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아 아, 사람아!
다이허우잉 지음, 신영복 옮김 / 다섯수레 / 2011년 4월
구판절판


역사란 실로 만만치 않은 상대이다. 언제나 밤의 어둠을 틈타 습격을 가해 온다. -25쪽

"자네는 역사를 잊어버렸나. 저 역사는 절대로 잊어서는 안 돼. 잊어버리면 우리들은 다시 한 번 모든 것을 잃게 되는 거야!"
나는 나도 모르게 반론했다.
"잊어버리지는 않았어요. 잊어버릴 리도 없죠. 단지 역사에 대한 당신들의 태도에는 찬성할 수 없을 뿐입니다. 당신들은 불공평합니다. 요루어쉐이는 몇 년 전에는 쉬허엉종보다 훨씬 커다란 권력을 쥐고 있었고 한 짓도 훨씬 악질이었어요. 대증들은 그에 대해서 대단히 불만을 갖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어째서 그는 자기비판도 시키지 않고 당위원회 사무국 주임을 맡겼죠? 그가 고참 간부라는 단지 그 이유 때문인가요? 게다가 당신들은 당신 자신에 대해서도 스스로에게 유리한 역사만을 기억하고 있을 뿐 불리한 역사는 말살하고 왜곡하려고 하고 있습니다."-30쪽

"내가 지금까지 다른 사람의 소개를 받아들이지 않았다는 것은 너 역시 잘 알고 있잖아. 그건 자기를 상품화해서 사람들에게 고르게 하는 것이나 다름없는 일이기 때문이야."
"네가 고르는 것도 안 되는 거야?"
"안 돼. 나는 구매자가 되고 싶은 마음도 없어. 애정이라고 하는 것은 서로가 끌어당기는 것이 아니면 안 돼. 눈꼽만큼이라도 사고 파는 요소가 있어서는 안 되는 거야." -35쪽

프로이트라면 내 일기를 기꺼이 예로 들며 자기의 잠재의식에 관한 이론의 증거로 내세울 것이다. 그런 것쯤 아무래도 상관없다. 정상적인 형태가 정상적인 형태로서 표현될 수 없다면 변태적인 형태로 나타나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타고난 천성이 억압당한다면 마음 깊숙이 숨어서 '잠재의식'이 되는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게다가 '잠재의식'이 꼭 저급한 것은 아니다. '잠재의식'을 문학화하면 위대한 문학 작품이 되지 말라는 법도 없다. 유감스럽게도 나는 명사(名士)는 아니지만 만일 내가 명사였다면 이 일기 역시 '명저'가 될는지도 모르는 것이다. 중국인은 항상 명사에게만 명언을 발하게 하고, 명저란 대단한 것이 아니라는 고훈(古訓)을 지키고 있다. 낭만적인 것과 퇴폐적인 것은 대개의 경우 실질적으로 같은 것이며 다른 점이라고는 그것이 어떤 사람의 것이냐는 차이에 불과할 뿐이다. -46~7쪽

이 사건은 내 마음속의 사랑이 결코 죽지 않았다는 것을 가르쳐 주었다. 나는 얼마나 기뻤는지! 인간은 사랑할 힘만 있으면 살 희망과 용기를 가질 수 있는 것이다. -56쪽

"사람들은 모두 머리 위에 이슬 방울을 하나 얹고 있단다. 누구에게나 그 사람의 복이라는 것이 있는 법이야."
할머니는 자주 별을 가리키며 그렇게 말했다. 그것은 인간도 별과 마찬가지로 자기가 존재할 장소와 권리를 갖고 있다는 가르침이었다. 별은 자기를 받쳐 주는 것이 없어도 하늘에 있다. 인간 역시 손잡아 줄 사람이 없어도 이 세상에서 살아갈 수 있는 것이다. 하늘의 별이 빛나면 지상의 이슬까지도 빛나는 법이다. 이것이 내가 받아들인 최초의 철학이었다. -75~6쪽

"알았네. 인간성 전문가님. 하지만 그런 쪽의 문제는 언급하고 싶지 않아. 자네에게는 고전 문학에 대한 소질이 있으니까 그쪽 연구라도 하면 좋을 텐데."
"왜? 인간성과 휴머니즘의 문제는 금지 구역이기 때문에?"
그는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금지 구역인 것은 아니지. 하지만 일부러 거기까지 산보하러 가고 싶어하는 사람은 많지 않아. 꽃은 적고 가시덤불만 많은 곳이니까. 자네는 왜 소수파 쪽으로 갈 필요가 있는가. '나무가 수풀보다 빼어나면 바람이 그것을 쓰러뜨리고, 행동이 타인보다 고아하면 대중이 그를 비방하리니' 이런 말들 몰라? 역시 남보다 두드러져서는 안 된다구."
"호오, 자네는 개인주의의 꼬리를 정말로 산뜻하게 잘라 내 버렸군. 하지만 말해 두겠는데 자네처럼 소극적인 사람이 있으니까 소수자가 눈에 두드러지게 되는 법이야."-77~8쪽

우리들은 어쩌면 이렇게 비슷한가. 나도 곧잘 혼잣말을 한다. 그런 버릇이 언제 생겼는지 모르겠지만 누구나 마음속의 '자기'는 하나만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의 '자기'와ㅣ 또 하나의 '자기'가 늘상 대화하고 있는 것이다. 고독한 사람일수록 마음속의 '자기'가 많다. 그것이 그 사람과 힘을 합해서 고독을 이겨 나가는 것이다. 그렇다 하더라도 아까 그녀가 한 말은 무슨 의미인가. '젊은 사람의 행복이 부럽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 선택할 권리를 완벽하게 행사할 수 있으니까.'라니? 이것은 그녀의 혼잣말임이 분명하다. 하지만 말은 마음의 목소리이다. 그녀는 뭔가 부자유를 느끼고 있으며, 그녀의 머리 속에 터부가 있는 것만은 분명하다. 그녀는 지금 선택하고 있는 것도 분명하다. 하지만 구체적으로 어떤 것인가. 그녀는 무엇을 선택하고 있는가. 도대체 무엇이 터부인가? -125쪽

나는 평소에 여간해서는 울지 않는다. 남아는 눈물이 있어도 가볍게 흘리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도 정말로 아픔을 겪지 않았기 때문에 그럴 수 있는 것이다. 끼니가 없어 우는 사람이 있다는 말을 듣고,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된 것도 훨씬 뒤의 일이었다. 사람은 각각 자질이 다르기 때문에 받는 상처도 다른 법이다. -126쪽

쑨위에! 마르크스, 엥겔스의 저작을 잘 읽어 보라구. 되풀이해서 읽는 동안에 두 위인의 마음속에는 '인간'이라는 두 글자가 크게 씌어 있다는 것을 발견하게 될 거야. 그의 이론, 그의 실천은 모두 이 '인간'을 실현시키기 위한 것, 인간을 '인간'일 수 없도록 만들고 있는 모든 현상과 그 원인을 소멸시키기 위한 것이었어.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우리들 자칭 마르크스주의자 중에는 그 수단만을 기억하고 그 목적은 망각하거나 간과해 버리는 자도 있지. 마치 혁명의 목적이 인간의 개성을 말살하고 인간의 가정을 파괴하며 사람들을 갖가지 울타리로 서로 격리시키는 것이기나 한 것처럼 말이야. 우리들은 봉건적인 경제적 등급을 소멸시킨 반면, 많은 정치적 등급을 인위적으로 만들어 내고 말았어. -129쪽

보기 드문 날씨다. 붉은 복숭아 꽃과 유록빛 버들로 캠퍼스에는 봄이 넘치고 있다. 지금 한창 피어나고 있는 저 꽃들처럼, 흐드러지게 피어 있는 꽃 속을 걸어가는 저 남녀 학생들처럼 우리들에게도 젊은 시절이 있었다. 꽃은 피었다가 진다. 일 년에 한 번. 사람은 청춘을 맞고 그리고는 늙어 간다. 일생에 한 번. -158쪽

인간이 어깨 위에 올려놓고 있는 것은 반드시 자기의 머리라고는 할 수 없다. 그러나 모든 사람은 자기는 주체적인 사고를 하는 인간으로서 무슨 일에 있어서나 '왜?'라는 질문을 던져 왔노라고 말한다. 희극적으로 비극을 연기하고, 비극적으로 희극을 연기하고 있다. 도대체 누가 누구를 저주하고 누구를 동정해야 한다는 말인가? -169쪽

자존심이란 허영심과 구별하기 어려워. 내가 말하는 자존심이란 것은 허영심에 불과한 것인지도 몰라. 하지만 지금 그것을 버리기는 어려워. -196쪽

"희극이니 비극이니 생각할 필요가 없어. 지나간 일은 무엇이든지 내게는 이미 흐릿하기만 해. 역사니 뭐니 하는 것은 폐품처럼 끈으로 묶어서 구석에 내던져 버린다면 그것은 그만이야. 뜨개질 역시 잘못 뜨면 풀어서 처음부터 다시 뜨잖아. 뜨는 방법을 달리하면 그것으로 완전히 새로운 물건이 되고 어느 누구에게도 원래의 형태 같은 것은 보이지 않지."
그녀는 내 비유에 자기도 모르게 웃었으나 금방 웃음을 거두고 말했다. "뜨개질은 실이 한 가닥뿐이지만 인간의 삶은 수십 가닥의 실이 서로 얽히거든."-206쪽

누구나 다 변해 가지. 변하지 않고 있을 수는 없으니까. 저마다 '인간'의 소재에서부터 진정한 인간으로 변해 가는 거야. 다른 인생길이 다른 인간을 만들어 내고, 다른 인간이 또다시 다른 길을 걷기 시작하지. 어떤 길에나 인간이 있고 어떤 인간 뒤에도 길이 있어. 길에는 우여곡절이 있고 인간에게는 부침이 있어. 길은 서로 교차되고 인간은 서로 부딪히지. 그것이 인생이야. -232쪽

너는 원래 피가 통하는 인간이다. 뛰는 심장을 갖고 있는 거야. 네 머리에는 뇌수가 가득 차 있어. 그러니까 생각할 수 있는 거지. 네 자신의 감각이 갖다주는 재료를 기초로 네 사상을 형성하고 네 판단을 내릴 수가 있는 거야. 네게는 입이 있어. 그러니까 자기의 마음의 목소리를 표현하고 앵무새 같은 남의 흉내를 내지 않아도 좋은 거야. 과거에 너는 그것을 잊고 있었어. 그러나 지금은 너는 기억해 낸 거야. 아니, 발견한 거지. 너는 원래 그러한 본능을 지니고 그러한 요구를 갖고 있었다는 것을. 너는 의심과 두려움을 품고 수치심마저 느끼고 있지. 그건 조금도 이상한 것이 아니야. -242쪽

"이상을 갖고 있으면 생활이 아무리 괴로워도 정신적으로는 편안한 법이군. 그것도 일종의 행복이야." 누군가가 말했다.
"치른 대가가 크군!"쉬허엉종도 감탄하며 말했다.
"추구할 만한 가치가 있다는 확신을 가질 수만 있다면 대가 따위는 아무것도 아니지."쑨위에가 굼꾸는 것처럼 말했다. 낮게 신음하듯이. -275`쪽

역사라고 하는 것은 지극히 추상적인 말이지. 그러나 역사를 만들고 역사를 추진시키는 요인, 특히 인간은 구체적이고 복잡 다양하며 그야말로 신비로운 존재야. 더불어 시대의 무거운 짐을 질 사람을 우리가 기다려서는 왜 안된다는 거지? 한 민족의 역사, 한 시대의 역사는 수천 수만 명의역사가 보여서 만들어진 것이야. 그 모이는 과정에서 누구나가 각자의 역사를 걸어가지 않으면 안 되는 거야. 자네는 그것을 용납하지 않겠다는 것인가. 자네 혼자서 역사의 수레바퀴를 짊어질 생각인 거야? -345쪽

인생이라는 것은 과거 우리가 상상했던 것처럼 멋진 것은 아니다. 하물며 과거에 상상했던 것만큼 무서운 것도 아니다. 인생은 인생일 따름이다. 모순으로 가득 차고 끊임없이 흔들린다는 사실이 바로 인생의 매력이라고 생각된다. 그것은 인간의 영혼을 삼켜 버리기도 하지만 인간의 영혼을 드높이 단련시키기도 한다. 지금 나는 인생의 갖가지 고통에 직면해 있다. 그리고 바로 그 고통 속에서 나는 인생의 가장 귀중한 의미를 깨닫고 있는 것이다. -367쪽

운명의 신은 그 위력이 막강하다. 어떤 인물일지라도 그의 손아귀를 벗어날 수가 없다. 얼마나 많은 천재와 영웅들이 운명의 신에게 조롱당해 왔던가. 얼마나 많은 사람들을 절망에 빠지게 했으며 자기를 부정하고 인간을 부정하게 해 왔던가. 그러나 그것은 우리들에게 자각과 자존과 자신감이 결여되어 있었기 때문이 아닐까. 우리들이 자기의 모든 것을 운명의 손에 맡겨 버렸기 때문이 아닐까. 만일 우리들이 자각과 자존과 자신감을 회복한다면? 그리고 만일 맡겨 버렸던 자기의 모든 것을 되찾는다면 우리들은 운명을 지배할 수가 있는 것이다.
나는 이제 더 이상 자신의 불행을 한탄하지도, 다른 사람을 원망하지도 않는다. '과거'를 '오늘'의 자양분으로, 고통을 지혜의 원천으로 바꾸고 있다.(중략) 나는 청춘과 애정을 잃었지만 무의미하게 잃어버린 것은 아니다. 나는 열정이 불타고 난 뒤의 숯불을 얻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나를 따뜻이 데워 주고 내가 나아갈 길을 비춰 주기에 충분하다. -36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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