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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인을 바라보다 - 우리가 모르는 고래의 삶
엘린 켈지 지음, 황근하 옮김 / 양철북 / 2011년 4월
평점 :
절판
‘내기, 내기, 서울내기~♫ 새침때기, 다마네기~♫ 맛 좋은 고래괴기(고기)~♫’
아버지께서 어린 손녀와 장난을 치시다가, 새침때기 서울내기를 놀리는 노래를 불렀다. 서울내기인 우리 큰 딸은 금새 삐져서 울먹거렸고, 아버지는 다시 손녀를 달랬다. 나는 이 노래를 직접 불러본 적은 없지만, 어려서부터 여러번 들었던 노래다. 들을 때마다 궁금했던 건데, 왜 하필 고래고기가 나오는 걸까? 아버지께 여쭤봤는데, 돌아온 답은 ‘고래고기가 그만큼 맛있기 때문’이란다. 글쎄 서울내기와 고래가 대체 무슨 상관인지는 아직도 모르겠다.
어린 시절 세상에서 가장 큰 동물이 ‘흰긴수염고래’라는 걸 어느 책에선가 읽었다. 몸 길이가 무려 30미터에 달하고, 몸무게가 150톤이나 된다는 이 거대한 생명체에 관심을 안 가질 수가 없었다. 하지만 관심을 갖는다고 해서 별 다른 정보를 얻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어린 내가 구할 수 있는 어떤 경로(책, 친구, 선생님, 부모님 등)로도 흰긴수염고래에 대한 더 자세한 정보는 얻을 수 없었다. 결국 그냥 기억에서 잊혀졌다.
흰긴수염고래에 대한 관심은 인터넷 덕분에 다시 떠올랐다. 당시 어느 문학 동호회에 가입하라는 선배의 강요에 따라 동호회에서 사용할 필명을 짓는데 아무리 고민해도 별다른 단어가 떠오르지 않았다. 웬만한 단어는 대부분 기존 회원들이 선점하고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문득 떠오른 단어가 ‘흰긴수염고래’였다. 어린 시절 경외감을 갖고 상상하곤 했던 그 거대한 생명체를 다시 떠올린 것이다. 당장 필명을 그것으로 정하고, 누군가 물어볼 때를 대비하여 좀 더 자세한 정보를 검색했다. 다행히 이번에는 조금 더 정보를 구할 수 있었다. 흰긴수염고래라는 필명은 이후 웬만한 온라인 카페 등에 가입할 때마다 사용했는데, 주위 사람들은 ‘술고래’라고 바꿔 부르곤 했다. 나중에는 흰긴수염고래가 발음하기가 쉽지 않고, 또 술고래라고 불러대는 녀석들이 귀찮아서 다른 필명으로 바꿔 쓰게 되었고, 또다시 기억에서 잊혀졌다.
다시 흰긴수염고래를 만나게 된 건, 이 책을 통해서다. 캘리포니아 만에 사는 흰긴수염고래들을 20년 동안 관찰해온 다이앤이란 연구자는 고래 한 마리 한 마리에 이름을 붙여서, 누군지 다 알아볼 수 있다고 했다. 그녀는 동료들과 함께 만든 사진식별 카탈로그를 갖고 있었다. 주로 등지느러미의 색깔과 모양(뭉툭한 것, 굽은 것, 삼각형 등)에 따라 분류되어 있다고 했다. 다이앤은 캘리포니아 만 근처에서 만나왔던 30여 마리의 고래들을 한눈에 알아볼 수 있을 정도로 그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다고 했다. 그녀는 가장 기억에 남는 고래로 ‘250’이란 이름을 붙인 암컷에 대해 얘기했다. 250을 처음 발견했을 때, 데리고 있었던 새끼 ‘니냐’(소녀라는 뜻이지만, 실제로 그 새끼는 수컷이었음)를 데리고 있었던 얘기와 2년 후에 다시 두 번째 새끼인 ‘핀타’를 데리고 온 이야기. 그리고 나중에 세 번째 새끼를 보았을 때 ‘산타 마리아’라는 이름을 붙여준 이야기가 무척 흥미롭다. 제인 구달의 침팬지 연구나 신시아 모스의 코끼리 연구처럼 다이앤은 ‘친밀성’을 바탕으로 고래 연구에 좀 더 집중할 계획이라고 했다.
이 책에는 그 외에도 캘리포니아 만을 거쳐 가는 수많은 고래 이야기가 가득하다. 그리고 그 이야기들은 사실은 그들 고래를 쫓는 고래 연구자들의 이야기이다. 저자는 고래의 삶과 고래 연구자들의 삶을 모성의 관점에서 풀어놓는다. 책을 펼치자마자 만나게 되는 저자의 딸 ‘에스메’의 잠든 얼굴은 그런 점에서 이 책의 성격을 가장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저자는 우리가 잘 몰랐던 고래의 삶에 대해 여성 특유의 섬세하고 따뜻한 목소리로 들려주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