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의 그림자가 울고 있다 - 융 심리학이 밝히는 내 안의 낯선 나
로버트 A. 존슨 지음, 고혜경 옮김 / 에코의서재 / 2007년 3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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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르소나는 우리가 되고 싶어하는 모습인 동시에 우리가 세상에 드러내고 싶어하는 모습이다. 페르소나는 심리적인 옷이라 말할 수 있다. 자신이 입고 있는 옷이 바로 자신이 드러내고 싶은 이미지를 대변하듯, 페르소나는 진짜 자신과 주어진 환경 사이에서 중재자 역할을 한다. 자아는 진짜 본연의 자기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생각하는 자신이자, 자기가 누구라고 인식하고 있는 자신이다. 이에 반해 그림자는 우리 자신의 일부분이지만 우리가 보려 하지 않거나 이해하는 데 실패한 부분이다. -17쪽

우리의 몸이 항상성을 유지하고, 산과 알칼리의 비율을 조절하고, 그 밖에 수많은 평형을 유지하듯이 심리도 이와 같은 균형을 유지해야 한다. 그러나 우리는 육체적 균형은 당연하게 받아들이면서 심리적 균형에 대해서는 인식조차 하지 않은 채 살아간다. -26쪽

궁극적으로 빛과 어두움은 균형을 이룰 수 있고 또 지속도 가능하다. 자연에는 빛과 어두움, 창조와 파괴, 위와 아래, 남성과 여성 등의 대극이 공존한다. 심리의 구조를 이야기할 때도 기본적으로 같은 법칙이 적용되고 있다는 사실은 놀랄 일이 아니다. -30쪽

인간 역사의 어두운 장은 타인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전가할 때 펼쳐진다. 남자가 여자에게, 백인이 흑인에게, 가톨릭이 개신교에게, 자본주의가 공산주의에게, 무슬림이 힌두에게 그림자를 투사한다. 이웃 간에도 이런 일은 일어난다. 한 가족을 희생양으로 택하여 마을 전체의 그림자를 그 가족에게 짊어지도록 하는 것이다. 사실 이웃뿐만 아니라 대부분의 집단이 무의식적으로 구성원 중 한 사람을 왕따로 만들어 그로 하여금 공동체의 어두움을 혼자 감내하게 만든다. 이것은 문화의 태동기부터 나타난 현상이다. -48쪽

자신의 그림자를 타인에게 투사하면 두 가지 면에서 잘못될 수 있다. 첫째, 자기의 어두움을 타인에게 전가하여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친다. 그렇지 않으면 자기 안의 밝은 면을 전가하여 자기 대신 상대방이 영웅이 되어주기를 원한다. 이 경우도 상대에게 대단히 무거운 짐을 지우게 된다. 둘째, 자기 그림자를 내던져버림으로써 스스로 황폐해진다. 이렇게 되면 우리는 성장과 변화의 기회를 상실하게 되며, 황홀경을 경험할 지렛대의 중심을 놓치게 된다. -64쪽

사랑에 빠진다는 말은 곧 투사를 한다는 말이다. 특히 사랑하는 사람에게 자신의 그림자 중 최고의 부분인 신의 이미지를, 남신이든 여신이든 상관 없이 투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이는 모든 숭고함과 신성함의 소유자가 된다.
우리는 흔히 사랑하는 사람에 관해 이야기할 때 감동의 언어로 치장을 하는데, 이때 사용하는 단어는 대개 신성을 묘사할 때 쓰는 것들이다. 이런 체험은 극단적으로 편향된 것으로 시소의 오른쪽에서만 벌어진다. 따라서 이 경험은 시소의 반대쪽에 그림자를 키우게 된다. 우리가 살아가면서 하는 수많은 경험 중에 사랑하다가 돌아섰을 때보다 더 씁쓸한 것은 없다고 느끼는 것도 바로 이 때문이다. -80쪽

110볼트짜리 사랑은 1만 볼트의 밝기를 보여주는 화려한 조명탄보다 훨씬 가치 있다. 그리고 인간적으로 동화될 수도 있다. 인간적 차원에서 일어나는 사랑은 하늘에 가닿는 로맨스의 경험보다 훨씬 더 아름답다. -87쪽

우리는 대부분의 시간 동안 서로 대립되는 두 관점을 가지고 살아가면서, 둘 간의 직접적인 대응을 피한다. 이것은 대다수 현대인의 삶의 특질로 규정할 수 있다. 일상생활에서도 영속적으로 분리된 이 견해들이 대립하는 사례와 마주치게 된다. 일하러 가야 하는데 가기가 싫다, 이웃사람들을 좋아하지 않으면서도 이웃과 잘 지내야 한다, 다이어트를 해야 하는데 어떤 음식을 너무 좋아해 절제하기 어렵다, 내 수입에 비해 과도한 세금을 내야한다 등이 그것이다. 우리는 지속적으로 이러한 모순 속에서 산다. 그렇지만 이런 환상은 반드시 깨어져야 한다. 아무리 힘들어도 그래야 한다. 편향된 균형을 단순히 못 본 체하고 살아갈 수는 없지만, 우리가 문제를 바라보는 방식은 바꿀 수 있다. 우리가 이 대극적인 요소를 받아들여 그 사이에서 일어나는 충돌을 의식으로 온전하게 견뎌낼 수 있을 때 역설을 수용할 수 있다. 역설을 받아들이는 능력은 정신적 강인함의 척도이자 성숙의 확실한 표식이 된다.
모순은 항상 대립하지만 역설은 신성하다. 상호모순에서 역설로 성장하는 것은 의식의 도약을 뜻한다. 이 도약은 우릴 하여금 중년기의 혼란을 극복하고 남은 생애동안 밝은 빛을 예측할 수 있도록 도와준다.
우리가 직면하고 있는 반대의 것들을 목록으로 만들어보는 것도 의미 있는 연습이 될 것이다. 목록을 작성한 뒤라면 역설의 회복을 꾀할 수 있다. -97~8쪽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덕목은 그 반대되는 것으로 인해 타당성을 지닌다. 어두움이 없는 빛은 아무 가치가 없다. 여성성이 없는 남성성이란 의미가 없다. 버림 없이 돌봄의 가치를 찾기는 어려울 것이다. 진실은 항상 다른 두 대극적인 쌍으로 이루어져 있고, 누구든 실체와 조화를 이루려면 이 대극을 견뎌내야 한다. 고통을 받는다는 의미는 허용한다는 뜻이다. 이런 의미에서 우리는 이중성이란 신비로 인해 고통을 겪는다. 이것을 할 때마다 즉각 저것도 하게 된다. 이것이 실체다. -101쪽

죄책감은 역설의 값싼 대용품이다. 우리는 죄책감으로 에너지를 소모하는 것보다, 우리 안에서 충돌하고 있는 서로 다른 진실을 들여다보는 용기 있는 행위에 에너지를 집중하는 편이 훨씬 낫다. 죄책감은 교만에서 온다. 어떤 이슈 중 한쪽을 택해서 그쪽이 항상 옳다는 확신을 하기 때문이다. 이런 편향성은 문화화되는 과정이지만, 종교적 삶에서는 심각한 장애가 된다. 직면할 힘을 잃으면 통합의 기회를 놓치며 만돌라의 치유력도 상실하게 된다. -136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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