행복한 페미니즘 / 벨 훅스, 백년글사랑 펴냄

<행복한 페미니즘>(백년글사랑 펴냄)의 지은이이자 미국의 급진적 흑인 페미니스트인 벨 훅스는 페미니스트는 모든 사람을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1990년대에 대학을 다녔던 기간 내내 나는 페미니스트였던 선배들과 동료들에게서 ‘여성해방’이 곧 ‘인간해방’이라는 이야기를 들었다. 그것은 마치 ‘노동해방’이 ‘인간해방’의 일부라는 말처럼 내게는 자연스런 진실로 느껴졌다. 벨 훅스의 페미니즘에 대한 정의 역시 이런 관점과 동일선상에 있다. “간단히 말해, 페미니즘은 성차별주의와 성차별주의에 근거한 착취와 억압을 종식시키려는 운동이다.” 요컨대 성차별주의가 문제라는 것이다.

성차별주의적 착취와 억압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하나 일단 ‘계몽’의 과정이 필요하다. 이 생각을 실천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기본전제가 필요하다. 첫째, 남성지배사회에 남성으로 태어난 ‘나’는 일단 기득권자라는 사실에 ‘동의’해야 한다. 둘째, 거기에 ‘부정’의 과정이 뒤따라야 한다. 일단 내게 주어진 유형무형의 남성으로서의 기득권을 기꺼이 포기하는 자세를 가져야 한다. 이 ‘동의와 부정’의 전제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여야 성차별주의적 착취와 억압을 지양하기 위한 최소한의 ‘실천’이 성립될 수 있다고 나는 생각했다.

그런데 현실 속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그것은 체화된 남성으로서의 나의 ‘무의식’은 끈질기고 견고한 반면, ‘의식’으로서의 ‘신념’은 풀잎사귀처럼 자주 흔들렸기 때문이다. 페미니스트를 자처하는 극소수의 여성 동료들로부터 간간이 제기된 비판도 나를 흔들리게 했다. “아무리 노력해 봐라. 너의 본질은 남성이니까.” 이런 비판은 마초인 남성 동료들에게서도, 페미니스트인 여성 동료들에게서도 동시에 들려왔다. 남성 동료들의 비판을 들으면서, 나는 비록 순간적이기는 하지만 ‘남성 지배사회’라는 기득권에 투항하고 싶다는 유혹을 느꼈다. 여성 동료들의 비판을 들으면서 나는 남성이 페미니스트가 된다는 것이 어쩌면 불가능한 것인지도 모른다는 또 다른 순간적 절망에 빠졌다. 이 ‘유혹과 절망’은 나의 내면을 뒤흔들었다.

그러나 벨 훅스의 지적은 그런 내 혼란을 멈추게 했다. 앞에서 내가 언급한 양극단의 사람들은, 그들의 발언이 비록 차별적인 맥락에서 나온 것이기는 하지만, 성이라고 하는 것을 본질주의로 수렴시킨다는 점에서는, 다 같은 성차별주의자라는 지적 때문이다.

“남성을 투쟁의 동지로 인정하기 싫어하는 페미니스트 활동가들, 남자들이 페미니스트 정치학에서 무어라도 얻는 게 생긴다면 여자들은 무어라도 잃고 말 거라는 비이성적인 두려움을 가지고 있는 페미니스트들은 페미니즘을 의심하고 폄하하는 대중의 입지를 자기도 모르게 강화시켜 왔다. 그리고 남성을 혐오하는 그런 여성들은 때때로 페미니즘이 더 이상 발전을 못하거나 말거나 남자들과 함께는 운동하지 않겠다는 입장을 취한다.”

이 밖에도 지은이는 <행복한 페미니즘>에서 페미니즘 운동 내부의 격렬한 논란거리를 거리낌없이 조명하고 있다. 대중적인 운동과 멀어진 강단 페미니즘의 폐해, 페미니즘 운동 지형 안에서의 계급정치의 문제, 인종주의와 동성애 혐오를 포함한 분리주의 경향, 가부장적 매스미디어의 가공할 문제점 등등. 이 책을 읽고 나는 또다시 자문해 보았다. 나는 과연 페미니스트가 될 수 있을까

이명원/ 문학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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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다 2004-01-31 11: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나는 가끔 남편과 남성을 배척하는 여성주의 운동에 대해 이야기하곤 한다. 내 스스로도 빠지게 되는 함정이기 때문에 남편의 말은 신선한 자극이 된다.

결론적으로 남편의 이야기는 '여성만 위하는 운동은 페미니즘이 아니다'란 건데, 그 근거는 이렇다. '성차'에 기반한 차별을 철폐하겠다며 '남성=적'으로 보는 감성적 운동방식은 거꾸로 남성을 차별하는 운동을 낳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남성=적'으로 몰고 갈 때, 페미니스트가 되겠다고 굳게 마음먹은 남자들은 갈 곳을 잃고 방황하게 되며, 구태어 '적'이란 소리를 들어가며 남성 무리로부터 빠져나올 마음은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결국 '여성만을 위한 페니미즘'이 함께하려는 남성들을 따돌리고 적대시함으로서 스스로 고립된다는 이야기였다. 이 말에 대해 전적으로, 그리고 심증적으로 동의하는 나는(그런 한편, 성차별이 일상화된 한국사회에서 여성들은 이런 적대적 태도를 가지기 쉽다. 나 또한 때때로 그러하므로. 그러나 차별의 당사자는 언제나 자신이 희생양이란 사실에 분노하므로, 분노의 화살을 '남성성'이라는 엉뚱한 방향으로 돌리기도 한다. 한마디로, 분노는 이성을 잃게 만든다.) 이명원의 글을 읽었을 때, 또다시 고개를 끄덕거렸다.

참고로 벨 훅스의 <행복한 페미니즘>은 여자든, 남자든, 전업주부든, 커리어우먼이든, 인종적으로 차별받는 사람이든 누가 읽어도 좋은 멋진 책이다. 알라딘 편집자 추천도서기도 하다. 함께 볼만한 책으로는 <따로와 끼리-남성 지배문화 벗기기>(정유성 지음, 책세상 펴냄)가 있다. 이 책에 붙은 마이리뷰 "함께 빠져 나오지 않을래요?"(나의추억 님의 리뷰)는 정말 잘 쓰셨다.

유희가객 2004-02-04 1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마눌~
어떤 형태든 목적이든간에 "인종주의적" 차별은 그 자체로 죄악이야~!!
그건 여자니까.. 하는 것처럼... 남자니까.. 하는 거랑 다르지 않은거잖아.

그리고, NIMBY 가 절대로 환경운동이나 생태주의적으로 수렴할 수 없듯이,
적대적 페미니즘은 결코 다 같이 평등하게 잘 살자는 방향으로 움직일 수 없거덩.

세상이 거시기한 관계로, 지금은 '서방'이 좀 더 기득권을 갖고 있는건 분명하지만
내 그걸 하루에 한가지씩만 포기하도록 하지.
한번에 포기하기엔, 아무래도 살아온 시간이 너무 긴 듯도 싶고
아직은 좀 미숙한 마초 근성도 있는듯 싶으이~

이상. 예쁜 마눌의 잘난 서방이었음다~!!(ㅎㅎㅎ)