엄... 주인장은 돌아왔는데.. 게으른 사람이 어디 가나? 짐정리하고, 여행옷 빨고, 집청소하고, 오늘 저녁에 먹을 배추된장국까지 끓이고 났더니... 서재에 주인장 돌아왔단 인사를 안 남긴 게 생각났다. (옹.. 역시 나는 게으르구려.)

파리, 피렌체, 베네치아, 루체른. 파리에서만 12일을 머물었다. 그만큼 파리 시가지와 사람들 사는 모습이 좋아서. 까페에 앉아 하릴없이 햇빛도 쬐고, 마레지구에서 게이, 레지비언 밤마실도 구경하고, 무프타 거리에서 옷도 사고... 파리영화제에서 '골드 피쉬 메모리'와 '멀홀랜드 드라이브'도 보고... 파리지엔 처럼 지냈다.

피렌체, 베네치아, 루체른에선 워낙 짧게 머문데다 정말 여행객이었기 때문에 관광지밖에는 돌지 못했지만. 파리에 머문 기간이 길어 민박집 주인 언니와 매니저 청년(우리끼리는 '파리청년'이라고 불렀지^^)와 정도 많이 들었는데... 유학와서 열심히 사는 모습 보니까, 다시 살아갈 힘도 나고 애닮기도 하고, 생각이 많아졌다.

서울로 돌아오니, 웬 걸 ... 반가운 소식이 기다리고 있었다. 누군가 '나와 함께 일하고 싶다'고 연락을 해온 것. 조금은 기대되고, 또 조금은 긴장된다. 다시 새 인생.. 이제 막 3장을 시작한 듯한 느낌. 그리고 지금부터는 취미로라도 꾸준히 글을 쓰기로 결심했다. 습작 인생, 곧 죽어도 인생 땡큐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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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발~* 2004-04-0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굴비 일등~~~ 무사귀환 축하!!! 오, 나도 기대됩니다~

초록미피 2004-04-08 08:1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성혜씨, 잘 다녀 왔다니 반갑네요. 연락 왔다는 게 혹시 그건가? (아닌가?) 어쨌거나 하영씨 오면 한 번 만나요~~

플라시보 2004-04-13 14:1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무사히 오셨군요. 요다님. 님의 여행기를 너무 재밌고 고맙게 읽었는데 오셨다니 약간 아쉽기도 하고 그러나 반갑기도 하네요^^ 앞으로도 재밌고 좋은글 부탁드립니다.
 

순희언니. 이렇게 이름을 붙여 부르니 더 다정한 느낌입니다.

오늘 언니랑 이야기하면서 제 여행이 얼마나 고되고 벅찬 것이었는지 되돌아보게 되었어요. 그리고, 무리하면서 죽기 살기로 강행하는 여행은 이제 그만하고 싶어졌습니다.

언니 형부와 오늘 같이 시간을 보낸 것처럼 여유있게 한 일주일 더 머물까 합니다. 경희가 그 전에 파리에 오게 된다면 다함께 모여 한 잔 할 수 있을지도 모르겠어요. 경희가 오지 않아도 이번 주말쯤에 와인 사들고 찾아가겠습니다. 출국하기 전날 저녁은 언니 집에서 자고 싶어요. 출국은 4월 3일(토) 또는 4일(일)에 하려고 합니다. 이 메일 보낸 후에 바로 여행사에 연락해서 비행기 예약 수정하려구요. 이때 언니집에 방문해도 좋은지는 메일로 답신주세요.

힘들게 하는 여행보다는 천천히 앞으로 무슨 일을 하고 살지, 어떻게 하고 싶은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지 고민하고 싶어요. 파리 사람들 어떻게 사는지 구경도 하고, 여기서 유학하는 한국사람들도 만나고. 예전에 서로 감정 상한 채 헤어져서 몇 년간 연락 끊었던 언니(마침 파리에서 유학중이랍니다)도 만나 점심도 할까 합니다.

마음에 돌을 달고 걷는 듯한 고된 여행이었는데, 오늘 언니 만나고 그 돌을 내려놓을 수 있었습니다. 언니랑 맥없이 이런 저런 이야기하는 동안 마음이 조금씩 풀어졌어요. 이제는 가벼운 마음으로 산보하듯이 다닐 수 있을 것 같아요.

별 것 아닌 일인데, 그동안 마음 힘든 일이 많았었는지 이번 여행이 사치처럼 여겨지더라구요. 그럴수록 몸을 혹사시켰고, 그러면서 마음은 더 단단해져서 여행은 하나도 즐겁지 않았습니다. 그러다가 언니, 형부, 산이랑 만나는 동안 얼마나 내가 불쌍한지 알게 되었어요. 많은 돈 들여서 온 여행이니까 그저 즐겁게 놀래요. 

이미 나는 서울을 떠나왔고, 언젠가 또 이런 날이 올테니까... 이번 여행은 마지막도, 끝도 아니니까... 나는 나를 위해서 앞으로도 잘 살아갈 거니까... 

아까 룩셈부르크 공원에서 갑자기 눈물이 나서 당황했지만, 제 마음을 알게 되어서 다행이라고 생각해요. 언니가 옆에 있어 주어서 그랬던 것 같아요. 언니, 그냥 고맙습니다. 그럼, 주말에 뵈어요. 형부에게도 안부 전해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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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착 첫날, 민박집 부부가 차려준 해물 스파게티와 화이트 와인이 맛좋았다. 술을 좋아하는 내가, 이때쯤이면 술생각이 간절한데 때마침 술을 먹게 되어 기뻤다. 와인 2병을 비우고 알딸딸한 기분에 청한 잠은, 깊고 달콤했다. 아침에 좀더 잤으면 싶었지만.

처음 일정은, 물라노. 유리공예로 유명한 곳이라. (이후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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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영씨 이탈리아 피렌체에 가신다면, 미켈란젤로의 들판에 가보시길. 그리고 본 광경을 말해주시길.

피렌체 일정은 원래 하루+반나절(30시간) 정도 였는데 파리에서 1등 침대칸에 타기위해 트레인 컨트롤러와 입씨름을 벌이느라 2시간을 낭비하고, 원래 예약된 2등칸 기차를 놓치는 바람에 완행 기차를 타고 오느라 관광에 쓸 반나절을 흘려보냈다. 그러나 여행은 원래 이런 것, 계획은 살아 움직이는 것이라고 서로 위로했다. 1등 침대칸을 타겠다는 굳센 의지가 우리를 이렇게 피곤케 할 줄이야. 우리는 피렌체 도시 여행보다도 유로스타 1등 침대칸이 더 좋았던 것이다!!!!  ㅠ.ㅠ

그리하여 피렌체에 떨어진 시간은, 예정보다 5시간 늦은 오후 12시. 피렌체 자매민박에 짐을 풀고 점심을 먹고나니 똑딱똑딱 시간은 흘러 1시 40분이 되었고, 다시 2등석 예약좌석을 1등석으로 옮기는데 수십여 분을 쓰고 3시경이 되어서야 두오모에 도착했다. 핑크, 화이트, 그린. 이 세가지 색이 어울려 품어내는 은은한 아름다움은 저 멀리서도 가슴을 고동치게 했다. 아름다운 두오모. 필시 두오모는 아리따운 여인이다.

 돔위에서 바라본 광경은 또 어떠했는지. 오밀조밀 지붕을 맞대고 붙어있는 시가지와 저 멀리 보이는 올리브 그린색의 키큰 나무들(나무야 다 키가 큰 거 아니냐고 하겠지만, 늘씬하게 위로 쭉 뻗은 이탈리아의 나무를 본다면 누구든 불타오를 듯 하늘로 솟구치는 고흐의 나무가 떠오를 것이다. 그리고 당신이 남자라면 늘씬한 여인의 각선미를 보는 듯한 착각에 빠질 것이고), 나무 뒤로 보이는 이름 모를 성, 시내 오른쪽으로 흐르는 강과, 강과 시내를 이어주는 베키오 다리. 모두 인상깊고, 아름다워 두 눈에 꼭꼭 담았다. 눈을 뜨면 그 풍경이 그대로 쏟아져 내릴까 불안해서 감은 눈을 차마 뜨지 못하겠더라. 멋진 두오모... 이 곳에서만 하루 종일 있을 걸 지금에서야 후회된다.

베키오 다리는, 목조 다리에 돌벽을 쌓은 형상. 다리 양옆에 보석상이 즐비해 관광객의 눈과 발을 붙잡는다. 오디세이가 싸이렌의 노랫소리에 사로잡혔던 것처럼 우리는 보석상 쇼윈도에 꼭 쳐박혀서 크리스마스 선물을 갈망하는 어린 아이처럼 이 물건 저 물건을 손가락질 했다. 그렇게 보고 또 봐도 어차피 내 것이 될 수 없는 것인데도. 물욕이 엄청난 세 여자였던지, 아니면 보석이란 본래 그렇듯 없던 욕심도 생기게 하는지 모르겠지만 그 순간 만큼은 보석털이 전문도둑이라도 되고 싶었다. 덕분에 베키오 주변 풍광은 별로 기억나지 않고 크고 찬란했던 보석만이 떠오른다.

다음날, 피티 궁전과 보볼리 정원을 찾았다. 궁전과 성당을 하도 많이 봐서인지 그다지 인상깊지 못했다. 궁전은 어딜가도 똑같아 보이고, 비오는 날 차분하게 가라앉은 정원만이 새침한 이미지로 남아있다. 일정은 짧은데 미처 돌아보지 못한 '미켈란젤로 언덕' 생각에 속상하고 착잡했던 마음뿐. 그곳에 꼭 한번 올라가보고 싶었지만 짧은 일정에 그것까지 넣기는 무리였다. 여행이 점점 극기훈련을 닮아간다. 싫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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플라시보 2004-03-29 17: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여행기 잘 읽고 있습니다. 여기서 인터넷을 들어가 클릭 몇번 만으로 님의 수고스러운 여행을 간편하게 수혈받아도 되는 것인지... 그래도 이렇게 잊지않고 올려주시는 여행기에 늘 감사합니다. 건강도 챙기시고 부디 많이 보고 느끼시길...

zooey 2004-03-29 21: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네, 미켈란젤로의 들판(or 언덕? 광장?), 꼭 가보고 말씀드릴께요. 저는 피렌체에 3일 반 정도 있을 거라 넉넉히 둘러보게 될듯 싶어요.(중간에 하루는 빼어 시에나에 갈 예정) 성혜씨, 나 여행갔다오면 봅시다. 나머지 일정 잘 보내구요. (음, 보고싶네요. ^^)
 

퐁 마리를 건너, 베르틸롱 아스크림을 사먹는 것으로 이날의 여정은 시작되었다. 나무딸기맛 아이스크림을 먹었는데, 새콤한 맛이 시원했다(뭐, 아이스크림은 원래 시원하지만 -.-) 관광객이 한번은 꼭 찾는 정통한 아이스크림 가게라고 했는데, 아침시간이어선지 파리지앵들이 포장주문해 가는 모습을 더 눈에 띄었다.

김민수 교수가 그토록 칭찬해 마지 않았던 '마음이 담긴 건축의 표본' 강제 수용소 희생자 기념관은 매우 소담했다. 사진으로 볼 때는 꽤 너르고 큰 곳이라고 생각했는데... 그리고 세느 강변을 내려다보며 슬픈 표정을 짓고 있는 여인이 인상적이라는데, 그 여인상은 어디 있는지 찾지를 못하고... 하릴없이 기념관 안만 기웃기웃. 작은 시골 돌길을 걷는 듯한 좁은 입구와 희생자의 넋을 기리는 타이포그래피가 기억에 남는다.

요한 23세 광장과 노트르담은 전날 가보았기 때문에 숑숑 건너띄고 프랑스 대법원으로 직행. 대법원 바로 옆에는 생뜨 샤뺄(Saint Chapelle) 성당이 있어 그곳을 보기 위해 들렸다. 대법원 마당 안쪽 구석에 높이 솟은 이 성당은, 스테인글라스가 무척 아름다웠다. 이중 720여 장면은 파리에서도 가장 오래된 스테인드글라스라는데, 그랬거나 어쨌거나 노트르담보다 여성스러운 것이 훨씬 인상적이다. (하지만 스테인드글라스만 보자면 밀라노의 '두오모'가 더 아름답지 않았을까?)

루브르 박물관 드농관을 관람하고, 유리 피라미드 앞에서 비둘기들과 함께 점심을 먹다. 바람이 너무 불어 추웠던 기억과 초콜렛 무스가 너무 달아서 두 입을 베어먹고 그만 둔 기억, 개선문+루브르+유리 피라미드가 한 눈에 들어오는 장소라 기념삼아 사진을 몇 장 찍은 기억뿐이다.

루브르는 드농관만 보았으나, 다시 또 들어갈 염두가 나지 않는 너무나 방대한 미술관. 수틴의 빨간 그림이 가장 기억에 남는다. '모나리자'는 신비스런 웃음을 짓고 있었고, '민중을 이끄는 자유의 여신'은 지치지도 않고 여전히 대오를 지도하고 있었으며, '나폴레옹 황제 대관식'은 성대하게 치뤄지고 있었다는 것...이것이 눈으로 확인한 모든 것. 아무 감동없이 발만 재빨리 놀리다 나온 곳이다. 이렇게 볼 거라면 차라리 안 보지 게 낫겠다는 생각이 물씬물씬. (휴.. 아주 피곤한 곳, 꿈에 나올까 무섭다)

까루젤 개선문을 통과해 (라 마르세이유가 가장 유명한 조각이라는데, 도대체 어떤 면에 있는 것인지 사진과 아무리 비교해봐도 찾지 못하겠더라.. 장님 문고리 만지는 것이 이런 기분일까. 벙벙한 여행에 아주 지쳐버림) 뛸릴리 정원 호수가에서 한가롭게 쉬다가, 꽁꼬르드 광장을 통해 밖으로 나왔다. 이집트에서 선물로 주었다는 '오벨리스크'만이 갑자기 퍼붓는 비바람을 피하지 않고 오독하니 서 있었다.

일정 짤 때부터 일요일 일정이 맘에 들지 않고, 별로 가보고 싶지도 않더니 역시나 나를 두 번 죽이는 괴로운 여행길이었다. 내 마음 탓이었을까, 날씨 탓이었을까? 아니면 너무 무식하게 전시해놓고 게다가, 복제품을 보여주면서 돈을 챙겨먹는 프랑스가 미웠기 때문일까? 지들은 훔쳐와 놓고 나한테는 돈내고 보라니, 그건 무슨 개같은 경운가. 차라리 장식미술관에나 갈걸 후회된다.

밤기차로 이탈리아 피렌체에 넘어갔다. 1등석 침대칸을, 이탈리아 할머니&17살 먹은 늙은 개와 함께 이용했다. 잠만 자느라고, 검표원이 다녀간지도 몰랐다. 그러나 늙을 대로 늙은 개가 밤새 앓는 소리만큼은 꿈결에도 들렸던 듯. 아침에 개의 주검을 보는 건 아닌가 다소 공포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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