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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두환과 80년대 민주화운동 - ‘서울의봄’에서 군사정권의 종말까지 ㅣ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 4
정해구 지음 / 역사비평사 / 2011년 5월
평점 :
어렸을 때였다. 외갓집에 가면 또래가 아무도 없었다. 나와 동생은 늘 심심했다. 당시 아직 미혼이었던 외삼촌들은 어린 조카들과 놀아주는 편은 아니었다. 나는 혼자 작은 방에서 외삼촌들의 책장에서 책을 꺼내 읽기를 즐겼다. 내가 자주 읽었던 책은 아주 두꺼운 <세계인물사전>과 <한국인물사전>이었다. 거기엔 소위 위인들이라고 불리는 아주 많은 인물들의 이야기가 실려 있었다. ‘나폴레옹’이라던가 ‘링컨’이라던가 ‘아인슈타인’처럼 유명한 사람들의 경우에는 많은 이야기가 실려 있었고, 비교적 덜 유명한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는 분량이 적었다. 방학이 되면 며칠씩 머물곤 했던 외갓집에서 나는 늘 이 두꺼운 책들을 뒤적이며, 좋아하는 인물들에 대한 이야기를 외우고, 상상하곤 했다.
어린 나에게 역사는 그렇게 위인들의 이야기였다. 그것은 학교에 다니면서 조금씩 역사를 배울 때에도 마찬가지였다. 학교에서도 역시 왕이나 장군 같은 위인들의 이야기를 위주로 역사를 가르쳤다. 나는 어렸을 때와 마찬가지로 그런 이야기들에 관심이 많았다. 열심히 선생님의 말씀에 귀를 기울이곤 했다.
역사에 대한 생각이 바뀐 건, 소위 ‘운동권’ 선배들에게 ‘학습’을 받기 시작하면서였다. 내가 배워온 역사라는 게 사실은 다 사실이 아닐 수도 있다는 생각을 처음으로 했다. 나중에 학원에서 아이들에게 역사를 가르치면서, 나는 계속 혼란스러웠다. 이런 건 제대로 된 역사가 아닐 텐데, 어떻게 하면 이 아이들에게 올바른 역사를 가르칠 수 있을까?
우리가 살아가는 현재는 과거 역사가 반영된 결과물이다. 오늘 우리가 이렇게 총체적으로 어려운 시기를 살아가는 이유는 단 하나다. 과거 역사를 제대로 평가하고, 이해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새만금에서 방조제 건설현장에서 용역깡패들과 맞서면서, 평택 미군기지 확장 반대를 위해 경찰 폭력에 맞서면서, 한미FTA 반대를 위해 전경들과 맞서면서 내내 머릿속에 들었던 생각은 단 하나다. 이 나라는 과거 역사에서부터 잘못된 길을 걸어왔다.
이 책을 읽으면서 떠오른 문장이 있다. 한국근현대사를 다룬 다큐멘터리에 나온 말이다.
“1945년 9월 9일 일장기 대신 성조기가 게양되었다. 이로써 38선 이남에선 미군정이 시작되었다.”
우리는 8월 15일을 해방의 날로, 광복절로 기억하고, 부르지만, 사실이 아니다. 단지 지배자가 일본에서 미국으로 바뀌었을 뿐이다. 그 날 이후로 우리나라는 표면적으로는 독립국이지만, 실제로는 독립국이 아니었다. 친일파들이 친미주의자들이 되어, 또다시 이 땅의 민중들을 착취하고, 억압하고, 지배했다. 그들은 독재자들이었으며, 학살자들이었다.
미군정은 이승만을, 이승만은 박정희를, 박정희는 전두환을 만들었다. 그들은 그렇게 이땅의 민중 위에 군림하면서 자신들의 권력과 부를 쌓아올렸다. 그리고 2011년 지금을 살아가는 민중들은 여전히 착취당하고, 억압당하며 살아가고 있다. 일제시대와 이승만, 박정희, 전두환의 독재시대와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 여전히 그들은 민중들의 피를 빨아먹으며 자신의 배를 채우고 있다.
이 책은 10.26 사태로 인해 유신체제가 무너지고, 전두환과 그 일당들이 12.12 군사반란을 통해 주도권을 잡은 시기부터 87년 6월 항쟁까지 80년대의 정치, 경제, 사회 현상을 다루고 있다. 그리고 책의 제목에서처럼 가장 주요하게는 민주화운동에 대해 다루고 있다.
책은 ‘청소년과 시민을 위한 20세기 한국사’라는 기획의도처럼 그리 어렵지 않다. 제목이 딱딱하다고 해서 미리 겁먹을 필요는 없다. 교과서에 나오는 편협한 시각이 아닌, 제대로 된 시각으로 80년대를 보고자 하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번쯤 펼쳐들어 볼만하다.
이 책을 읽기 시작한 때는 5월이었다. 광주 항쟁 31주년이 지났을 때였다. 배우 김여진이 전두환을 학살자라고 부른 때였다. 해마다 5월이 되면 생각나는 것들이 있다. 해질녘 망월동 묘역의 스산한 풍경과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면서 늘 골프를 치러 다니는 전두환. 그리고 막대한 재산으로 거대한 출판사와 서점을 운영하는 전재국의 시공사가 생각난다. 그리고 최근에는 강풀의 만화 26년이 생각난다. 앞으로 언제까지 학살자와 같은 하늘아래 살아가야할지 모르지만, 언제까지 그 개기름 흐르는 얼굴로 골프나 치러 다니는 꼴을 봐야하는지 모르지만, 언젠가는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고 싶다. 죄 없는 이들을 학살한 대가로 권력과 부를 가진 그들이 더 이상 머리를 들고 살지 못하는 날이. 더 이상 전 재산이 29만원 밖에 없다는 헛소리를 지껄이지 못하는 날이. 더 이상 더러운 돈으로 만들어지는 시공사의 책들이 판매되지 않아서 전재국이 망하는 날이. 그런 날이 오리라고 믿고 싶다. 그러기 위해서 한 명이라도 더 많은 사람에게 이 책을 권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