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매한 가르침은 말한다. 진실하고 올바른 사랑은 상대를 소유하려 들지 않는다고. 하지만 그 말은 아름다운 거짓말에 불과한 것. 나만의 사람을 만들고자 하는 배타적 욕망이 사랑의 출발점이다. 사랑의 배타적 속성이 없다면 얼마나 심심할 것인가. 일단 세상의 온갖 소설과 영화의 상당 부분은 폐기처분되어야 한다. 애달픈 노랫말도, 절절한 가슴앓이의 추억들도 다 쓸모없는 것이 된다. 그런데도 왜 그렇게 가르치는가. 상대를 소유하러 들지 말라고. 원래 세상의 가르침이란 하기 힘든 것만 요구하는 경향이 있지만, 좀 거창하게 파악해보자면 그건 아마도 힘 있고 능력 있는 자의 '더 많은 소유'를 제한하고자 하는 자본주의 체제의 고육책으로 여겨진다. 아울러 인간의 본성으로는 아무래도 무리인 일부일처 제도를 유지시키기 위한 방편으로도. -18쪽
평생 단 한 번도 '종족을 보존하자'는 숭고한 결의를 다지며 섹스를 해본 일이 없다. 가장 사사로운 쾌락이자, 조금 의미 부여를 하자면 상대와 깊은 커뮤니케이션을 나누는 행위가 섹스다. 당근, 섹스는 게임이고 놀이고 대화다. 강간 같은 어거지 말고 가능한 상대끼리 서로 마음이 맞아 나누는 섹스라면 될수록 재미있고 유쾌한 놀이가 되어야 하지 않겠는가. 듣자 하니 가수 박진영도 이런 요지의 생각을 말했다가 찬반논쟁에 휩싸인 모양이다. 도대체 찬성하고 반대하고 자시고 할 일이 뭐 있는가 싶은데도 논란이 많은 걸 보면 섹스 갖고 비장, 숭고해지는 부류들이 많기는 많은 모양이다. 아무래도 내가 너무 단순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아닌가 싶어 불안해진다. 불안을 메우는 게 공부다. 그래, 섹스를 공부하자! 성행위 비법 따위가 아니라 이른바 성 담론이라는 것. 유식해지면 타인의 동의를 얻는 일이 훨씬 쉬워진다. -31~2쪽
하지만 홍성묵의 메시지는 이렇게 단편적인 사항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의 표현을 빌리면 '일어나는 섹스'와 '하는 섹스'로 구별되는 주체성의 문제가 핵심이다. 일어나는 섹스, 즉 욕정에 휘둘려 저지르는 일과, 사랑이 담긴 교감의 한 방편으로 서로 원해서 '하는 섹스'는 근본적인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그런 점에서 여성의 순결 운운하며 따지려 드는 마초형 남성이나, 순결을 '잃었다고' 징징 짜는 여성이나 성의식의 문맹자들이기는 마찬가지다. 스스로 원해서 상대와 '하는 섹스'는 당당하고 인격적이며 그럴 때 비로소 섹스는 당당한 즐거움이 된다. 당연한 말 같은데 우리 현실은 꽤 동떨어져 있다. 섹스는 분명 남녀가 함께 하는 일인데 그것의 향유는 남성의 전유물로 여기는 돌쇠들이 의외로 많으며, 육체를 흡사 자신의 무기이자 최후의 보루인 양 여기는 '창녀 의식'을 소유한 여성도 의외로 많다. -34~5쪽
사람들은 모두 시인이다, 라고 말할 때의 '시'란 문예지에 발표되는 시 작품이 아니라 사람들 가슴에 상상력의 불꽃을 지피는 시적인 어떤 것을 의미한다. 죽고 싶은 괴로움, 견딜 수 없는 소외감, 혹은 황사가 불어 닥치는 봄날의 어떤 허허로움 속에서 정처 모르는 가슴을 부여잡고 사람들은 시인이 된다. -59쪽
사랑, 그중에서도 남녀 간의 사랑이 끊임없는 관심과 토론의 대상이 되는 까닭은 그 영원성에도 불구하고 용기에 담기는 물처럼 무정형이어서 한없이 유동하고 변해가는 속성 때문이 아닐까 싶다. 누구도 자신 있게 이것이 사랑의 실체라고 규정할 수는 없다. 그 대신 사랑의 변모를 들여다보는 간편한 방법이 있다. 신작 소설들을 찾아 읽는 것이다. 세상의 모든 소설은 사랑을 배경에 깔고 있는 법이므로. -156~7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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