포스트 잇
김영하 지음 / 현대문학 / 2005년 10월
품절


책의 정말 중요한 기능은 전시되는 것이다. 꽂혀 있는 것. 왕궁의 근위병처럼, 놀이동산의 꽃시계처럼, 책은 '거기' 있다는 것만으로도 훌륭히 기능하고 있다. 전시! 그것은 결과가 아니라 목적이며 숨겨진(핵심) 기능이다. 대부분의 책은 자신의 전 생애를 책꽂이에서 보내고 그것으로 제 할 일을 마쳤다는 듯 의연하다. 전시가 책의 숨겨진 핵심 기능이라는 인식에 다다르면 홀연 많은 문제가 해명된다. 정보도 풍부하고 접근도 편리한 전자책(e-북), 나오기만하면 종이책 장사들은 파리 날리게 되리라며 호언장담하던 그 전자책이 안 팔리는 이유, 바로 그 전시의 기능이 없어서다.

호화로운 장정과 만만찮은 두께로 뭇 책들을 압도하는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나 <푸쉬킨 전집>은 바로 그 '핵심 기능'에 충실하다. 한마디로, 꽂아놓으면 폼 나는 것이다. 손님이라도 와주면 더 좋다. 주인의 성은을 입었든 안 입었든 그 책들은 꽂혀 있는 것만으로도 능히 그 값을 한다. 그러나 첨단 문명의 총화, 전자책으로는 폼을 잡을 수가 없다. -58~9쪽

인터넷은 우리의 집단 무의식이다. 욕망의 검은 입이다. 그러므로 인터넷을 거부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것은 악몽처럼 계속 우리 곁에서 추문을 생산해낼 것이다. 원조 교제, 자살 공모, 청부 살인, 마약 밀매, 부부 스와핑, 간통, 카드 사기, 인신 매매, 마초이즘, 테러리즘 .... 우리의 하이드는 낮에도 쉬지 않는다. -63쪽

혼자 하는 여행은 대체로 허영의 결과일 때가 많다. 자기애에 빠져 허우적대다가 그 졸렬한 결말을 도저히 감당할 수 없을 때 우리는 가끔 여행이라는 극적인 방식을 동원하게 된다. 그런 여행자일수록 주변을 시끄럽게 하고 자신의 허무와 고독, 결단력을 강조하고 과장한다. 인도나 유럽 같은 곳에선 이마에 내천川 자를 새긴 채 여기저기를 떠도는 이런 유형의 여행자를 자주 만나게 된다. -92쪽

얼핏 보기에 선물을 주고 받는 행위는 아름답고 평화롭게 건전해보인다. 그런데 세월이 가면 문제가 달라진다. 사람이 떠나도 음악은 남는다. CD를 버려도 어디선가 누군가는 그 음악을 틀고 있으므로 우리는 거리에서, 카페에서, 술집에서 무방비 상태로 함께 듣던 음악의 습격을 받게 된다. 그럴 때 우리는 어제 퇴직한 우편 배달부처럼 우울해진다. 마음은 갈피를 잡지 못하고 음악에 휘둘리게 된다. 그럴 때 음악은 변태의 추억보다 훨씬 더 잔혹하고 집요하다. -109쪽

세상에는 그런 일들이 있다. 아무도 원치 않지만 누구도 멈출 수 없는 일. 얼떨결에 시작되어 어쨌든 끝을 보게 되는 일들. -116쪽

위대한 문학은 끊임없이 인생의 부조리함과 인간의 어리석음, 저열함, 그리고 그 속에서 피어난 숭고함을 다룬다. 문학은 인간으로 하여금 죽음에 맞서게 하며 그것의 본질에서 비켜서지 않는다. 문학은 시뮬레이션이 아니다. 오히려 문학은 시뮬레이션에 대한 안티로서 존재한다. 일일 드라마와 헐리우드 영화와 공익 광고와 머드 게임이 유포하는 환상을 공격하고 그것으로 밥줄을 삼는다. 문학은 바보에게 바보라 하고 무능력자에게 무능력자라 하고 독재자에게 독재자라 한다. 인생은 설명될 수 없는 것이라 말하고 어느 날 죽음이 자객처럼 다가와 네 욕망의 여정을 끝장내리라 말한다.
-172~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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