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최대 갑부 역관 표정있는 역사 1
이덕일 지음 / 김영사 / 2006년 3월
구판절판


역관들은 어떻게 거부가 될 수 있었을까?
역관들이 거부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직업상 특징 때문이다. 역관들은 현재로 치면 두 개의 직업을 가진 '투잡스족'으로, 외교관이자 국제무역상이었다. 이 두 직업은 모두 거부가 되기에 유용한 특성이 있었다. 해방 이후 한국 재벌 성장사가 종합무역상사 성장사이기도 하듯이, 국제무역은 예나 지금이나 거부로 가는 지름길이다. 또한 외교관의 특성도 거부가 되기에 좋은 조건이었다. 역관은 외국에서 사신이 오면 국왕에게 통역을 해야 하기 때문에 직업상 국왕을 자주 면대할 수 잇었다. 또한 대군이나 부마같은 왕실 사람들, 고위 관료들과 깊은 관계를 맺을 수 있었다. 이들이 중국이나 일본의 사신으로 갈 때면 역관들과 오랜 시간 같이 지내야 했다. 이는 역관이 국왕이나 고위 관료의 비호를 받을 수 있을 만큼 권력에 가까웠다는 뜻이다. 예나 지금이나 권력자와 가깝다는 것은 축재의 좋은 조건이다. 홍대용이 중국 북경 기행문인 <담헌연기> 포상 조에서 한 "통역들은 모두 높은 이들에 등을 대고 있소"라는 말이 이를 대변한다.
역관들은 재산을 지키기에도 조건이 좋았다. 재산을 부당하게 빼앗길 경우 바로 권력자에게 알려 시정을 요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즉 역관은 부자가 될 수 있는 좋은 조건을 고루 갖추고 있었다. -18~9쪽

유구어 역관까지 설치함으로써 조선의 역관 제도는 완성되었다. 중국어, 몽고어, 만주어, 일어, 위구르어, 유구어의 6개 국어 역관이 설치된 것이다. -29쪽

고려 말과 조선시대에 사역원에서 역관들이 중국어 학습 교재로 사용한 책은 <노걸대>와 <박통사>였다. <노걸대>는 초급 수준의 중국어 교재이고, <박통사>는 중급 수준의 중국어 교재로, <노걸대>는 현전하는 세계 최고의 중국어 학습 교재이다. 지금으로부터 700여 년 전인 1280년경 원나라의 대도(북경)로 고려 상품을 팔러가던 상인 3명이 길에서 우연히 만난 요동성 출신의 중국 상인과 동행하면서 여행 중에 일어난 에피소드를 책으로 엮은 <노걸대>는 구어체라는 것이 흥미롭다. -29~30쪽

조공무역을 일각에서 사대주의라고 비판하지만 조선으로서는 조공이라는 명분으로 실리를 챙기는 실리외교에 다름 아니었다. 조공무역의 결과는 조선의 이익이었다. 이는 조공 횟수를 둘러싼 두 나라의 주장을 보면 명확히 드러난다.
조선 초기 명나라는 3년 1공. 즉 3년에 1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한 반면, 조선은 거꾸로 1년 3공, 즉 1년에 3번의 조공무역을 주장했다. 조공무역이 세간의 인식대로 조선에서 일방적으로 명나라에게 갖다 바치는 것이라면 명나라에 3년에 한 번만 바치면 된다는데 조선에서 1년에 세 번 바치겠다고 주장할 까닭이 없다. 조공무역을 조선의 손해로 보는 것은 그 원칙을 모르는 데서 나온 오해이다.
조공의 원칙은 '조공이 있으면 사여가 있다'는 것이다. 조공국에서 조공을 바치면 사대국에서는 사여를 내리는 것인데, 사여품이 조공품보다 많은 것 또한 원칙이었다. 이는 상국으로서, 황제국으로서의 체면을 유지하는 비용이기도 했다. -46~7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