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레젠트
가쿠다 미츠요 지음, 양수현 옮김, 마쓰오 다이코 그림 / 문학동네 / 2006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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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남편이 정말로 어떤 사람인지 아직 잘 모르지만(그리고 아마 남편도 내가 정말로 어떤 인간인지 모르고 있겠지만), 우리들은 둘 다 귀찮은 것을 싫어했다. 다른 애인을 만들거나 거짓말을 꾸며대는 건 성격에 맞지 않는 것이다. 우리 둘의 생활을 맺어주는 것이 있다면, 그것은 사랑이라기보다 귀찮음이다. 그러나 그건 결코 슬픈 것이 아니라 오히려 안심할 만한 일이었다. 류지와의 연애도 다이지와의 연애도, 나에게는 사이즈가 너무 작거나 큰 구두 같은 것이었으니까. -15쪽

정말로 우리들의 생활은 커다란 평범함과 커다란 따분함으로 이루어져 있다. -15쪽

이름은 그 사람을 표현하는 것이라는 말이 있는데, 정말 그렇다고 나는 종종 감탄하곤 한다. 만약 내가 하루미라는 이름이었다면 지금과는 다른 나날을 보내고 있을지도 모른다. 이름 같은 건 단순한 기호에 불과한데도, 그 이름이 소유자의 인생을 이끌어주는 듯한 기분이 들 때도 있다. -15쪽

어른이란 또 얼마나 어린아이 같은 것일까. 뭐든지 다 알고 있는 듯한 얼굴을 하고 있지만, 실은 아무것도 모르고 있는 것이다. -36쪽

나는 나이를 스물일곱이나 먹을 때까지 아무것도 모르고 있었다. 사람이 죽는다는 게 어떤 것인지, 행복의 형태가 다르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사랑이 나에게 무얼 가져다주는지, 실연이 나에게서 무엇을 빼앗아가는지, 하나도 모르고 있었다. 신기하다. 옛날에는 그렇게나 많은 것들을 알고 있다고 생각했는데, 지금의 나는 아는 것보다 모르는 것이 훨씬 더 많다. 어른이 된다는 것은 이렇게 모르는 것이 늘어나는 것일까. -39쪽

사람의 기분이란 푸딩 같은 것이라고 당시의 나는 생각했었다. 틀 가득히 넘칠 만큼 푸딩액이 차 있지 않으면 제대로 된 푸딩을 만들 수 없다. 그렇기 때문에 푸딩액이 흘러나가서 부피가 부족해질 때마다 다시 채워넣어야 하는 것이다. 그는 내게 있어 푸딩틀에 뚫려 있는 작은 구멍 같은 존재였다. 나의 푸딩액은 틀 속에 가득 차 있지 못하고 그 작은 구멍에서 계속 뚝뚝 떨어지고 있었고, 나는 그 비어 있는 공간을 다른 것으로 채우기 위해 심혈을 기울여야 했던 것이다. -138~9쪽

같은 곳을 걷고, 같은 것을 보아도, 우리들의 기억은 조금씩 다르다. 점점 달라지는 것이 아니라, 처음부터 달랐던 것이다. -161쪽

계란은 딱딱하게 굳어 있고 간은 전혀 맞지 않지만, 뜨거운 죽에서는 신기하게도 다정한 맛이 났다. 내가 훨씬 맛있게 만들 수야 있겠지만, 남편의 죽은 내가 만들 수 없는 맛이었다. 엄마가 만들어주는 밥 같다. 엄마의 맛이라고들 하지만, 아무리 흉내래겨 해도 엄마와 같은 맛은 절대 나지 않는다. 문득 요리에는 사람의 혼 같은 것이 담겨 있다는 생각이 든다. 만드는 사람이 의도하지 않아도 조리과정에서 그런 재료가 뚝뚝 떨어지는 것이다. 떨어뜨리고 떨어뜨려도, 먹고 먹어도, 바닥이 나지 않는 혼. -205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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