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혼녘 백합의 뼈
온다 리쿠 지음, 권남희 옮김 / 북폴리오 / 2007년 5월
절판


모든 것의 테두리를 녹이는 석양의 바닥에서, 하얀 꽃잎이 뿌옇게 빛나고 있다. 백합 한 무더기. 둔하게 빛나는 하얀 백합 속에서 은은한 향기가 떠돌고 있다. 이 향기. 절대 벗어날 수 없는, 어디까지고 쫓아올 향기.
아, 맞다. 그 사람은 언제나 이 향기를 걸치고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이 향기를 마시고, 이 향기를 좇아 기억을 더듬자.
저녁 잿빛 어둠 속을 더듬거리면서, 그 사람의 기억을 찾아내는거야. 그래, 그것은 긴 여름이 끝나고, 이윽고 가을이 몰래 찾아오던 무렵. -8쪽

도모코는 예쁜 여자아이들의 흔히 그렇듯이 잔혹한 일을 당연한 듯이 저지르는 타입이었다. 나쁜 아이는 아니고 머리도 좋다. 여자들 사이에서 필요한 균형감각은 뛰어나다. 분명 곱게 자란데다, 어릴 때부터 남자들에게 떠받들려 살았을 것이다. -47쪽

요컨대 선이건 악이건, 인간은 자신들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절대적인 존재를 만들지 않고는 견디지 못한다. 그 절대적인 존재를 위해 누군가를 죽이는 일이나 살리는 일이나, 리세에게는 별로 다르지 않은 행위로 그녀진다. 그 절대적인 존재를 위해 산다는 점에서는 어느 쪽이나 마찬가지다. -48쪽

그 애, 영국에서 2년이나 유학하고 있었잖아. 그쪽 학년이 끝난 뒤, 여기로 편입했어. 여기서 좀 더 다닌 다음 다시 그쪽으로 돌아갈 생각인 거야. (중략) 어차피 이 집은 오래전부터 처분한다는 애기가 있었잖아. 세금도 많이 나오고 너무 낡았고. 아무도 입을 떼지는 않았지만, 어머니가 돌아가셨을 때가 집을 처분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을 거야. 어머니도 그건 알고 있었어. 그러나 어머니의 유언은 이상했지. 당신이 죽어도 미즈노 리세가 반년 이상 이곳에 살지 않는 한, 집을 처분해서 안 된다는 조건. 우리들도 어이없어했잖아. 그 애에게 유산의 일부를 주고 싶다는 거라면 그나마 이해가 가지만, 여기 살라는게 유언이었어. 그 이유라는게, 그녀가 유년시절을 보낸 이 집에서 한 번 더 살게 해주고 싶다는 거였지. 그야말로 어머니답지 않게 감상적인 이유야. 나는 틀림없이 집을 처분하지 않으려고 심술을 부린 거라 생각했어. ...... 그런데 리세 본인도 이 집이 처분되기 전에 여기서 살아보고 싶다고 나왔잖아. 자기는 어릴 때부터 부모와 산적이 없어서 할머니가 부모 대신이라고. 그러니까 꼭 한 번 더 여기서 살고 싶다, 할머니의 유언을 지키고 싶다고. 본인이 그걸 바라고 있으니 그렇게 준비하겠다. 변호사 이야기는 그런 거였잖아.-59쪽

언니는 꽤나 비현실적인 데가 있으니까. 그렇지만 난 이해할 수 없어. 어머니가 그런 말을 했을 거라고는 도저히 생각할 수 없어. 그 누구보다 합리적이고 현실적인 사고를 가진 어머니가. 무엇보다, 그 애한테 대체 무슨 득이 된다는 거야? 여기 와봤자 유산 한 푼 돌아가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그 애한테는 손해잖아. 학기 도중에 일본 학교에 편입하기도 까다롭고, 기껏 유학 갔다가 중단해야 하고. 손녀에게 득이 되지 않는 것을 어머니가 바랐을 리는 없어. 무엇보다 그 변태 아버지는 상당한 자산가라던데. 그 녀석과 함께 살면 되잖아. -60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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