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에 걸렸나봐. 비만 오면 정신을 놓아버리는 병. 아침부터 빗소리를 들으며 멍하게 시간을 보내다가 동료가 불러서 깜짝 놀라고, 전화벨 소리에 깜짝 놀라면서 그래도 여전히 정신 못차리고 있어. 몸은 책상 앞에 앉아있지만, 마음은 저기 밖에서 비를 맞고 있는 느낌. 눈은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있지만, 귀는 자꾸만 빗소리를 향해 있어. 비 듣는 소리가 계속 마음을 울려.
이런 날엔 시골 집 마루에 앉아,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고 싶어.
정희준 선생님이 쓴 프레시안 기사를 읽다가 울음을 참느라 힘들었어. 왜 하필 이런 날에 이 기사를 읽은 걸까. 해고당한 아빠가 파업 때문에 몇 달째 집에 들어오지 못하자, 가족을 그릴 때 아예 아빠를 빼고 그리는 아이. 급성 맹장염으로 병원에 실려가면서도 아빠 걱정, 병원비 걱정을 하는 아이. 아이 얘기를 하다가 눈물을 흘리는 아빠. 사원 아파트에서 쫓겨날 상황에 처한 가족을 걱정하며 우는 엄마. 한 사람이 울기 시작하자 옆에서 같이 우는 또 다른 엄마들. 방송을 진행하는 정희준 선생님도 울고, 방송 작가도 울고, 카메라 맨도 울고 다 같이 울었다는 얘기를 읽으며 나도 눈물이 나와서 눈 앞이 흐려졌어.
이런 날엔 내리는 비를 하염없이 바라보며 맘껏 울어보고 싶어.
김주익 열사가 목숨을 바친 85호 크레인에는 김진숙 선배가 175일째 버티고 있어. 강제집행에 들어간 회사 덕분에 전기도 끊기고, 식사도 끊기고, 용변통조차 비우지 못하고 있지만, 그래도 김진숙 선배는 내려갈 생각이 없어보여. 35미터 높이에서 선배는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무너진 왜관철교. 붕괴된 상주댐. 퍼붓는 비 덕분에 4대강 공사현장에는 악몽같은 일들이 앞으로도 계속 되겠지. 아름다운 제주 강정 마을은 계속 파헤쳐질거야. 쌍용차 동지들의 자살은 언제까지 계속 될까? 앞으로도 수 많은 비정규직들의 눈물이, 그 가족들의 피눈물이 강이 되고, 바다가 될거야. 그들이 눈물을 흘릴때마다 누군가는 돈잔치를 벌릴테고, 사람들은 자기 사는 일이 바쁘다고, 신경쓰지 않을거야. 슬픈 일은 이렇게도 많은데, 눈물을 흘릴 여유조차 없는 바쁜 일상이 반복되고 있어.
비를 맞으며 울고 있으면, 얼굴에 떨어지는 비 덕분에 울고 있다는 사실을 들키지 않을거야. 이런 날엔 우산도 없이, 내리는 비를 맞으며 그냥 걷고 싶어. 발길 닿는대로 그저 걷고 싶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