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버빌가의 테스 (양장) 문학동네 세계문학전집 72
토머스 하디 지음, 유명숙 옮김 / 문학동네 / 2011년 5월
평점 :
절판




고등학교 때였다. 내 공책에는 과목명이 없었다. 대신 ‘샬롯테’, ‘알리사’, ‘엘리자베스’, ‘안나’, ‘제인’, ‘테스’ 등의 여자 이름이 적혀있었다. 감명 깊게 읽었던 문학작품의 여주인공들 이름이었다. 책을 읽으면서 상상 속에서 그들과 사랑에 빠져보기도 했고, 그런 사랑을 동경하는 마음으로 공책에 이름을 붙였던 것이다. 그리고 사실 어린 마음에 ‘나 이만큼이나 읽었어!’라는 허영심도 분명히 있었다. 친구들은 물론 매우 재수 없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지금 생각해보면 몇몇 책들은 매우 재미있고, 감동적이었지만, 어떤 책들은 크게 공감하지 못하고 그냥 억지로 읽거나, 아예 읽다 말고 그만둔 책들도 있었다. ‘테스’의 경우는 어땠을까? 대략적인 내용은 기억이 나는 걸로 봐서, 분명히 다 읽긴 했던 것 같은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좋았다거나 하는 기억이 없는 걸로 봐선, 내용을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채, 그냥 읽었던 건 아닌가 싶기도 하다. 한 가지 확실한건 테스라는 매력적인 여성에게 한동안 푹 빠졌던 시절이 있었다는 사실이다.

사춘기 시절 나는 티비에 나오는 연예인들이나, 주위 여고생들보다는 이런 문학작품 나온 여주인공들에게 더 빠져들곤 했다. 특히 테스의 아름답고 풋풋한 시골처녀의 이미지는 한창 혈기왕성한 소년의 호기심을 마구 자극하여, 황홀한 상상의 세계에 빠져들게 만들었다. 누군가 물으면 ‘좁은 문’에 나오는 ‘알리사’가 이상형이라고 말하고, 제롬과 알리사처럼 서로를 아름다운 사랑을 하고 싶다는 말을 입에 달고 다녔지만, 속으로는 늘 테스가 가장 아름다운 여성이라고 생각하곤 했다.

이번에 새로 출간된 ‘더버빌가의 테스’에서 주인공 테스와 그 마을 사람들은 사투리를 쓴다. 번역자가 원작의 느낌을 잘 살리기 위해 일부러 사투리로 번역을 했다고 한다. 처음 읽을 때에는 사투리가 참 어색하게 느껴졌다. 특히 익숙하지 않은 지역의 사투리여서 더더욱 그랬다.(나는 처음에 전북지역 사투리라고 생각했는데, 누군가가 충청도 사투리라고 알려주셨다.) 읽다보니 어느새 작품 속으로 빠져들게 되었고, 더 이상 어색함을 느끼지는 못했다. 나중에는 번역자의 의도를 어느 정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실제 사투리의 억양을 떠올리려 애쓰며, 사투리를 소리 내어 읽어보았더니, 색다른 재미와 읽는 맛이 있었다. 그래서 궁금해졌다. 만약 <좁은 문>을 사투리로 번역한다면 어떨까? 알리사의 차분하고 단아한 느낌으로 기억되고 있는데, 만약 알리사가 전라도나 경상도 사투리를 쓴다면 완전히 다른 느낌일 것이다. 만약 <오만과 편견>의 이지적인 느낌의 엘리자베스가 강원도 사투리를 쓴다면 어떤 느낌일까? 그냥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왠지 웃음이 터져 나올 것만 같다.

책을 거의 다 읽을 때쯤, 나는 테스의 사투리를 따라 읽다가 문득 김유정의 ‘동백꽃’이 생각났다. 비록 사용하는 사투리는 완전히 다르지만, 어쩐지 점순이와 테스가 비슷한 느낌으로 다가왔다. 이제 ‘동백꽃’을 다시 한 번 찾아 읽으며 점순이와 테스가 왜 비슷한 느낌이 들었는지 한번 생각해봐야겠다. 그리고 또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러 책 속으로 들어가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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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녀고양이 2011-06-22 10: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테스는 여자보다는 남자분들이 더 좋아하시는거 같아요.
전 테스 읽고, 정말 싫었거든요. 아 멍청해 이러면서요.
저만 그런지 몰라도, 같은 여자로서 저렇게 되고 싶지 않다고 생각한 기억이 있어요. 아하하.

감은빛 2011-06-23 12:17   좋아요 0 | URL
네, 그렇죠.
제가 좋아한 테스는 그런 비극적인 삶을 살아가는 모습이 아니라,
아름답고 순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입니다.

양철나무꾼 2011-06-22 15:4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옛날에(저 고딩 때)예총회관에서 안옥희라는 분이 테스에 대해서 열강하는 걸 듣고 한때 테스에 심취했었어요.
테스, 남자들은 어떨지 몰라도 여자들이 좋아하기 힘든 캐릭터죠~^^

감은빛 2011-06-23 12:19   좋아요 0 | URL
예총회관이란 단어를 들으니 진짜 옛날 일일 거 같은데요. ^^
네, 여성들은 좋아하기 어려울 거라는 거 동감입니다.
요 위에 마녀고양이님께 답글로도 썼지만,
제가 좋아한 테스는 아름답고 순박한 시골 처녀의 모습입니다.

루쉰P 2011-06-22 22:5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전 <전쟁과 평화>를 읽으며 여 주인공의 매력에 흠뻑 빠졌죠. 왠지 문학 속의 여성을 사랑하는 습관은 저랑 통하시는 듯...^^
흠...그러나 저러나 감은빛님의 말씀처럼 살아있는 사람을 사랑해야 될텐데 말이죠. -.-

감은빛 2011-06-23 12:26   좋아요 0 | URL
<전쟁과 평화>는 아직 못 읽었습니다.
언젠가 시간이 많을 때 붙들어야 할 것 같아요.

그럼요. 문학이나 영화, 음악을 통한 사랑은 현실의 사랑과는 다르죠.
잘 찾아보면, 분명히 좋은 분을 만나실 겁니다.
힘내세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