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버지와 아들
박목월.박동규 지음 / 대산출판사 / 2007년 1월
품절


커피 맛이 입 안에 깔리지 않는다. 이것은 커피의 질이 나쁜 탓이 아니다. 집 안에서 끓여 마실 때도 그 맛이 옛날 같지를 않다. 입 안이 허전한 것이다.
음식에는 두 가지 종류가 있다. 본질적인 음식과 그렇지 못한 것이다. 즉, 배가 고프기 때문에 먹는 것과 기분이나 감정으로 먹는 것. 기분이나 감정으로 먹는 것이 '감정의 음식'. 커피는 후자에 속한다. 감정이 불러들이는 음식이다. 그러므로 감정이 변하면 그 맛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
젊었을 때, 넘치는 정감이 기리던 커피는 이제 그 정감이 갈앉자, 맛도 변한 것이다. 허전하고 섭섭하고 쓸쓸한 커피의 맛. 그 세계.
커피의 맛이 허전해짐은 참으로 섭섭한 일이다. 이 적막하고 허전하고 고독한 세계야말로 내게는 벗어날 수 없는 숙명으로-백발의 세계요, 그 삶의 테두리다. 이 테두리 안에서 나의 적요한 세계의 일월이 도는 것이다. -42쪽

가정은 인간의 순수한 정이 서로 부딪쳐 그윽한 음악을 울리게 하고 모든 악함을 정화시켜 참사랑에 눈을 뜨게 한다. 그리고 훈훈한 훈기 속에서 사람이 사람에 대한 신뢰를 움트게 하며, 나아가서 측은한 존재로서 엷은 등을 맞대고 의지하고 위로하며 사람 된 길을 가게 하는 것의 원천이라 할 수 있다. -106쪽

가족은 오로지 세상에서 생명을 함께 하는 유일한 행복의 샘이다. 맑은 생명의 물을 나누어 마시며 서로가 있기에 살아 있음이 증명되는 모든 것의 중심인 것이다. 그러기에 일상으로 해서 무디어진 감각을 다듬어 생명의 샘에 목을 축이는 행복이 무엇인가를 알아야 할 것이다. -182쪽

군인이 되는 것은 직업을 가지는 것이지만 어떤 직업의 자리에서 일하는가 하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야. 어떤 사람이 그 자리에서 일하는가가 중요한 것이야. -185쪽

들찔레처럼 자리를 가리지 않고, 꽃을 피우며 보는 이 없어도 향기를 피우며 뻗어가는 그 생명력을 지니고 산다는 것은 행복한 일이다. 쑥대밭처럼 무성하게 살다가 가을이 와서 줄기조차 붉게 시들어도 바람이 불면 울 줄 아는 그런 삶을 산다는 것은 꿈이다. -185쪽

무엇이 이 세상에서 영원히 인간의 마음에 남아 있는 것이 될 수 있을까하는 물음을 품을 때마다 나는 멋도 모르고 마구 주워 읽은 소설이나 시 속에서 언제나 가슴을 뜨겁게 하던 그 감동의 원천이 영원한 것이라는 믿음을 갖게 되었고 결국 지금까지 사라지지 않는 영원한 문자 속에 박힌 인생에 대해 관심을 가지고 사는 것이다. -204쪽

하늘을 날고 싶은 욕망이 있어야 날개를 찾아 헤매듯이 또 어떤 이를 만나고 싶어하는 마음이 있어야 반가움이 생기듯이 언제나 지나온 체험의 저편에는 내가 왜 이 자리에 서 있는가를 알려주는 흔적이 있는 것이다. -204쪽

한가족으로 살면서 어떤 생활의 의식과 관습을 만들어가느냐 하는 것은 부모들의 삶의 정신에서 생겨나는 것이다.
남들이 하니까 나도 한다는 식의 생활은 나 자신이 살아보고 싶어하는 삶을 만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남들을 향해서 살아가는 타자 지향의 비개성적 생활이 될 수밖에 없는 것이다. 이러한 생활 속에서 우리 가족이 살아보고 싶어하는 삶의 세계가 어떤 것인가에 대해 그 정체성을 찾아보고자 하는 의욕은 간 곳이 없고 남들이 가진 물질적인 외양에 맞추어 살아가게 되는 것이다. -221쪽


댓글(0) 먼댓글(0) 좋아요(1)
좋아요
북마크하기찜하기 thankstoThanksTo