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 흐르고 나면 그 뒤에 남는 것은 숫자가 아니라 덩어리로 뭉쳐진 기억이다. 몇 년 전의 12월과 1월을 도대체 어떻게 구별해 낼 수 있겠는가. 12월 겨울과 1월 겨울의 차이점은 거의 없다. 12월과 1월은 나의 손바닥과 같다. 두 개의 손바닥은 분명 다르게 생겼지만 손을 맞대어보면 정확하게 들어맞는다. 왼손에는 흉터가 있고 오른 손에는 없고, 12월에는 크리스마스가 있고 1월에는 없고... 그 차이다. -12쪽
살다보면 기억의 줄기 한가운데 검은 테이프를 붙여놓은 것처럼 깜깜한 시기가 있는데 내게는 그때가 그랬다. 무너져버린 제방을 밟고 흘러가는 강물처럼 모든 것이 너무나 빨라서 시간이 흘러가고 있다는 것도 느낄 수 없었다. 인간의 삶 역시 가속도가 붙는게 아닌가, 라는 생각을 할 때가 있다. 스무 살 무렵은 더디고 더디지만 어느 정도 세월이 흐르기 시작하면 도무지 걷잡을 수 없을 정도로 빨라지는 것이다. 브레이크가 파열된 자동차처럼 언덕 아래로 사정없이 미끄러지다가 쾅, 하고 박살나버리는 것이 바로 인간의 삶이라고 생각하면 조금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한다. 속도를 줄이기 위해선 어쨌거나 조금은 가벼워야 할 필요가 있다, 고 나는 생각한다. -36~7쪽
아무리 떠올리려고 해도 떠오르지 않았던 어머니의 실체가 갑자기 생생해졌다. 어머니의 살가죽을 닮은 표면을 만지고서야 어머니를 기억할 수 있다는 것이 스스로 한심했다. 어째서 기억이라는 것은 매개체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온전하게 모든 것을 기억할 수는 없는 것일까. 나무 조각이 없었더라면 나는 어머니 손득의 감촉조차 기억하지 못했을지도 모른다. -78쪽
오차와 오류는 어디에나 있다. 지도에도 있고, 자동차에도 있고, 사전에도 있고, 전화기에도 있고, 우리에게도 있다. 없다면 그건, 뭐랄까, 인간적이지 않은 것이다. -80쪽
인간들의 믿음이란 정보를 기반으로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이미지가 믿음으로 바뀌는 것이다. 의사는 돈이 많을 것이라는 이미지, 변호사는 말을 잘할 것이라는 이미지, 소설가는 담배를 많이 피울 것이라는 이미지, 해커는 지저분할 것이라는 이미지. 인간들은 그런 이미지를 자신의 머리 속에 차곡차곡 저장해 놓고, 그것을 사실이라고 생각한다. 그 사실이 모여 정보가 된다. 나는 그런 잘못을 정정해 주고 싶은 마음이 없다. 나는 그 이미지를 이용할 뿐이다. -116쪽
의사는 언제나 확실한 대답을 하지 않는다. 의학 공부를 해보지 않아 알 수는 없지만 의과대학 1학년 첫 시간의 교재 첫 페이지에는 이런 말이 적혀있을 것 같다. '언제나 얼버무려라. 만약 계속 질문을 던지는 환자가 있다면 마취시켜라'-181쪽
자전거란 인생을 닮아있었다. 뒤로 갈 수 없는, 뭐랄까 전진할 수밖에 없는 삶의 비애랄까. 뭐 그런 게 닮지 않았나싶다. 물론 이런 얘기를 B에게 했더라면 "웃기지마. 그냥 뒤로 가지 못하는 게 좋을 뿐이야. 인생이나 뭐 그런 것과 비교하진 말라고"라며 핀잔을 주었을 것이다. 하긴, 인생이나 뭐 그런 구차한 것과 비교할 필요도 없이 한쪽 방향으로밖에 갈 수 없다는 생각을 하면 마음이 편안해지긴 한다. 페달을 뒤로 밟는다고 해서 자전거가 뒤로 가는 것은 아니다. 뒤로 갈 필요도 없고 뒤로 갈 수도 없다. 그런데 정말 그런게 인생이 아닌가? 아닐지도 모르지만, 어쨌거나 나는 페달을 밟으며 앞으로 전진했다. -201~2쪽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