캐비닛 - 제12회 문학동네소설상 수상작
김언수 지음 / 문학동네 / 2006년 12월
장바구니담기


심토머들 중에는 손가락에서 선인장이나 포도나무가 자라는 사람도 있고, 몸의 일부에서 도마뱀의 형질이 나타나는 사람도 있다. 남자의 성기와 여자의 성기를 동시에 완벽하게 가지고 있으며 그것으로 자가수정을 할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손가락 끝에 후각, 시각, 미각을 느낄 수 있는 감각기관이 생겨나서 손가락으로 사물을 보거나 냄새를 맡을 수 있는 사람들도 있다. 권박사는 지난 사십 년 동안 전 세계의 심토머들을 연구해왔다. 그래서 우리가 관리하고 있는 13호 캐비닛에는 이렇게 종의 변화가 생긴 사람들의 자료가 가득 들어 있다. -30~1쪽

나는 병원에서 일한다고 모두가 의사는 아니며, 공군에서 근무한다고 모두가 전투기 조종사는 아니라는 사실을 사람들이 조금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전투기가 거꾸로 날거나 논두렁에 처박혀서 경운기의 비웃음을 사지 않기 위해선 누군가 그 큰 바퀴를 제대로 갈아끼우고, 비행기 이곳저곳을 닦고, 조이고, 기름쳐야 하며, 또 누군가는 깃발을 열심히 흔들어야 한다는 것을 말이다. 조종사와 비행기만으로는 하늘을 날 수 없다는 것, 누군가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폼나지 않는 일을 해줘야만 비행기가 논두렁이나 하수구에 처박히지 않고 하늘을 제대로 날 수 있다는 것, 그게 우리가 살고 있는 세상이라는 것을 사람들이 이해해주길 바라는 거다. 대표성의 잣대에 기대지 말고 개별성의 잣대로 사람을 대해달라는 것이다. 나는 그것이 성숙하고 깊이 있는 인간관계의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56쪽

폐허랄 가질 용기도, 무책임을 가질 용기도 없어서 우리는 항상 피곤하고 지쳐 있는데도 깊은 잠을 이루지 못하는지도 모른다. -78쪽

그녀는 당당하게 살고 싶었다. 그녀는 인간의 존재가 자신이 보낸 과거의 시간에 의해 규정된다는 것을 알았다. 그래서 그녀는 과거를 고쳤다. 그것은 효과가 있었다. 부끄러운 과거가 지워질 때마다 그녀는 자신감이 생겼고 더 적극적이고 도전적인 성격을 가지게 되었다. 그녀는 점점 많은 과거에 손을 댔다. 자연적인 망각과 망각하려는 의지에 힘입어 그녀의 수정된 일기는 점점 그녀의 기억을 지배하게 되었다. -98쪽

나쁜 기억을 가지고 사는 것은 더 치명적이고 더 위험한 일이죠. 왜냐하면 나쁜 기억과 더불어 사는 삶은 지옥 그 자체니까요. -100쪽

명동백작은 술자리에서 '사랑은 통조림 같은 것'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 사랑에도 통조림처럼 유통기한이 있고, 주의사항이 있고, 가격표가 붙어 있다. 지갑을 열어 자신의 구매력을 살펴본 다음 가격표를 확인하고, 주의사항을 지키면서, 유통기한 내에 사랑하면 된다. 그러면 모든 것이 순조롭다.
어쩌면 이 도시에서 사랑이라는 것은 정말 통조림 같은 것일지도 모른다. 돈과 깡똥따개와 유통기한을 확인할 작은 관심만 있으면 어디서나 쉽게 구할 수 있고, 비슷비슷하며, 또 안전하고 맛있는 사랑을 할 수 있으니까. -126쪽

당신은 영원히 마법사를 발견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 그것은 마법사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 아니다. 그것은 당신이 꿈꾸기를 멈추었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 마법은 너무도 흔하다. 따라서 마법사도 흔하다. -141쪽

허튼 희망은 이 지독한 현실을 견디는 데 도움은커녕 오히려 독이 돼. -158쪽

불행은 결코 할부로 오지 않아. 불행은 반드시 일시불로 오지. 그래서 항상 처리하기가 곤란한 거야. -164쪽

자신감을 가지고 할 수 있는 일은 21세기에 아무것도 없다. 서부개척 시대가 아닌 것이다. 21세기에 필요한 것은 자신감이 아니라 자신의 능력이 검증된 명료한 자격증와 인증서이다. -165쪽

우리는 불안 때문에 삶을 규칙적으로 만든다. 면밀하게 계획을 세우고 그 계획에 삶을 맞춘다. 우리는 삶을 반복적이고 규칙적으로 움직이게 해서 가장 효율적인 시스템이 우리의 삶을 지배하게 만든다. 습관과 규칙의 힘으로 살아가는 삶 말이다. 하지만 효율적인 삶이라니 그런 삶이 세상에 있을까. 혹시 효율적인 삶이라는 건 늘 똑같이 살고 있기 때문에 죽기 전에 기억할 만한 멋진 날이 몇 개 되지 않는 삶을 말하는 것은 아닐까. -182쪽

존재감이 한없이 작아진 느낌이 들 때가 있다. 아무도 나를 기억해주지 않고 어떤 순서도 내게 오지 않을 것 같은 느낌. 내가 가장 사랑하는 사람들에게 나라는 존재가 호치키스나 진공청소기보다 못한 존재일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이 들 때가 있다. 내가 이 세계에서 어떤 모습으로 어떤 가치로 존재하고 있는지를 눈치채게 되는 것이다. 누군가 나에게 말했다. "이봐, 실망하지 말라구. 인간이 된다는 것은 번호표를 가진다는 거야. 그러니 조용히 순서를 기다려. 어쩔 수 없는 일이잖아."-226쪽


댓글(2) 먼댓글(0) 좋아요(0)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
 
 
뽀송이 2007-02-02 22: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___*
전... 아직... 이 책 다 읽지 못하고 있어요...^^;;
다른 책들이 자꾸 끼어들어서...(__)

이매지 2007-02-02 23:0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내일쯤이면 다 읽을 수 있을 것 같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