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이어트의 성정치 책세상문고 우리시대 18
한서설아 지음 / 책세상 / 2000년 8월
구판절판


남녀의 지위가 뚜렷하게 차별적인 전통시대에는 한 남자의 여자로서 그가 원하는 몸을 가지기 위해 노력하고, 대를 이을 아이를 낳아줌으로써 정숙한 아내, 현명한 어머니가 되는 것 외에는 어떠한 정체성도 가질 수 없고, 사회적 활동에도 접근할 수 없었다. 이러한 시대에 '외모를 가꾼다는 것'은 여성들에게 결코 선택의 문제가 아니었다. 더욱이 엄격한 신분 사회에서 몇몇 최상류층 여성들을 빼놓고는 절대 접근할 수 없었던 사회적 권력을, 시대의 이상적인 아름다움을 가진 소수의 여성들은 그 권력자 남성의 '여자'가 됨으로써 어느 정도 공유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도 있었다. 우리에게 아주 익숙한 신화와 동화들은 아름다운 몸을 가짐으로써 신분의 높은 벽을 훌쩍 뛰어넘은 여성들의 이야기로 가득 차 있다. 결국 남자와의 관계를 통해서만이 존재 가치를 부여받을 수 있었던 당시의 여성들은 사회의 주인공인 남자들이 원하는 몸을 가짐으로써 그 남자의 파트너 자격으로라도 사회 구성원으로서의 자격을 인정받을 수 있었던 것이다. -26~7쪽

경제적 근대화가 진행되면서 초기 자본주의가 발달하고 귀족 외에도 부유한 계층이 등장함에 따라 귀족들의 음식 섭취를 모방하는 경우가 생겨났다. 그러자 귀족들은 음식의 '양이 아닌 질'로 자신들의 계층 문화를 차별하기 시작했다. 이로부터 '미식'의 개념과 풍습이 생겨나고 음식 섭취를 통제하고 조절하는 것이 상류층을 상징하는 중요한 요소로 등장하게 되었다. 이에 따라 날씬한 몸매는 이러한 통제와 조절의 성공을 나타내는 하나의 미적인 이상이 되었다.
한편 이러한 이상은 19세기에 들어 점차 중산층에도 확대되기 시작했다. 재미있는 것은 이 과정에서 '날씬함'의 이상이 특히 여성들에게 중요한 의미를 지니게 되었다는 점이다. 19세기 중엽까지도 중산층 남자들의 '살찐 배'는 성공적인 사업가의 축적된 부를 상징하는 것으로 당시 점점 쇠퇴해가던 귀족 계급의 우아하고 마른 몸과 자신을 구분하는 역할을 해주었다. 반면 중산층 여성들의 아름다움은 그 여성을 '소유'한 남자의 권력과 부를 결정적으로 빛나게 해주는 것으로 여겨졌으며, '연약한 몸매'를 가진 미모의 아내는 사회적 활동을 하지 않고 가정에만 머물 수 있는 '혜택'을 자신의 여자에게 줄 수 있는 중산층 남편들의 성공을 나타내는 징표가 되었다.-36~7쪽

여성들의 날씬한 몸매는 서구화 또는 최첨단의 발전이라는 가치를 함축하게 되었고 새로움의 가치를 추구하는 모든 여성들에게 하나의 이상으로 자리잡았다. -40쪽

우리는 지금 아무리 얼굴이 예쁘더라도 '날씬하고 잘 빠진' 몸매를 갖지 못하면 자타가 인정하는 미인이 될 수 없는 시대에 살게 되었다. 이렇듯 이미지가 막강한 사회적 위력을 발휘하는 시대의 도래는 여성의 아름다운 몸에 대한 기준을 변하게 만들고 그 기준을 대중적으로 크게 확산시켰을 뿐만 아니라 다른 어떤 것보다도 이상적 외모가 상징적, 경제적 가치를 지니는 사회적 분위기를 조성했다. '다이어트'는 이러한 분위기에서 여성들에게 마치 종교에 대한 몰두와 같은 사회적 붐을 일으켰다. -42쪽

외모는 성별 차이에 대한 믿음이 사회적으로 형성되는 데 가장 중요한 요소가 되어왔다. 그러나 남성다운 외모와 여성다운 외모가 완전히 다르다는 것은 하나의 사회적 믿음이지 남성과 여성의 신체적 차이에 정확히 근거하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러한 차이를 실제로 자신의 몸에 구현하는 것이 개인이 사회적 관계를 맺고 정체감을 형성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되기 때문에 사람들은 각각 자신의 성에 어울리는 외모를 가지기 위해서 끊임없이 노력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47쪽

남성들은 여성에 비해서 다양한 사회적 자원에 접근할 수 있는 가능성이 많기 때문에 그러한 자원의 소유가 남자로서 가지는 매력 중에 중요한 부분이 될 수 있다. 따라서 사회적 기준에 꼭 들어맞는 외모를 가지고 있지 못해도 그 부족함이 다른 자원, 예를 들어 높은 사회적 지위나 좋은 성격 등으로 충분히 상홰될 수 있는 융통성이 남성들에게는 존재한다. 그에 비해 여성들의 경우에는 워낙 다른 사회적 자원에 대한 접근도 어려울 뿐더러, 설령 그러한 자원을 소유하고 있다고 해도 일차적으로 외모를 중심으로 '여성다운 매력'이 구성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이상적인 외모를 갖고 있지 못하면 아무리 다른 사회적 자원을 가지고 있어도 남자들의 시선에 의해서 '여자'로 감지되지 못하며 오히려 다른 자원의 가치까지 폄하되는 경우가 많다. 이를테면 예쁜 여자가 공부를 잘하면 더욱 매력적으로 보이지만 못생긴 여자가 공부를 잘하면 독한 여자라는 소리를 듣는다는 농담 등은 여성이 가진 다른 자원의 가치를 '외모의 수준'에 따라 평가하는 사회의 시선이 노골적으로 드러난 하나의 예에 불과하다.

남성이 남자다움을 인정받는 데 외모는 하나의 필요조건일 뿐이지만, 여성에게는 '여자'로 인정받기 위해서 없어서는 안될 충분조건이라는 것을 여성들은 일상적으로 체험하게 된다. -48~9쪽

결국 날씬한 몸을 가져야 '여자'로 인정받고 '성'에 있어서도 더욱 주체적인 존재가 될 수 있다는 사회의 메세지에 둘러싸인 여성들은 안정된 정체성과 성적 주체성에 대한 적극적 욕망을 무엇보다도 '날씬한 몸' 만들기에 대한 욕구로 전환시키고 있다. -53쪽

1980년대 이래로 광고, 드라마, 영화 등 영상매체에 등장하기 시작한 이른바 '커리어 우면'이미지는 여성들의 사회적 진출에 대한 욕망이 점점 커져감에 따라 급격하게 부상하기 시작했다. 그런데 이러한 이미지 속에서 성공한 여성을 나타날 때 가장 핵심적으로 부각된 것이 바로 세련된 패션과 스타일을 소화해낼 수 있는 여성의 날씬한 외모였다. 이제 이 이미지들 속에서 현대 사회의 바람직한 여성으로 부각되는 '일하는 여성', '성공한 여성'은 곧바로 '아름다운 여성'으로 재현되었다. (중략) 이로써 날씬한 외모는 이제 단순한 미적 기준을 넘어서 자아 실현과 사회적 성공에 대한 여성들의 욕망의 중심에 자리잡게 된다.-55~6쪽

최근에는 사회적인 성공을 하려면 좋은 학벌, 인맥, 그리고 능력과 노력만으로는 충분하지 못하다는 차원을 넘어서 외모 역시 하나의 능력이자 자본이라는 생각이 확산되고 있다. -58쪽

여성들이 다이어트를 본격적으로 경험하게 되는 순간부터 '몸'이라는 지극히 개인적인 영역에 대한 '자기 검열'을 통해 '자신의 의지'로 '스스로 선택한 규칙'에 따라 행하는 것이 되고 따라서 다이어트의 성공은 결국 '자기 만족'을 가져다주는 것으로 의미가 확대된다. 이러한 과정을 통해 다이어트의 필요성을 여성들에게 각인시키는 사회문화적인 힘은 여성이 '자아'와 맺는 관계 속으로 흡수되고 다이어트는 따라서 철저하게 개인적인 문제, 자아의 문제로 받아들여지는 것이다. -97쪽

'먹고 싶다, 그러나 마르고 싶다'로 표현되는 여성들의 딜레마는 식욕의 억제와 분출 모두를 부추기는 소비 문화를 통해서 더욱 첨예해진다.-10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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