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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업
시게마츠 기요시 지음, 고향옥 옮김 / 양철북 / 2007년 10월
평점 :
품절
시게마츠 기요시의 책은 나오키상을 수상했던 <비타민 F>를 접한 적이 있는데 F로 시작되는 단어들을 이용해 이야기를 풀어가는 것이 따뜻한 힘이 느껴졌었다. 그 때문에 개인적으로 발행하는 페이퍼에도 비타민 F라는 이름을 붙였을 정도로 호감을 갖고 있었다. 그 후로도 그의 책들은 몇 권이나 출간됐지만 계속 기회가 닿지 않아 미뤄왔는데 이번에 우연히 <졸업>을 만나게 되서 반가움이 더했다. 표지는 다소 밋밋한 느낌이라 머뭇거렸지만 일단 책장을 넘겨가니 그 속에 담긴 따뜻함과 주인공들의 경계선 속에서 나의 경계선도 생각해볼 수 있었다.
'졸업'이라는 단어는 많은 것을 의미한다. 정규 교과과정을 마쳤다는 의미에서 다음 단계로 넘어가기 위한 중간 단계의 졸업을 흔히 생각하겠지만, 이 책에서의 졸업의 의미는 조금 다르다. 누구나 인생은 어떤 경험을 하기 전과 그 경험 이후로 삶이 바뀐다고 한다. 어떤 학교에 갔는지, 그리고 그 곳에서 누구를 만나게 됐는지, 어떤 회사에 들어갔는지, 누구와 결혼하는지 등 우리 인생에는 다양한 갈림길이 존재한다. 어떤 이들은 그 갈림길에서 하나의 길을 선택하고 그저 앞으로 앞으로 나아간다면, 어떤 이들은 자꾸만 뒤를 돌아보며 다른 길을 선택해야됐던 것은 아니었을까라는 생각을 떨치지 못한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에서의 졸업은 인생에 있어서 하나의 경계점(혹은 갈림길)에 얽매인 삶을 살아가는 주인공이 마침내 남겨진 것에 미련을 두지 않고 한 발짝 더 앞으로 나아가는 의미의 '졸업'인 것이다.
이 책에서 주인공들이 겪는 내 인생의 최대 사건은 가까운 이의 죽음이다. 대학 시절 친하게 지냈던 친구가 죽은 뒤 10년도 넘게 지나 자신을 찾아온 친구의 딸. 무작정 그 사람에 대해 이야기를 해달라고 조르고, 이에 친구와의 추억을 하나씩 떠올리며 그동안 마음 속에 묻어왔던 그에 대한 미안함을 털어내는 이야기('졸업')에서는 가족이 아닌 친구의 죽음이었다면 나머지 3편의 이야기는 가족의 죽음을 다루고 있다. 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어린 시절, 때와 장소를 가리지 않고 콧노래를 부르던 여동생과 그런 여동생의 면도 수용했던 엄마의 일들을 돌아보며 방 밖으로 나오지 못하는 자신의 아들과의 새로운 관계를 시작하는 이야기('행진곡')나 평생을 교사로 살았던 아버지와 아버지를 본받지 않겠다며 교사를 시작한 아들의 이야기('아버지의 마지막 수업'), 어린 시절 어머니가 병으로 떠난 주인공이 병상에서 엄마가 쓴 일기를 보며 평생 엄마를 잊지 못하고, 새어머니와 다투며 커가고, 어머니의 이야기를 상상해서 에세이로 쓰면서 마침내 새어머니와 화해하는 과정이 그려진 이야기('추신')까지 슬픔의 정도나 충격의 정도는 제각각 다르겠지만 그들 모두는 가족을 잃고 슬퍼하고, 가족의 죽음으로 삶의 진폭이 바뀐 것을 느낀다.
자식과 부모의 관계는 친밀하지만 때로는 어쩜 그럴 수 있나 싶을 정도로 차갑다. 이 책은 가족 간에 벌어지는 그런 미묘한 부분을 잘 잡아내고 있고, 그렇기 때문에 많은 부분에서 고개를 끄덕이며 읽어갔다. 특히나 마지막 이야기인 '추신'의 경우에는 마지막 장을 읽으며 조용히 눈가가 뜨거워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인생이 무르익어가는 시기인 중년을 살아가는 주인공들. 어쩌면 그들이 어느 정도 연륜이 쌓여가는 중년이었기 때문에 인생에 하나의 마침표를 찍을 수 있었던 것이 아닐까 싶었다.
식상한 이야기지만 졸업을 두고 '끝이 아니라 새로운 시작'이라고 표현하기도 한다. 이 책의 주인공들은 하나의 사건을 통해 새로운 시작을 할 수 있을 것이다. 나 또한 이제는 마침표를 찍고 새로운 이야기를 써내려가야할 시간이 아닐까하고 책을 놓으며 조용히 생각해봤다. 나와 같이 과거에 미련을 갖고 있는 사람이나 주인공들과 같은 연령대인 30, 40대가 읽으면 좋을 듯 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