖아. -74쪽

"장난하냐? 그 정도야 다들 경험하는 흔한 추억이잖아."
"어. 그런 말 해도 되는 거야? 다들 경험하는 거라고 상처 안 받는 게 아니잖아? 자라온 환경, 성격이 다 다른데 설사 비슷한 경험이라도 받는 상처의 크기는 당연히 다르지 않겠어?
"그거... 무슨 말인지 알 것 같은데."
단시오가 말했다.
"우리 부모님이 내가 실의에 빠졌을 때 자주 그런 말을 하거든. 그런 일은 자기들도 겪었고 다들 있는 일이니까 너무 상심하지 말라고. 격려한다고 해주는 말이긴 한데 괜히 모욕당하는 것처럼 들릴 때가 있어."
"아, 나도 이해한다. 나만의 상처를 멋대로 남의 거랑 똑같이 취급하지 말아달라, 이런 느낌이지."
-127쪽

다들 겪는 일이라고 한데 묶어버리는 건, 상대방의 마음에 신경 써주기가 귀찮거나 내키지 않는다는 정신적인 태만에서 온다고 봐. -128쪽

우리는 매일은 아니더라도 항상 어느 대목에서 어떠한 이유로 인해 상처를 받는다. 디노가 오니스가와 강의 강변에서 말했던 고통에 힘들어하는 수많은 아이들에 비하면 대부분 시시한 상처이겠지만, 역시 상처는 상처이고, 나름대로 답답해하고 잠 못 이루는 밤도 있다.
그리고 스스로 깨달은 것과 그렇지 못한 것을 포함해서 자기들이 누군가에게 상처를 입힌 경우 역시 꽤 될 것이다. -130쪽

나라는 인간은 오만하다. 상처받는 건 나밖에 없고, 상처 주고 힘들어하는 것도 나밖에 없다고, 어느새 그렇게 여기고 있었다. -131쪽

다들 어떤 형태로든 상처를 입고 산다. 그런 곳에 죄다 붕대를 감았다가는 분명 이 나라와 온 세상이 붕대투성이가 될 것이다... 문득 머릿속에, 붕대로 칭칭 감긴 지구가 떠올랐다. -149쪽

인간의 몸은 재생한다. 상처는 아물고 새살이 돋는다. 하지만 마음은 어떨까? -153~4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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