뿌리 깊은 나무 2
이정명 지음 / 밀리언하우스 / 2006년 7월
평점 :
구판절판



  예전에 김탁환의 백탑파 시리즈를 시큰둥하게 읽었기 때문에 소위 한국형 팩션에는 크게 관심이 없었다. 역사를 배경으로 한 다소 미스터리한 이야기일 뿐, 독특한 점이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러던 중 최근 드라마 '별순검'을 보면서 다시금 이런 류의 한국형 팩션에 관심이 가게 되어 나름대로 재미있다는 얘기를 들은 이 책을 읽게 되었다. '별순검'의 배경은 19세기라 어느 정도 반상의 차별이 무너져가는 과정에 있다면, 이 책의 배경은 15세기로 반상의 차별 뿐만 아니라 성리학적 질서가 강한 시기라 할 수 있다. 이런 시대적인 요소들과 함께 세종을 둘러싼 음모가 그려지는 이야기는 역사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모두 아우른 제법 괜찮은 팩션으로 다가왔다. 

  이 이야기의 주인공인 겸사복 강채윤은 본디 변방의 일개 군사였다. 그런 그가 우연히 김종서 장군의 눈에 들어 궁 안에 들어가 겸사복이 된다. 하지만 본디 자유로운 생활을 하던 그에게 궁 안은 답답하기 그지없고, 그런 그에게 유일하게 기댈 언덕은 반인 가리온 뿐이다. 그렇게 평온한 생활을 하던 그에게 경복궁 후원의 열상진원 우물 안에서 시체로 발견된 집현전 학사의 살인 사건이 떨어지며 보이지 않는 적과의 싸움이 시작된다. 잇달아 일어나는 집현전 학사들의 죽음. 증거라고는 현장에 남겨져있던 마방진과 학사들의 몸에 공통적으로 있는 문신 뿐. 공통점을 조사하던 중 그들이 오행의 상극에 이치에 따라 죽게 됐다는 점을 발견하지만 범인의 정체는 여전히 보이지 않는다. 누가, 왜 왕의 학사들을 죽였는가? 

  세종의 치세를 떠올리면 정조 때 실학이 유행했던 것처럼 이 시기도 실용적인 학문이 연구되었음을 알 수 있다. 한글을 비롯하여 측우기, 물시계를 비롯하여 각종 역서와 농서 등이 간행되었던 시기가 바로 세종 때다. 하지만 이런 세종의 정책을 마음에 들지 않아하는 신하들도 있었으니 이들은 경학을 세워 나라의 기강을 바로 잡기 위해 목숨을 걸고 음모를 꾸미기 시작한다.

  매 장을 시작하기에 앞서 미리 3~4줄 가량 이야기를 요약해 보여주고 있기 때문에 마치 드라마의 예고편을 보는 듯한 느낌을 받으며 읽어갈 수 있었다. 하지만 다소 낯선 개념인 오행이 소재인 살인사건이기에 가볍게 읽기에는 녹록치 않았던 것도 사실이다. 미천한 신분의 겸사복 채윤이 높으신 분들을 상대로, 보이지 않는 적을 상대로 싸우는 모습은 흥미로웠지만 그 벽은 너무나 높고 컸기에 채윤 혼자서 상대할 수 있는 것은 아니었다. 하지만 자신이 대적할 수 없는 상대임을 알고도 젊은 혈기로 덤비는 채윤의 모습은 나름대로 매력적으로 다가왔다. 아쉽게도 크게 독자의 마음을 사로잡을 정도의 매력은 없었지만. (열혈 겸사복이라는 점 빼고는 달리 캐릭터의 매력이 없어서 아쉬웠다.)

  단순히 보이지 않는 적과 대립하는 내용이 아니라 새것과 옛것의 대결, 우리의 것과 중화의 것의 대결, 격물을 중시하는 실용과 사장을 목숨처럼 떠받드는 경학의 대립이 배경에 깔리기에 긴장감을 가지고 읽어나갈 수 있는 책이었다. 역사적인 배경 지식이 있다면 더 재미있게 읽을 수도 있겠지만 굳이 역사적 지식이 많지 않아도 제법 재미있게 읽어갈 수 있는 책이 아닐까 싶다. 처음에는 표지에 훈민정음과 관련된 이야기가 나와서 그에 얽힌 살인사건이겠거니하고 읽어갔는데 이에 관한 내용은 결국 베일에 꽁꽁 쌓여있다가 2권 중반이 넘은 시점에서 드러난다. 음양오행의 이치와 건곤의 섭리, 천지인 삼재와 천원지방의 원리, 그 모든 조화를 품은 스물여덟자의 글자. 마침내 정체가 드러났을 때의 놀라움이란. 하지만 사람의 입안을 그림으로 그려 소리가 나는 위치와 방법을 하나하나 세밀히 배워 닫힌 입이 열리고 굳었던 혀가 움직이기 시작한 벙어리 궁녀 소이는 너무나 소설적으로 다가왔다. 물론, 소이를 일반 민중이라고 생각했을 때 한글을 배움으로써 그동안 내지 못한 목소리를 내게 된 상징이라 생각할 때면 어느 정도 개연성은 있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적당히 긴장감있게 흘러가다가 결말부가 약간 흐지부지하게 되는 게 아쉽긴 했지만, 전체적으로 봤을 때는 단순히 '역사가 배경인' 소설이 아니라, '역사 속에서 살아 숨쉬는 소설'을 만날 수 있었던 것 같다. 다소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우리 역사를 배경으로 한 팩션도 가능하구나'라는 점에서 높은 점수를 주고 싶었다. 작가의 최근 작인 <바람의 화원>은 어떨까 궁금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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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노아 2007-11-20 17: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뿌리깊은 나무에 비해서 바람의 화원이 훨씬 재밌었어요^^

이매지 2007-11-20 21:32   좋아요 0 | URL
바람의 화원도 기대되네요 :)
안그래도 마노아님의 리뷰도 공감하면서 읽었는데 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