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지니아 블랙 앤 화이트 시리즈 3
온다 리쿠 지음, 권영주 옮김 / 비채 / 2007년 7월
구판절판


새로운 계절은 늘 비가 데리고 온다.
아니, 아니네요. 새롭다는 말은 딱 들어맞지 않는 것 같아요.
다음 계절, 다음 계절은 늘 비가 데리고 와요. 이 도시에서는 그렇다는 생각이 들어요.
게다가 결코 극적인 변화가 아니거든요. 변덕스러운 비가 내릴 때마다 경계선을 차츰차츰 침식하듯 계절이 바뀌어가죠. 애매하게, 미련이 남는 듯, 꾸물꾸물 계절이 움직여요. -13쪽

돌이켜 생각해보면, 특별히 불쾌한 감정은 아니었어요. 난 직접적인 관계자도 아니고요. 하지만 자라면서 어떤 부조리한 일, 이해할 수 없는 일이 일어날 때마다 몸속 깊은 곳을 누가 슬그머니 휘젓는 느낌이 드는 거예요. 가라앉은 앙금 속에서 뭔가가 둥실 떠오르는 것 같았죠. 그때 느끼는 그 불편한 기분이 조금씩 조금씩 몸속에 축적됐어요. -20쪽

공포는 신빙성을 높여주는 양념, 적당히 치면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만들어줘요. -21쪽

벚나무는 참 이상해요. 다른 나무는 일년 중 어느 때나 무슨 나무인지 알 수 있잖아요? 은행나무, 동백나무, 단풍나무나 버드나무도 그렇죠. 그런데 벚나무만은 평소에는 그 존재가 잊혀져요. 벚꽃이 안 피어 있을 때는 그냥 이름 없는 나무. 하지만 꽃이 피는 계절에만은 거기 벚나무가 있었다는 사실을 모두들 기억해내요. 평소에는 잊혀져 있다, 그런 생각이 들어요. -23쪽

어떤 우연한 계기에 눈덩이가 비탈을 구르기 시작해요. 점점 속도가 붙으면서 눈 깜짝할 새에 커져서 산기슭에서 일하던 사람들을 순식간에 쓰러뜨리거든요. 물론 눈덩이의 중심에는 인위적인 조작도 있고, 억눌려 있던 감정도 있겠죠. 하지만 난 어떤 계기에 우연의 연속이 맞물리면서 인위적인 걸 능가하는 무서운 일을 일으킬 때가 있다고 생각해요. 인간의 하찮은 속셈을 비웃기라도 하듯 크나큰 재앙으로 답하는 거예요.
그 사건도 그런 거였다는 생각이 들어요. -40쪽

가끔 생각해보곤 합니다.
이해할 수 없다는 건 죄인가.
부모든, 자식이든, 형제든, 이해할 수 없는 건 이해할 수 없어요. 그게 나쁜 일인가? 이해할 수 없으면 이해할 수 없다고 인정하고 체념하는 것도 일종의 이해가 아닌가? 그런 생각을 합니다.
하지만 오늘날 세상은 이해할 수 없는 존재를 용서하지 않거든요. 모르겠다고 괴롭히고, 정체를 알 수 없다, 설득이 안 먹힌다고 공격합니다. 뭐든지 간략화, 메뉴얼화됩니다. 화를 내는 이유가 '이해할 수 없다'일 때가 많아요.
사실은 이해할 수 있는 쪽이 훨씬 적지 않나요? 이해했다고 뭐가 해결되는 것도 아니죠. 그러니까 이해할 수 없는 세계에서 살아갈 생각을 하는 ㅍ녀이 훨씬 현실적이라고 생각하는데, 잘못된 생각일까요.-204~5쪽

어른들은 애들한테 쓰는 시간에 인색하잖아요.
자기가 쓸 수 있는 시간을 100이라고 치면, 애한테 쓰는 건 10정도라고 정해놓죠. 동네 어른이라면 다른 집 애한테 쓰는 건 2나 3쯤 될까? 말을 시킬 때도 여기서 1쯤 써줄까 하고 계산하는 게 빤히 보여요. 그러니까 뭐라고 말을 시켰다가 애가 물고 늘어지는 바람에 1만 쓸 생각이었는데 3 쓰게 생겼다 싶으면 다들 허겁지겁 애를 밀쳐내는 거죠.
애들은 어른이 자기한테 시간을 아끼는 데 민감해요. 저쪽에서 아끼면 괜히 더 욕심이 나니까, 필사적으로 어른한테 시간을 빼앗으려고 들어요. 대개의 경우엔 역효과가 나서 실패하지만요. 그렇게 해서 어른에 대해 불신감을 갖게 되고 체념하게 되는 거죠.
부모나 교사나 평소에는 자기 시간에 인색하면서 무슨 일이 있을 때만은 '자, 숨기지 말고 다 이야기해봐라'라고 하죠.
자기 시간은 안 주면서 네 시간을 통째로 내놔라, 그러면 어떻겠어요? 애들이 저항하는 것도 당연한거죠. -255~6쪽

그런 건 완성하기 전에 남한테 보여주거나 이야기하면 안 됩니다. 야심은 가슴속에 묻어둬야죠. 입 밖에 내면 마법이 풀려버려요. 아무한테도 말하지 말고 자기 안에서 천천히 키워나가야 합니다. -307쪽

사람마다 문득 돌이켜보게 되는 인생의 한 시기라는 게 있는 것 같습니다. 그 사람한테 빛나는 시기라고 할까요, 잊을 수 없는 순간이라고 할까요. 꼭 좋은 때이기만 한 건 아닙니다. 울적하던 때라든지, 껍데기 안에 틀어박혀 있던 시기일지도 몰라요. 좋고 나쁜 걸 떠나서, 좌우지간 그 사람의 핵이 되는 시기라는 게 있거든요.
어렸을 때라는 사람도 있겠죠. 학교 다닐 때라는 사람도 있을테고, 성공해서 유명해졌을 때라는 사람도 있을 겁니다. 시기는 저마다 다양하지만, 가끔씩 어떤 스위치가 켜지면 저도 모르게 그 무렵으로 돌아가게 됩니다. 문득 정신이 들어보면 그 무렵 생각을 하고 있어요.
그런 시기가 없으신가요?-3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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