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 걸렸나봐. 비만 오면 정신을 놓아버리는 병. 아침부터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동료가 불러서 깜짝 놀라고,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그래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있어. 몸은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저기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느낌. 눈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귀는 자꾸만 빗소리를 향해 있어. 비 듣는 소리가 계속 마음을 울려.



이런 날엔 시골 집 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어.



정희준 선생님이 쓴 프레시안 기사를 읽다가 울음을 참느라 힘들었어. 왜 하필 이런 날에 이 기사를 읽은 걸까. 해고당한 아빠가 파업 때문에 몇 달째 집에 들어오지 못하자, 가족을 그릴 때 아예 아빠를 빼고 그리는 아이.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아빠 걱정, 병원비 걱정을 하는 아이. 아이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아빠. 사원 아파트에서 쫓겨날 상황에 처한 가족을 걱정하며 우는 엄마.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자 옆에서 같이 우는 또 다른 엄마들. 방송을 진행하는 정희준 선생님도 울고, 방송 작가도 울고, 카메라 맨도 울고 다 같이 울었다는 얘기를 읽으며 나도 눈물이 나와서 눈 앞이 흐려졌어.



이런 날엔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맘껏 울어보고 싶어. 
 

김주익 열사가 목숨을 바친 85호 크레인에는 김진숙 선배가 175일째 버티고 있어. 강제집행에 들어간 회사 덕분에 전기도 끊기고, 식사도 끊기고, 용변통조차 비우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김진숙 선배는 내려갈 생각이 없어보여. 35미터 높이에서 선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너진 왜관철교. 붕괴된 상주댐. 퍼붓는 비 덕분에 4대강 공사현장에는 악몽같은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되겠지. 아름다운 제주 강정 마을은 계속 파헤쳐질거야. 쌍용차 동지들의 자살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 앞으로도 수 많은 비정규직들의 눈물이, 그 가족들의 피눈물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될거야. 그들이 눈물을 흘릴때마다 누군가는 돈잔치를 벌릴테고, 사람들은 자기 사는 일이 바쁘다고, 신경쓰지 않을거야. 슬픈 일은 이렇게도 많은데,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는 바쁜 일상이 반복되고 있어.

비를 맞으며 울고 있으면, 얼굴에 떨어지는 비 덕분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거야. 이런 날엔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냥 걷고 싶어. 발길 닿는대로 그저 걷고 싶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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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1-06-29 17:27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30 16:03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6-30 20:1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4:19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4:18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4:20   URL
비밀 댓글입니다.

루쉰P 2011-06-30 09:4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비 오는 그 비보다 더 차갑고 슬픈 것이 현실이라니 너무 마음 아퍼요. 이 비가 모든 설움을 씻어 낼 수 있는 비였으면 합니다.

감은빛 2011-07-01 11:47   좋아요 0 | URL
원래 소설보다 더 소설같은 게 현실이라고 하죠.
영화보다 더 영화같은 게 현실이구요.
비가 설움을 씻어 줄수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비 덕분에 4대강 공사현장에 막대한 재앙이 닥치고 있으리라고 예상됩니다.

2011-06-30 20:52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1-07-01 11:48   URL
비밀 댓글입니다.
 
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 ‘서울의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4
정해구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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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렸을 때였다. 외갓집에 가면 또래가 아무도 없었다. 나와 동생은 늘 심심했다. 당시 아직 미혼이었던 외삼촌들은 어린 조카들과 놀아주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 작은 방에서 외삼촌들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기를 즐겼다. 내가 자주 읽었던 책은 아주 두꺼운 <세계인물사전>과 <한국인물사전>이었다. 거기엔 소위 위인들이라고 불리는 아주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나폴레옹’이라던가 ‘링컨’이라던가 ‘아인슈타인’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많은 이야기가 실려 있었고, 비교적 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분량이 적었다. 방학이 되면 며칠씩 머물곤 했던 외갓집에서 나는 늘 이 두꺼운 책들을 뒤적이며, 좋아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외우고, 상상하곤 했다.

어린 나에게 역사는 그렇게 위인들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조금씩 역사를 배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도 역시 왕이나 장군 같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위주로 역사를 가르쳤다. 나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았다. 열심히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역사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소위 ‘운동권’ 선배들에게 ‘학습’을 받기 시작하면서였다. 내가 배워온 역사라는 게 사실은 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중에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나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런 건 제대로 된 역사가 아닐 텐데,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 역사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과거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만금에서 방조제 건설현장에서 용역깡패들과 맞서면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해 경찰 폭력에 맞서면서, 한미FTA 반대를 위해 전경들과 맞서면서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다. 이 나라는 과거 역사에서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문장이 있다. 한국근현대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나온 말이다.

“1945년 9월 9일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이로써 38선 이남에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8월 15일을 해방의 날로, 광복절로 기억하고, 부르지만, 사실이 아니다. 단지 지배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날 이후로 우리나라는 표면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친일파들이 친미주의자들이 되어, 또다시 이 땅의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지배했다. 그들은 독재자들이었으며, 학살자들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이승만은 박정희를, 박정희는 전두환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땅의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2011년 지금을 살아가는 민중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제시대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다.

이 책은 10.26 사태로 인해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주도권을 잡은 시기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80년대의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책의 제목에서처럼 가장 주요하게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라는 기획의도처럼 그리 어렵지 않다. 제목이 딱딱하다고 해서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교과서에 나오는 편협한 시각이 아닌, 제대로 된 시각으로 80년대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펼쳐들어 볼만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5월이었다. 광주 항쟁 31주년이 지났을 때였다. 배우 김여진이 전두환을 학살자라고 부른 때였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해질녘 망월동 묘역의 스산한 풍경과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면서 늘 골프를 치러 다니는 전두환. 그리고 막대한 재산으로 거대한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는 전재국의 시공사가 생각난다. 그리고 최근에는 강풀의 만화 26년이 생각난다. 앞으로 언제까지 학살자와 같은 하늘아래 살아가야할지 모르지만, 언제까지 그 개기름 흐르는 얼굴로 골프나 치러 다니는 꼴을 봐야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고 싶다.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한 대가로 권력과 부를 가진 그들이 더 이상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날이. 더 이상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는 날이. 더 이상 더러운 돈으로 만들어지는 시공사의 책들이 판매되지 않아서 전재국이 망하는 날이.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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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1-06-28 12:0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저만 그렇게 아니었군요, 저도 초딩 때 또래 아이들과 다르게 인명사전을
즐겨 읽었어요. 재미있는 건 위인전보다는 짤막히 인물의 약력을 소개된 인명사전을
좋아했어요 ^^;;

그 전에 감은빛이 주신 한국 현대사 관련 책을 읽으면서 우리나라의 현대사에 대해서
잘못된 편견과 인식을 고치려고 하고 있어요. 생각보다 역사를 잘못 알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어요. 분명 저 말고도 저 또래 젊은 세대들도 그럴겁니다.
이 책도 그런 깨달음의 과정 중의 하나로써 꼭 읽어봐야겠습니다. ^^

감은빛 2011-06-29 14:08   좋아요 0 | URL
시루스님도 인물사전 즐겨 읽으셨군요.
아무래도 위인전보다 읽기가 좋죠.

일단 학교에서 거짓 역사를 가르치고 있으니,
제대로 된 역사를 알기가 쉽지 않죠.
시루스님께 도움이 되었다니 기쁘네요.

마녀고양이 2011-06-29 09: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대학 1학년 때
선배들의 권유로 읽은 책에서 받았던 충격이 생각납니다.
이제까지 알았던 역사가 전부가 아니었구나 다른 세계가 있구나 라는 깨달음,
감은빛 님과 완전 동일하네요. ^^

네, 현대는 과거의 역사 반영이라는 말씀 동감합니다. 그리고
우리의 허공에 붕 뜬 느낌은, 제대로 뿌리내리지 못 한 역사에 대한 통찰일지 모르겠습니다.
그래서 최근에 <해방 일기>를 구매했는데, 아직 손도 못 대고 있네요.

감은빛 2011-06-29 17:32   좋아요 0 | URL
고등학교때까지 학교에서 거짓 역사를 가르치니까
그런 일이 생길 수 밖에 없을 것 같네요.

<해방일기> 저도 찜해놓고 있어요.

루쉰P 2011-06-30 09: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맞아요. 저 역시 고등학교 시절 고종까지만 교육 받고 말았죠. 김대중 대통령이 전두환과 노태우를 사면한 것은 굉장한 일이기는 하지만 그들에 대한 재산의 추징은 아주 집요하게 했어야 했는데 그게 아쉬워요. 학교에서 배우는 교육이 진실을 알려야 하는데 학생들을 눈 뜬 장님으로 만드니 원... 시공사는 저 역시 절대 사지 않아요. 흥!! 천박한 것 들.

감은빛 2011-07-01 11:53   좋아요 0 | URL
일제강점기부터의 처절하고 아픈 역사는 늘 마음 한 켠을 무겁게 합니다.
그래도 올바른 역사를 알고 싶다는 욕구는 더 강해집니다.
이 책 읽으면서 참 많이 힘들었는데, 그래도 읽을 수 밖에 없었습니다.
 
종교, 이제는 깨달음이다 - 종교를 보는 새로운 시각, 심층종교에 대한 두 종교학자의 대담
오강남.성해영 지음 / 북성재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장면 하나. 지하철 풍경

혼잡한 출근시간이었다. 늘 그렇듯 새벽까지 마신 술이 아직 덜 깬 상태였다. 손잡이에 몸을 기대고 멍하니 광고판을 쳐다보고 있는데, 할아버지 한 분이 저쪽 칸에서 이쪽 칸으로 건너오신다. 손에는 공손하게 성경책을 받쳐 들고 있다. 순간 나도 모르게 눈을 찡그렸다. 확 짜증이 올라왔다. 분명히 ‘예수 천국, 불신 지옥’을 설파할 모양새다. 아니나 다를까 뭐라고 하는지 잘 알아듣지도 못할 정도로 중얼중얼 거리며 열심히 사람들과 눈을 맞추고 있었다. 이럴 땐 음악이라도 들으면서 귀를 막아 버려야 맘이 편한 법인데, 젠장 오늘따라 엠피쓰리를 놓고 나왔다. 할아버지는 점점 더 가까이 다가오고 있었다. 가까워지는 모습을 보니 참 구경거리도 이런 구경거리가 따로 없다. 자리에 앉아 눈을 감고 있던 한 젊은 여성의 무릎을 건드리는 통에, 그 여성이 눈을 뜨고, 짜증 섞인 표정으로 째려봤는데, 할아버지는 오히려 혀를 차면서 자기 얘길 들으라고 한다. 그 여성이 뭐라고 하려다가 그냥 참고 다시 눈을 감아버리자, 이번에는 그 옆에 앉은 학생으로 보이는 남성에게 말을 붙인다. 그는 귀에 이어폰을 꽂고, 뭔가 책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할아버지 포기하지 않고, 책을 툭 쳐서 주의를 끈다. 그는 이어폰을 꽂은 상태 그대로 한번 째려보고는 다시 책으로 눈길을 준다. 할아버지 다시 혀를 끌끌 찬다.

그런 식으로 앉거나 선 사람들을 계속 건드리면서 다가온 할아버지가 마침내 바로 앞까지 접근했다. 나는 한번 심호흡을 하고, 나를 건드리면 남은 평생을 후회하도록 만들어 주겠다고 각오를 다졌다. 어느새 술이 깨고, 정신이 번쩍 든 느낌이다. 투지를 불태우고 있는데, 이 할아버지 나는 건드리지도 않고 그냥 지나친다. 어라! 이거 뭐야! 이러면 재미없는데....... 나만 지나친 게 아니라, 조금 덩치가 큰 아저씨도 그냥 지나친다. 이제 보니 이 할아버지 만만한 여성이나, 어려보이는(학생처럼 보이는) 사람들만 건드리는 것이었다. 다시 몇 명의 여성들을 더 건드린 할아버지는 다음 칸으로 넘어가버렸다.

장면 둘. 친한 친구들

어려서부터 주위에 교회에 다니는 친구나 동생들이 많았다. 대부분의 경우 부모님 손에 이끌려 어려서부터 교회를 다니게 된 사람들(이런 걸 모태신앙이라고 한다는 얘길 들었다.)이 많았다. 나도 그런 친구들 덕분에 여러 교회를 구경 다니게 되었다. 그런데 아무리 교회를 자주 놀러가도 신의 존재를 믿을 수는 없었다. 오히려 목사님의 설교나 나를 설득시키려는 어른들의 태도 때문에 더더욱 신의 존재를 의심할 수밖에 없었다. 들으면 들을수록 의심스러운 이야기만 들려주는 곳이 바로 교회였다. 그렇게 시간이 지나서, 고등학교 때였다. 정말 친하게 지냈던 한 친구와 독서실에서 밤새 종교에 대한 토론을 했다. 그 친구는 내가 교회에 다녀서 주님의 선한 양이 되기를 바랬고, 나는 그 친구가 교회라는 허황된 집단에서 벗어나 참된 자신의 삶을 살아가기를 원했다. 나는 신의 존재를 믿은 적은 없지만, 친구들을 따라서 교회는 열심히 들락거렸기 때문에 성경에 대해 주워들은 이야기가 많았다. 성경과 역사적 사실에 대한 둘의 대화는 끝을 모르고 이어졌다. 마침내 밤을 꼴딱 새우고 아침을 맞았을 때, 우리는 서로를 설득시킬 수 없음을 깨달았다. 그때까지 그렇게 친했던 친구가 그날 이후로 멀어졌다.
그 후로도 여러 번 그런 일이 있었다. 이상하게 조금 친해지고 나면 교회에 데려가고 싶어 하는 친구들이 주변에 많았다. 나중에는 교회에 열심히 따라다니곤 했다. 교회에 가서 기타도 치고, 축구도 하고, 연극도 하고, 여학생들도 만났다. 자주 따라가다 보면 세례나 침례를 받기를 강요하는데, 그때쯤 되어서 발길을 끊어버리곤 했다. 그리고 당연히 그 친구와의 관계도 끊어지곤 했다. 이 책을 읽으며 그렇게 나를 스쳐갔던 여러 명의 친구들이 떠오른다.

장면 셋. 아내와의 대화

지금은 아내와 그런 대화를 일부러라도 잘 안하지만, 초기에는 종교에 대한 대화를 자주 나누곤 했다. 처가 식구들은 독실한 기독교인이다. 주말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교회에 가야하고, 십일조도 꼬박꼬박 내야 한다. 아내는 기독교를 무척 싫어하고, 정확히 불교를 믿는 건 아니지만, 불교에 가까운 어떤 신앙을 믿는다. 한때 인도에서 전해져 온 명상을 열심히 했던 영향인 것 같다. 어쨌든 아내는 무언가 믿는다. 나는 신이라는 존재 자체가 없다고 본다. 신을 믿지 않으므로 종교라는 것을 가질 수 없다. 종교는 인간이 만들어 낸 하나의 지배 수단이라고 본다. 아내와 부딪힌 건 바로 이 지점이다. 간단히 서로의 입장만 확인했다면 좋았을 텐데, 고등학교 때 친구와 밤새 토론했던 날 못지않게 열을 올리며 서로의 주장을 굽히지 않았다. 결국 서로 감정이 상할 때까지 자기주장만 우기다가 결론도 내지 못하고 그냥 이야기는 끊겼다.

결론. 깨달음

환경운동을 하면서 큰 싸움이 벌어질 때마다 늘 종교인들이 함께하는 모습을 보아왔다. 새만금 때는 4대 종단(천주교, 불교, 기독교, 원불교)의 수경스님, 문규현 신부님 등 큰 스승님들께서 새만금에서 서울까지 3보1배를 했다. 지율 스님은 목숨을 건 단식을 여러 차례 해왔고, 도법스님께서는 ‘생명평화결사단’을 만들어 전국 방방곡곡을 걸었다. 평택과 용산에서는 문정현 신부님께서 늘 함께 계셨다. 환경단체에 들어오기 전까지 나는 종교가 쓸모없는 것이라고 여겼다. 아니 오히려 자본과 권력에 결탁하여 지배 구조를 더 견고하게 하는 장치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제 몸을 돌보지 않고, 앞장서서 행동하는 큰 스승님들을 가까이서 보면서 점점 생각이 바뀌었다. 물론 지금도 그 분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 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종교적인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책 덕분에 다시 한 번 더 깨달았다. 무교 혹은 무신론자라고 하는 것도 하나의 큰 편견이자, 근본주의자들과 별 다를 바 없는 모습이라는 사실을 알게 되었다. 나는 앞으로도 종교를 가질 생각은 없지만, 존경할만한 종교인들에 대해서는 더 알아보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 지금까지는 종교라는 것에 아예 관심이 없었지만, 한국 사회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종교에 대해 좀 더 알아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몇 가지 미처 생각해보지 못했던 부분들을 잘 짚어주었다. 대화 형식이라 술술 잘 읽히는 것도 장점이다. 읽다 말고 한동안 미뤄두고 있었던 오강남 선생의 <세계 종교 둘러보기>도 마저 읽어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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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22 10:1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 너무 공감되는 구절이 있네요.
'그 분들이 종교를 믿는 이유를 이해할 수는 없지만 그분들의 숭고한 정신이 종교적인 힘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라는 문구. 결국 종교의 문제가 아니라 사람의 문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합니다. 종교라는 테두리가 일을 더 커지게 하기는 하지만, 사람마다 받아들이는 방식이 다르잖아요.

제 절친은 독실한 기독교이고, 저를 보면 좀더 어릴 때 교회 데리고 갔어야 하는데 하면서 혀를 찹니다. 하지만 어떤 날은 '종교를 가지지 않은 사람은 더 강한 사람이라는 생각을 하게 돼. 무엇인가 필요없이, 자신을 믿음으로 삶을 살아갈 수 있다는 거잖아' 라고도 말합니다.

그래서 제 절친인거 같습니다... ^^

감은빛 2011-06-23 12:28   좋아요 0 | URL
공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종교에 대한 대화는 참 어려운 것 같아요.
마녀고양이님의 친구분께서 그래도 열린 생각을 갖고 계시네요.
이 책에서도 그렇게 '열린 사고'를 강조하고 있어요.

꼬마요정 2011-06-22 13:1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어릴 때부터 절 교회 델꼬 가려는 사람이 많았어요. 몇 번 가기도 하고 믿어보려고 노력도 했는데 결국 안 됐지만요.. 저는 불교신자에요. 불교에 신자를 붙이기가 좀 그런데 그래도 뭐 절에 다녀요. 힘들 때 많이 도움도 받았구요.

남자친구는 무신론자에요. 제 종교를 강요할 생각은 없지만 한번씩 부딪치는 때가 있어요. 이 책 읽어보면 보다 슬기롭게 해결할 수 있겠죠? 종교 문제는 너무 어려워요.

감은빛 2011-06-23 12:30   좋아요 0 | URL
네, 종교 문제는 참 어렵습니다.
글에도 썼지만, 저도 늘 주위사람들과 종교 문제로 부딪치는 경우가 많았어요.

이 책이 그런 문제에서 약간의 도움을 드릴 수 있을 것 같습니다.
특히 저와 같은 무신론자 이신 남자친구에게 더 도움이 될 수 있겠네요.

양철나무꾼 2011-06-22 15: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종교 서적은 한귀로 읽고(?) 한귀로 흘려버리는 경향이 있는데...
몇몇 분들 이현주 목사님이나 오강남, 장일순 님 등 심취해서 읽는 경우가 있어요.

이 책, 저도 좋았어요~^^

감은빛 2011-06-23 12:32   좋아요 0 | URL
저도 최근까지는 종교에 대한 책에 아예 관심이 없었어요.
그래도 오강남 선생님 책은 재미가 있는 것 같아요.

'이 책, 저도 좋았어요'라는 마지막 한마디가 왠지 기분 좋게 들려요! ^^

루쉰P 2011-06-22 22:5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종교에 대한 부분은 굉장히 어려운 측면이 있는 것이 사실입니다. 전 종교를 믿는다고 한다면 그 사상에 자신을 합치시켜 삶도 만들어서 완성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주의자이거든요.
다른 사람의 불행 위에 자신의 행복을 쌓는자는 망하고 만다는 것이 만고불변의 진리이지 않을까 생각해요. 전 마르크스주의자이거든요. ㅋ
종교란 것...파고 들면 끝이 없을 것 같아요. 그래서 두려운 부분이기도 하구요. ^^ 왠지 저는 근데 컬트 종교 쪽에 빠질 것 같다는 인상이다 혹은 교주적 기질이 보인다 라는 평가를 많이 받아요. -.-

감은빛 2011-06-23 12:35   좋아요 0 | URL
어떤 하나의 단어로 자신을 규정짓는 다는 거 쉽지 않은 일인거 같아요.
저는 '빨갱이', '무신론자', '맑스주의자', '사회주의자' 등으로
규정지을 수 있을텐데,
그런 규정이 또다른 의미에서는 완전한 왜곡이 될 수 도 있죠.

교주적 기질이 보인다는 말, 그만큼 카리스마가 대단하다는 뜻이겠죠?
루쉰님의 카리스마가 부러워지네요!

루쉰P 2011-06-27 14:22   좋아요 0 | URL
ㅋㅋ 감은빛님은 맑스주의자라 저랑 뭔가 평행이론 -.-

교주적 기질과 연관되는 것은 카리스마가 아니라 광인 기질이 있어 보인다는 최측근의 증언이 있었습니다. -.- 그게 카리스마라고 한다면 어떻게 해야 할지? 감은빛님은 너무 칭찬만 해 주셔서 제 얼굴이 붉어져요. 크흑!!

비로그인 2011-06-24 22:3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살에 닿는 부분이 있어 그냥 쉬이 지나치기 힘드네요.
전, 너무 가치판단 없는 교화로 흐르는 주장들은 듣기 거북하더라고요. 교육학 문제에 단골로 등장하는 문제죠? ㅎ 교육과 교화의 차이..

감은빛 2011-06-29 13:18   좋아요 0 | URL
가끔 궁금해요.
저 수많은 교회에, 저 수많은 신자들이
과연 진심으로 '신'을 믿는 걸까?

어떻게 그런 일이 실제로 벌어질 수 있는지 정말 궁금해요.
 
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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절판




고등학교 때였다. 내 공책에는 과목명이 없었다. 대신 ‘샬롯테’, ‘알리사’, ‘엘리자베스’, ‘안나’, ‘제인’, ‘테스’ 등의 여자 이름이 적혀있었다. 감명 깊게 읽었던 문학작품의 여주인공들 이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 속에서 그들과 사랑에 빠져보기도 했고, 그런 사랑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공책에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린 마음에 ‘나 이만큼이나 읽었어!’라는 허영심도 분명히 있었다. 친구들은 물론 매우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몇 책들은 매우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지만, 어떤 책들은 크게 공감하지 못하고 그냥 억지로 읽거나, 아예 읽다 말고 그만둔 책들도 있었다. ‘테스’의 경우는 어땠을까? 대략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서, 분명히 다 읽긴 했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좋았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읽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건 테스라는 매력적인 여성에게 한동안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 나는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이나, 주위 여고생들보다는 이런 문학작품 나온 여주인공들에게 더 빠져들곤 했다. 특히 테스의 아름답고 풋풋한 시골처녀의 이미지는 한창 혈기왕성한 소년의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여, 황홀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누군가 물으면 ‘좁은 문’에 나오는 ‘알리사’가 이상형이라고 말하고, 제롬과 알리사처럼 서로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늘 테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주인공 테스와 그 마을 사람들은 사투리를 쓴다. 번역자가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일부러 사투리로 번역을 했다고 한다. 처음 읽을 때에는 사투리가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익숙하지 않은 지역의 사투리여서 더더욱 그랬다.(나는 처음에 전북지역 사투리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충청도 사투리라고 알려주셨다.) 읽다보니 어느새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더 이상 어색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번역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사투리의 억양을 떠올리려 애쓰며, 사투리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더니, 색다른 재미와 읽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만약 <좁은 문>을 사투리로 번역한다면 어떨까? 알리사의 차분하고 단아한 느낌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만약 알리사가 전라도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면 완전히 다른 느낌일 것이다. 만약 <오만과 편견>의 이지적인 느낌의 엘리자베스가 강원도 사투리를 쓴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책을 거의 다 읽을 때쯤, 나는 테스의 사투리를 따라 읽다가 문득 김유정의 ‘동백꽃’이 생각났다. 비록 사용하는 사투리는 완전히 다르지만, 어쩐지 점순이와 테스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제 ‘동백꽃’을 다시 한 번 찾아 읽으며 점순이와 테스가 왜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지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러 책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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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2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스는 여자보다는 남자분들이 더 좋아하시는거 같아요.
전 테스 읽고, 정말 싫었거든요. 아 멍청해 이러면서요.
저만 그런지 몰라도, 같은 여자로서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기억이 있어요. 아하하.

감은빛 2011-06-23 12:17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제가 좋아한 테스는 그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아름답고 순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6-2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옛날에(저 고딩 때)예총회관에서 안옥희라는 분이 테스에 대해서 열강하는 걸 듣고 한때 테스에 심취했었어요.
테스, 남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여자들이 좋아하기 힘든 캐릭터죠~^^

감은빛 2011-06-23 12:19   좋아요 0 | URL
예총회관이란 단어를 들으니 진짜 옛날 일일 거 같은데요. ^^
네, 여성들은 좋아하기 어려울 거라는 거 동감입니다.
요 위에 마녀고양이님께 답글로도 썼지만,
제가 좋아한 테스는 아름답고 순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입니다.

루쉰P 2011-06-2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여 주인공의 매력에 흠뻑 빠졌죠. 왠지 문학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습관은 저랑 통하시는 듯...^^
흠...그러나 저러나 감은빛님의 말씀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될텐데 말이죠. -.-

감은빛 2011-06-23 12:26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는 아직 못 읽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을 때 붙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요. 문학이나 영화, 음악을 통한 사랑은 현실의 사랑과는 다르죠.
잘 찾아보면, 분명히 좋은 분을 만나실 겁니다.
힘내세요! ^^
 
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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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기, 내기, 서울내기~♫ 새침때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괴기(고기)~♫’

아버지께서 어린 손녀와 장난을 치시다가, 새침때기 서울내기를 놀리는 노래를 불렀다. 서울내기인 우리 큰 딸은 금새 삐져서 울먹거렸고, 아버지는 다시 손녀를 달랬다. 나는 이 노래를 직접 불러본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여러번 들었던 노래다. 들을 때마다 궁금했던 건데, 왜 하필 고래고기가 나오는 걸까? 아버지께 여쭤봤는데, 돌아온 답은 ‘고래고기가 그만큼 맛있기 때문’이란다. 글쎄 서울내기와 고래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흰긴수염고래’라는 걸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몸 길이가 무려 30미터에 달하고, 몸무게가 150톤이나 된다는 이 거대한 생명체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별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린 내가 구할 수 있는 어떤 경로(책, 친구, 선생님, 부모님 등)로도 흰긴수염고래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냥 기억에서 잊혀졌다.

흰긴수염고래에 대한 관심은 인터넷 덕분에 다시 떠올랐다. 당시 어느 문학 동호회에 가입하라는 선배의 강요에 따라 동호회에서 사용할 필명을 짓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별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웬만한 단어는 대부분 기존 회원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단어가 ‘흰긴수염고래’였다. 어린 시절 경외감을 갖고 상상하곤 했던 그 거대한 생명체를 다시 떠올린 것이다. 당장 필명을 그것으로 정하고, 누군가 물어볼 때를 대비하여 좀 더 자세한 정보를 검색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조금 더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흰긴수염고래라는 필명은 이후 웬만한 온라인 카페 등에 가입할 때마다 사용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술고래’라고 바꿔 부르곤 했다. 나중에는 흰긴수염고래가 발음하기가 쉽지 않고, 또 술고래라고 불러대는 녀석들이 귀찮아서 다른 필명으로 바꿔 쓰게 되었고, 또다시 기억에서 잊혀졌다.

다시 흰긴수염고래를 만나게 된 건, 이 책을 통해서다. 캘리포니아 만에 사는 흰긴수염고래들을 20년 동안 관찰해온 다이앤이란 연구자는 고래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름을 붙여서, 누군지 다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만든 사진식별 카탈로그를 갖고 있었다. 주로 등지느러미의 색깔과 모양(뭉툭한 것, 굽은 것, 삼각형 등)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고 했다. 다이앤은 캘리포니아 만 근처에서 만나왔던 30여 마리의 고래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고래로 ‘250’이란 이름을 붙인 암컷에 대해 얘기했다. 250을 처음 발견했을 때, 데리고 있었던 새끼 ‘니냐’(소녀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그 새끼는 수컷이었음)를 데리고 있었던 얘기와 2년 후에 다시 두 번째 새끼인 ‘핀타’를 데리고 온 이야기. 그리고 나중에 세 번째 새끼를 보았을 때 ‘산타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나 신시아 모스의 코끼리 연구처럼 다이앤은 ‘친밀성’을 바탕으로 고래 연구에 좀 더 집중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캘리포니아 만을 거쳐 가는 수많은 고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사실은 그들 고래를 쫓는 고래 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고래의 삶과 고래 연구자들의 삶을 모성의 관점에서 풀어놓는다. 책을 펼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저자의 딸 ‘에스메’의 잠든 얼굴은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저자는 우리가 잘 몰랐던 고래의 삶에 대해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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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철나무꾼 2011-06-20 17: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요즘 서울내기=새침떼기에 '좀'민감해요,ㅋ~.

제가 요즘 어머니 병간호를 하는데...병실 환자랑 보호자들이 전부다 절 보고 서울 깍쟁이라고 해대는 통에 말이죠~

흰긴수염고래님~
이 책, 완전 시원해 보이는 걸요~

감은빛 2011-06-22 02:48   좋아요 0 | URL
흠 민감한 시기에 노래까지 불러서 죄송합니다! 꾸벅!

그런데 왜 갑자기 그런 소리를 들으셨을지 조금 궁금한데요. ^^

표지가 참 시원하죠?
표지만 보고, 속에 멋진 사진일 많을거라고 생각하시는 분들도 계시던데요.
안타깝게도 그렇지는 않더라구요.

하지만 내용은 꽤나 좋았습니다.

마녀고양이 2011-06-20 20: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ㅎㅎㅎㅎㅎㅎㅎㅎㅎ, 흰긴고래수염보다 술고래가 더 연상이 잘 되는군요!

고래 참 이뻐요, 매끈하고 영리하고. 우리랑 다르게 진화하여 적응하고.
그런데 고래 고기 저는 맛 없더라구요. 제 친가가 대구인데,
거기서는 고래 고기를 굉장히 높게 쳐주더라구요.
그런데 제가 맛없는 고기를 먹어서 그런가 별로. 음, 그래서
고래는 바다에 잘 살게 내버려두는 종으로 저는 정했답니다. 무분별한 남획, 슬프잖아요.

감은빛 2011-06-22 02:55   좋아요 0 | URL
아마도 술고래가 더 연상은 잘 되시겠죠? ^^
요즘은 체력이 딸려서 예전처럼 많이 마시지도 못하겠더라구요.
그러니 이젠 더이상 그렇게 불릴 일은 없을 듯 합니다.

저는 고래고기 맛있던데요.
기름이 좀 많아서 입맛에 안 맞으셨을지도 모르겠네요.
제가 알기로 고래고기는 부두 노동자들의 음식입니다.
하루 일당 받아서 노점에 앉거나 서서
따끈한 정종 한 잔에 고래고기 한점 집어 먹고 피로를 풀었죠.
서민 음식이었던 고래고기가 이제는 귀한 음식이 되어버렸죠.

물론 고래는 보호해야 할 대상입니다.
무분별한 남획은 당연히 안되죠!
그런 의미에서 일본은 정말 반성을 많이 해야 합니다!

루쉰P 2011-06-22 22: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아..제가 경외하는 대상이 무엇이었는지 모르겠네요. 팬더? 라고 할까요. 눈에 멍이 든 모습이 어린 시절부터 아프겠다라는 생각이 지워지지를 않아서 그런 기억이 있어요. ^^
아참 필명하시니 궁금한 건데 감은빛은 무슨 뜻이죠?

감은빛 2011-06-23 12:14   좋아요 0 | URL
팬더는 경외의 대상이라기 보다는,
아이들의 친구라고 할만큼 친근한 동물인 것 같은데요. ^^

감은빛이란 단어의 뜻을 궁금해하시는 분들이 많네요.

다음 국어사전에는 아래와 같이 나옵니다.
[명사] 석탄의 빛깔과 같이 다소 밝고 짙은 빛.

부연하자면, 검은 색을 가르키는 순 우리말 중에 하나입니다.
광택이 나는 짙은 검은색입니다.

김용호 2014-03-05 15:24   좋아요 0 | 댓글달기 | 수정 | 삭제 | URL
‘다마네기’, ‘고래고기’

아직도 제법 쓰는 말 중에는 ‘다마네기’(양파)가 있다. 일본어 사전에는 “タマネギ tamanegi[玉葱]”라고 표기되어 있어서 일본 고유어는 아닌 것으로 보인다. 어렸을 적에 이 말을 서울에서 전학 온 여자애를 놀린 용어로 많이 사용했던 기억이 난다.

‘서울내기 다마네기 맛좋은 고래고기’라고 운율을 넣어서 약을 올리며 놀린다. 요즈음의 가요로 따진다면 랩송에 가까운 것이다. 이 말이 왜 놀리는 뜻을 가지고 있는지, 왜 ‘다마네기’며 그 바로 뒤에 뜬금없이 고래고기가 왜 나오는지, 왜 저속어 취급을 받아야 하는지, 오랫동안 궁금하였다.



서울내기의 ‘내기’는 “그 지역에서 태어나고 자라서 그 지역 특성을 지니고 있는 사람을 뜻을 더하는 접미사.”이며, ‘출(出)’의 의미이다. 순전히 필자 개인의 생각으로 양파는 껍질을 벗겨도 자꾸 순백색의 껍질이 나오는 채소다. 급하고 명쾌한 경상도 성격에 비하여 속내를 잘 나타내지 않는 서울사람들의 특징을 빗대서 나타낸 것으로 본다.

그 다음이 바로 ‘맛좋은 고래고기’인데, 이 부분이 수상하다. ‘내기’와 ‘네기’로 대구(對句)를 맞추어 시작을 하였는데, 느닷없는 ‘맛’타령이다. 고래고기는 맛이 있다고 치자. 왜 하필 다마네기 다음에 ‘맛’타령 일까? 이 부분이 욕으로 간주되며, 저속어 취급을 받는 주된 요인으로 생각한다.

아니면, 고래고기는 다양한 부위에 따라 각각의 맛이 있다고 들었다. 그렇다면, 카멜레온 같은 종잡기 어려운 서울 여자애의 성향을 말하는 것은 아니었는가 하는 추측도 가능하다 하겠다.

김용호 저 <풀어보고 엮어보는 거제방언 사투리 > 한국문화사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