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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슴벌레 여자 - 윤대녕 장편소설
윤대녕 지음 / 자음과모음(이룸) / 2001년 4월
평점 :
품절
수업시간에 몇 번 윤대녕의 이름은 들어본 적이 있지만 선뜻 그의 소설에는 손이 가지 않았더랬다. 그러다가 갑자기 무슨 바람이 불어서인지 서가에 꽂힌 이 책을 보고 앞뒤 가리지 않고 꺼내들어 읽기 시작했다. 그것이 윤대녕과 나의 첫 만남이었다. 한 작가와 코드가 맞는지 안 맞는지는 한 작품만 읽고 판단하긴 굉장히 힘들지만 윤대녕의 경우에는 특히나 더 힘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뭔가 가볍고 몽롱한 느낌의 뒤에는 삶의 본질에 대한 문제제기가 존재하고 있었다. 작가가 하려는 말을 확실히 알아차리기엔 힌트가 부족한 것 같았지만 조금은 그의 생각을 엿볼 수 있었던 책이었다.
어느 날 시청 앞 벤치에서 일어난 주인공. 하지만 그는 자신이 누구인지 전혀 기억하지 못한다. 자신을 증명해줄 만한 신분증은 이미 누군가 가져가버린 후. 시청과 광화문을 오가며 자신을 알아봐 줄 사람이 나타나기를 기다리며 그는 방황한다. 그렇게 방황하던 주인공은 한 해의 마지막 날 우연히 편의점에서 키가 유난히 작은 한 여자와 알게 되고, 그녀와 몇 마디 말을 나눈다. 알 듯 모를 듯 이상한 여자. 여차저차하다가 그는 결국 그녀의 집에 얹혀살게 되고 자신이 누구인지 모르는 공허함 속에 살아간다. 그런 그에게 키 작은 여자가 남의 기억을 빌려 살아가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고 남자는 그녀의 말대로 다른 사람의 기억을 빌려 살기로 결심한다. 이윽고 그는 다른 사람의 기억을 입력하게 되지만 자꾸만 그의 기억이 떠오르고, 그의 여자가 떠오른다. 기억의 주인공의 여자와의 만남. 그리고 그 뒤엔...
"따지고 보면 사람의 기억이란 것도 단지 필요한 것 중 하나일 뿐이예요. 생필품처럼 말예요."라고 얘기하는 키 작은 여자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과연 나를 존재하게 하는 것은 무엇인가, 내가 가진 기억은 실재하는 것일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몇 개의 신분증에 의해서 규정되는 삶, 다른 사람과의 관계 속에서 규정되는 삶. 그 속에 과연 진짜 나는 존재하고 있는 것일까? 만약 그 속에 내가 없다면 나의 본모습은 어디에 가서 찾을 수 있을 것일까? 라는 생각이 자꾸만 들었다.
인간의 본질에 대해서 생각해볼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해준 것은 좋았지만 이제는 조금은 식상해져버린 이야기가 아닌가 싶을 정도로 어딘가에서 본 듯한 내용이라 좀 아쉬웠다. SF 영화(가타카나 블레이드 러너와 같은)에서 한 번쯤은 접해봤음직한 이야기였다. 얼마 전, 기묘한 이야기 07년 봄 스페셜 가운데 '버츄얼 메모리'라는 이야기가 있었는데 그 이야기와도 어딘가 모르게 비슷한 느낌이 들었다. (다른 사람의 기억을 저장해놓은 것을 DVD처럼 빌려주는 이야기) 전반적으로 가볍게 읽을 수 있긴 했지만 이래저래 아쉬움이 남았던 작품. 윤대녕의 다른 소설은 어떨까 조금 궁금하긴 했지만 이 작품만으로는 So s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