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력으로 해가 바뀌었지만, 아직 음력 설을 지나지 않아 '임진년'이 되기 직전, 정신없이 흘러간 시간 중에 어느 저녁 김해자 선배와 술을 한 잔 했다. 홍어무침과 녹두빈대떡과 막걸리. 예전부터 김해자 선배의 산문을 참 좋아했다. 차분하게 일상을 풀어놓으시는데, 그 안에 녹아있는 따뜻한 마음과 삶의 지혜가 느껴져서 좋았다. 시인이지만 개인적으로 시보다 산문을 좋아했다.

 

김해자 선배와 보낸 짧은 시간 다양한 많은 얘기들을 나눴다. 교류하고 계신 여러 작가들의 근황도 알려주시고, 시골 생활의 사소한 이야기들도 말씀해주시고, 현재 작업하고 계신 책에 대해서도 알려주셨다. 막걸리 통이 점점 비워지면서, 슬슬 헤어질 시간이 다가왔다. 아쉬움을 뒤로하고 선배와 헤어지면서, 내 이름을 불러줄 때 그 느낌이 참 좋았다. 친근하고 푸근한 느낌.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선배의 시집을 다시 한번 찾아 읽고, 글을 하나 올리려고 맘먹었는데, 뒤늦게 시를 하나 찾아 읽었다.

 

 

 

 

 

 

 

 

 

 

 

 

 

 

 

 

 

사람 숲에서 길을 잃다


너무 깊이 들어와버린 걸까
갈수록 숲은 어둡고
나무와 나무 사이 너무 멀다
동그랗고 야트막한 언덕배기
천지사방 후려치는 바람에
뼛속까지 마르는 은빛 억새로
함께 흔들려본 지 오래
막막한 허공 아래
오는 비 다 맞으며 젖어본 지 참 오래


깊이 들어와서가 아니다
내 아직 어두운 숲길을 헤매는 것은
헤매이다 길을 잃기도 하는 것은
아직 더 깊이 들어가지 못한 탓이다
깊은 골짝 지나 산등성이 높은 그곳에
키 낮은 꽃들 기대고 포개지며 엎드려 있으리
더 깊이 들어가야 하리
깊은 골짝 지나 솟구치는 산등성이
그 부드러운 잔등을 만날 때까지
높은 데 있어 낮은, 능선의
그 환하디환한 잔꽃들 만날 때까지


김해자 / 無花果는 없다 / 실천문학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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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30 20:1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참 멋진 시입니다.
돌아서서 반성하게 하는 시입니다.

사람의 숲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은 아닐까..
깊이 반성하고 있습니다 ㅠ.ㅠ

선배님 시인과 좋은 시를 포스팅해주셨습니다. 고맙습니다.


감은빛 2012-02-01 20:36   좋아요 0 | URL
사실 저는 김해자 선배의 시 보다 산문을 더 좋아합니다.
선배가 시를 참 잘쓰시고, 상도 여럿 받으셨지만,
제가 시를 잘 몰라서 그런지.
시보다는 산문에 더 맘이 가더라구요.

차트랑공님,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2-01-30 22: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를 쓰는 분이랑
술 한 잔 걸치면
좋은 생각씨앗
오순도순 나누리라 믿어요.

감은빛 2012-02-01 20:38   좋아요 0 | URL
제가 시인을 많이 알지는 못하지만,
그래도 한때 시인들과 술을 마시는 경우가 더러 있었어요.
확실히 시인들은 다른 작가들보다 더 감성적이라는 느낌을 받습니다.

저는 시에 재주가 없는 걸 보니,
아무래도 감수성이 다 말라버린 듯 해요.

마녀고양이 2012-01-31 10:0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시 너무 좋네요... 시집 살까,,
요즘 숲의 오솔길을 거니는 상상을 자주 합니다, 조금 답답해서 그런지.

아우, 첨에 김해자 시인을 감자전으로 읽었지 뭡니까... 이런.
배고파서 그런가봐요, 아침부터 여기 붙어있으니... 오늘은
리뷰를 써야해 라는 강박에 시달리면서도, 이곳저곳 놀러다니는 이 아침. ㅋ

감은빛 2012-02-01 20:42   좋아요 0 | URL
김해자 선배의 시집은 이것도 좋지만,
애지 출판사에서 나온 '축제'라는 시집도 좋습니다!
그 시집으로 '백석문학상'도 받았습니다.

감자전이라니! 정말 배가 고프셨나요?
아니면 아침부터 술이 고프신건 아니셨을까요? ^^
많이 바쁘시죠? 건강 꼭 잘 챙기세요!

진주 2012-02-02 13:39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 시인이랑 마주 앉아서 막걸리와 홍어회무침을 드셨다는건가요?
우리집 냉장고에도 홍어회무침 있는데 어쩜..같은 홍어회무침을 먹고도
뽑아내는 건 이렇게 다를까 싶은 생각이 다 드네요 ㅎㅎㅎ

감은빛 2012-02-09 13:36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진주님.
답이 많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네, 김해자 선배와 함께 홍어무침에 막거리를 마셨습니다. ^^
언제 한번 진주님과도 홍어무침에 막거리 한잔 하면 좋겠다는 기대를 가져봅니다! ^^
 

 

녹색당 발기인으로 참여하고, 어찌하다보니 서울시당 발기인대회의 진행을 맡았고, 또 어찌하다보니 몇몇 일들에 깊숙히 발을 담그게 되었다. 안그래도 이미 발을 걸치고 있는 곳들 때문에, 부담스러워서 발을 빼고 싶었는데, 나도 모르게 자꾸만 더 깊이 빠져들게 된다. 물론 스스로 그런 일들이 싫었다면 아예 가지도 않았을 것이다. 녹색당 일을 하느라 밤에 잠을 못자고, 바쁜 시기에도 시간을 뺐기고, 다른 약속을 다 제치고 녹색당 모임을 챙기는 이유는 그런 시간들이 즐겁기 때문이다. 그랬다! 정말 즐거웠다. 벌써 꽤 오래된 일이 되어버렸는데, 상근활동가였을 때, 그런 일들을 직업으로서 할 때는 그닥 재밌지 않았다. 오히려 힘들고, 지치는 경우가 더 많았다. 그런데 오랫만에 다시 일을 하다보니 새삼 재밌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직업으로서가 아닌 개인적인 관심과 열정 때문에 하는 일이어서 그런 듯 하다.

 

녹색당이 재밌고 즐거운 이유는 뜻이 맞는 사람들, 대화가 통하는 사람들과 함께 하기 때문이다. 나는 환경운동을 했던 시절부터 많은 사람들이 겉으로는 환경문제와 자연에 관심을 두는 듯 하지만, 실상 자신이 먹고 사는 문제외에는 크게 신경쓰지 않는 모습을 봐왔다. 그나마 조금 관심을 가진 사람들조차 적극적인 의견 개진이나 실천에 나서는 것을 어려워했다. 그리고 시민운동으로서의 환경운동은 그 한계가 명확하다는 것을 수없이 깨달았다. 새만금, 핵폐기장, 고속철도, 4대강, 국립공원 케이블카, 골프장 등 그 어느것도 운동으로 접근해서 원하는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이유는 분명하다. 자연을 파헤치는 개발사업은 정치인들과 건설업자들의 유착에 의해 정치 논리로 결정된다. '지역발전' 혹은 '경제성장'이라는 거짓으로 포장된 개발사업들이 무수히 많은 정치인들과 건설업자들의 배를 채우고 있다. 그 돈이 평범한 시민들의 혈세라는 것. 그리고 그 평범한 시민들은 아무런 이득을 볼 수 없다는 것은 분명히 문제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지적하지 못한다. 지금 녹색당을 함께 하고 있는 사람들은 이런 문제의식에 공감하고 새로운 대안을 찾고자 하는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과 함께 새로운 정치를 만들어 가는 일이 무척 즐겁다!

 

이제 환경을 지키는 일도 정치의 영역에서 고려되고 결정되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한국에도 꼭 녹색당이 필요하다. 이미 90년대부터 녹색정치를 꿈꾸고 시도했던 많은 선배들이 있었지만, 지금까지는 성공하지 못했다. 작년 가을부터 시작된 이번 시도 역시 아직 무수히 많은 어려움을 극복해야만 한다. '왜 하필 지금이냐?'라는 질문을 가장 많이 듣는다. 아마도 총선과 대선을 앞둔 상황에서 우리의 공적을 물리치기 위해 모두가 단결해야 한다는 얘기를 하고 싶은 듯 하다. 통합이란 단어를 붙이고 있는 2개의 정당 중에 하나에 참여해야지, 왜 지금 다른 정당을 만들어서 표를 분산시키느냐는 비난을 하고 싶은 듯하다. 하지만 이미 지난 과정들을 보아, 기존 정당으로는 더이상 대안이 없다. 우리는 총선에서 많은 표를 얻고 싶거나, 대통령 후보를 내어 집권을 원하는 정당은 아니다.(앞으로는 또 모르겠지만, 지금 당장은) 뜻이 맞다면 다른 정당들과 야권연대도 가능 할 것이다. 다만 지금 이 시기에 녹색당만이 할 수 있는 일이 있고, 그 일을 해결하기 위해서 꼭 녹색당이 필요한 것이다.

 

현재 녹색당을 준비하는 사람들이 가장 시급하게 생각하는 것은 대한민국이 핵발전소에서 벗어나는 일이다. 작년 3월 11일 후쿠시마 핵발전소 사고 이후 거의 1년이 가까운 시간이 지났지만 아직 일본은 전혀 수습을 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나라 언론에서 거의 다루지 않기 때문에, 많은 사람들이 망각하고 있을지도 모르지만, 현재 일본의 상황은 매우 심각하다. 인류 최악의 핵폭발을 일으켜서 전 세계적으로 영향을 미친 체르노빌 사고보다 더 심각한 지경이다.(현재 우리나라에서 자연적으로 검출되는 방사선량은 대부분 체르노빌 사고로 유출된 방사능 오염 덕분이다. 원래 방사능 물질은 자연상태에 존재하지 않는 물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정부는 핵발전이 '청정에너지'이고, '그린에너지'이며 절대적으로 안전하다는 거짓말을 국민 세금으로 광고하고 있다. 국민세금으로 막대한 비용이 드는 원전을 지으며 건설사들의 배를 불려주고 있다. 그리고 준저준위 핵폐기물에 해당되는 방사능물질이 월계동 아스팔트에서 검출되었음에도 안전하다는 거짓말을 내뱉았으며, 그 아스팔트를 처리하지 못해 노원구의 공원에 방치해두었다가 노원구청 앞으로 옮겨두었다. 일본산 생선(대구, 명태 등)에서 심각한 방사능물질이 검출되어도 기준치 이하라고 모두 수입해서 유통하고 있다. 먹는 음식에 의한 방사능 오염을 '내부피폭'이라고 부르며, 방사능 물질을 먹어서 안전한 기준이라는 것은 절대 없다는 것을 '인의협(인도주의 실천 의사협의회)'에서 확인해주었지만, 여전히 일본산 생선들은 수입되어 우리의 밥상에 오르고 있다. 핵발전은 절대로 안전하지 않으며, 10만년이라는 어마어마하게 긴 시간동안 안전하게 보관되어야 할 핵폐기물을 자손들에게 짐으로 안겨주는 범죄행위이다. 지금 우리나라에 녹색당이 만들어지지 못한다면 현재 정부의 계획대로 핵발전소는 계속 지어질 것이고, 수명이 다 된 발전소는 또 수명연장을 해서 사고 위험을 더 높일 것이다. 그리고 우리는 영원히 핵발전으로부터 벗어나지 못할 것이다.

 

 

 

 

 

 

 

 

 

 

 

 

 

 

 

나는 가끔 아이들의 얼굴을 보면서 죄책감을 느낀다. 이렇게 말도 안되는 이상한 세상에 태어나게 해서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 작년에 후쿠시마 사고가 터졌을 때는 그런 생각 때문에 눈물이 나기도 했다. <체르노빌의 아이들>을 읽으면서도 나도 모르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가끔 사람들에게 왜 녹색당을 만들어야 하냐는 질문을 들으면, 나는 아이들 때문이라고 말한다. 우리 아이들을 위해서라도 이 미쳐버린 나라에 꼭 녹색당이 필요하다고 말한다.

 

혹시 이 글을 읽게 될 부모들이 계시다면, 부디 잠든 아이의 얼굴을 찬찬히 들여다보면서 녹색당에 가입하는 일을 고민해주시기를 간절히 바란다!

 

녹색당 홈페이지           http://kgreens.org/

페이스북 녹색당 그룹    http://www.facebook.com/groups/koreagreen/

 

※ 알라딘에서 '2012년 녹색의 미래, 녹색의 정치를 여는 길'이란 제목의 연속 강연이 열린다!

 

참여를 원하시는 분은 아래 링크를 통해 신청할 수 있다.

 

http://www.aladin.co.kr/events/wevent_book.aspx?pn=20120118_inmunstudy11_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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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1-26 20:3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애써 담근 발
즐거이 좋은 땀
거둘 수 있기를 빌어요.
힘껏 뛰어 주셔요~

감은빛 2012-02-01 20:19   좋아요 0 | URL
네, 별로 재주가 없는 편이라서
큰 도움이 되지는 못하지만,
나름 할 수 있는 것들을 찾아서 함께 하고 있습니다.

응원해주셔서 고맙습니다! ^^

차트랑 2012-01-27 09:0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어느 누군가가 그러더군요
'산업 혁명은 어쩌면 인류의 재앙일지도 모른다...'라구요..
과장된 측면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말하고자 하는 바는 충분히 공감할만 했습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낸 방사능도 어쩌면...

링크를 따라가보니 녹색의 미래 강연에 참여하시는 분들이 아주 많습니다.
좋은 글 고맙습니다.

감은빛 2012-02-01 20:22   좋아요 0 | URL
현대 문명이라는 것이 인류에게 재앙까지는 아닐지는 몰라도,
아주 심각한 문제들을 많이 갖다준 것은 사실이죠.
게다가 앞으로 가져다 줄 문제들은 아주 심각한 것들이 될 것으로 예상됩니다.

차트랑공님 자주 들러서 말씀 남겨주시니, 정말 고맙습니다!
제가 자주 들어오지 못해 인사를 자주 드리지 못해도 양해해 주시길 부탁드립ㄴ다.

2012-01-29 17:40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2-02-01 20: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아름다움이 세상을 구원할 것이다 - 도스또예프스끼의 삶과 예술을 찾아서
이병훈 지음 / 문학동네 / 2012년 1월
평점 :
품절


 

가끔 읽지 않은 책을 읽었다고 착각할 때가 있다. 그런 경우는 대개 세계적으로 이름난 작가의 고전 문학이다. 어릴 때 읽었던 ‘소년소녀세계문학전집’ 따위의 ‘축약본’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디선가 요약된 내용이나 독후감(혹은 서평)을 읽었기 때문일 수도 있다. 아주 가끔은 읽으려고 손을 댔다가 도중에 포기해놓고, 다 읽었다고 스스로 착각하는 경우도 더러 있다. 하지만 절대 착각하지 않는 작가가 한 명 있는데, 그는 바로 도스또예프스키이다. 이 분의 작품은 <죄와 벌>과 <까라마조프가의 형제들>을 조금씩 읽다가 그만두었는데, 워낙 심오하고 방대한 작품세계 덕분에 도저히 조금 읽다 말아놓고, 다 읽었다고 착각할 수는 없다.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들을 꼭 다시 읽어야겠다고 생각했던 건, 이정우의 <탐독>을 읽고 나서였다. 이정우는 이 책에서 제법 많은 지면을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으로 채우고 있었다. 그 내용이 무척 인상적이어서 나도 이번에는 꼭 완독을 해야겠다고 결심했지만, 그 결심은 쉽게 또 잊혀졌다. 새로운 일터에서 새로운 일을 익히기 시작하면서 여유가 없어진 탓도 있었고, 나태한 성격 탓도 있었다. 무엇보다 중간까지 흥미롭게 읽었던 <탐독> 조차 뒷부분을 다 읽지 못하고 내 관심에서 멀어져버렸다. 하지만 한번 갖게 된 관심은 그리 쉽게 지워지지는 않는 법이다. 언제든 ‘도스또예프스키’라는 발음조차 어려운 그 이름을 보거나 듣게 되면 어김없이 꼭 읽으리라 맘먹었던 날의 기억은 다시 살아난다.

 

이 책은 도스또예프스키에 대한 거의 모든 것을 다 담아내려고 한 것 같다. 그만큼 많은 내용을 담고 있다. 모스끄바에서 시작해서 뻬쩨르부르그, 옴스끄, 스따라야 루사에 이르기까지 직접 대작가의 흔적을 찾아다니면서 쓴 책이라는 것이 우선 흥미롭다. 가끔씩 등장하는 사진들 중에는 이미 시대가 많이 변한 탓에 큰 의미가 없어 보이는 것도 있지만, 곳곳에 세워진 기념비나 복원해놓거나 보존해놓은 공간들을 보는 것은 대작가의 삶을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었다. 특히 도스또예프스키가 뻬쩨르부르그에서 계속 모퉁이 집에서 살았음을 보여주는 4장의 사진은 무척 인상적이다! 저자가 스스로 쓴 것처럼 도스또예프스키가 줄곧 모퉁이 집에서 살았다는 사실은 그의 삶을 이해하는데 결정적인 단서가 된다. 이런 흥미로운 사실은 단순히 평전을 읽어서는 알기 힘들 것이다.(물론 실제로 그의 평전을 읽어보지 않아서 장담할 수는 없다.)

 

이 책은 마치 하나의 장편소설처럼 도스또예프스키의 삶의 흔적을 쫓아가면서 그의 삶을 묘사하고 있다. 저자가 참고한 회고록이나 편지글 등이 곳곳에 삽입되어 있기 때문에 그의 묘사를 믿을 수 있기도 하고, 회고록이나 편지를 쓴 이의 생생한 목소리가 느껴지기도 한다. 서문에서 저자가 쓴 것처럼, 이 책을 통해 대작가의 생애를 따라가다 보니 한 층 더 그에 대해 관심을 갖게 되었다. 그가 사형집행을 당할 순간, 진짜 판결이 내려지면서 유배지로 떠난 사연이라던가, 그가 도박에 빠졌다는 사실이나 여러 차례의 유럽 여행 경험 등을 알게 되면서 대작가 도스또예프스키가 아닌 인간 도스또예프스키를 알게 되었다.

 

<탐독>을 읽으며 꼭 도스또예프스키의 작품들을 하나씩 찾아 읽으리라고 생각했던 이후로 오랜 시간이 흘렀다.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더 생각해본다. 당장 가능하지 않더라도, 오랜 시간이 걸리더라도 하나씩 하나씩 천천히 그의 작품들을 찾아 읽어보리라. 하나씩 작품들을 찾아 읽는 도중에 이 책도 한 번씩 더 들춰보게 될 것이다. 또 한 번의 자극이 반갑고 또 고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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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트랑 2012-01-26 13:4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영화에도 꽝이지만 문학에도 역시 꽝~!!
낡고 낡은 도스토또예프스키 전집을 내다 버린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습니다요 ㅠ.ㅠ
내다 버리고 나서 알라딘을 검색하다가는
새로운 버전으로 다시 출시가 되었다는 것을 알게되었습죠 이런..ㅠ.ㅠ
엘리베이터를 타도 달려갔더니
없어졌더구먼요 또 이런..ㅠ.ㅠ

그렇게 내다버린 책이 이뿐인가하면...
'여유당 전서'도 낡았다는 이유로 내다 버렸고 ㅠ.ㅠ
요즘 여유당께서 뜨십니다요 ㅠ.ㅠ

'무소유'를 내다 버리고 나니
법정스님게서 열반을 하시더군요 ㅠ.ㅠ
(책장을 아무리 뒤져봐도 없는거에요 분명 있었는데...)
이거야 원 ㅠ.ㅠ

그렇게 제게 커다란 교훈을 준 것은 바로 내다버린 책들입니다.
내다버린 책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합니다
후회가 물밀듯 한다는 ... ㅠ.ㅠ

알라딘은 정말 좋아요
깨달음이 먼데 있지 않은 것을요...

감은빛 2012-02-01 20:15   좋아요 0 | URL
계속 답글이 늦어지고 있습니다. 죄송합니다!
훌륭한 책들을 많이 버리셨군요!
저는 책을 잘 안버리는 편이라서 아내에게 종종 잔소리를 듣습니다.

도스또예프스키 전집은 정말 안타깝네요!

oren 2012-01-26 16:2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고교 졸업을 앞둔 긴긴 겨울에 가장 감명깊게 읽었던 작품이 도스토예프스키의『까라마조프 형제들』이었고, 그 뒤로도『죄와 벌』,『이중인격』등을 더 읽었었는데, 어느새 도스토예프스키를 만나보지 못한지 거의 30년쯤 된 것 같군요. 감은빛님의 글을 읽어보니 가끔씩 다른 책에서 만나봤던 도스토예프스키의 '절체절명의 순간'이 새삼 떠오릅니다.
* * *
<처형 직전>
'이토록 빨리, 또한 영원히 어둠 속으로 들어서야 할 찰나로구나.' 갑자기 또 다른 생각이 떠올랐다. '만약 내가 죽음을 당하지 않는다면, 내 삶은 갑작스럽게 무한하고 완전한 영원으로서 매 초가 한 세기를 살아가는 것처럼 느껴질 것이다. 스쳐가는 모든 것을 소중하게 여기리라. 인생의 단 1초도 허비하지 않으리라.'

<4년간의 '시베리아 강제노동'이라는 새로운 선고를 듣고 나서>
그날 도스토예프스키는 담담한 어조로 동생에게 편지를 써서 보냈다. "지난 일을 돌이켜보고, 실수와 게으름으로 허송세월했던 날들을 생각하니 심장이 피를 흘리는 듯하다. 인생은 신의 선물······ 모든 순간은 영원의 행복일 수도 있었던 것을! 젊었을 때 알았더라면! 이제 내 인생은 바뀔 것이다. 다시 태어난다는 말이다."

감은빛 2012-02-01 20:18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오렌님.
도스또예프스키를 많이 읽으셨군요!
저도 이제 하나씩 찾아봐야겠어요.

다른 책에 나온 '절체절명의 순간'을 옮겨주셔서 고맙습니다!
 
우리를 먹지 마세요! 두레아이들 생태 읽기 3
루비 로스 글.그림, 천샘 옮김 / 두레아이들 / 2011년 12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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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 고속도로를 달리다가 닭을 잔뜩 싣고 가는 닭장차를 만났다. 아내와 큰아이는 좁은 철창에 갇힌 수많은 닭들을 보면서 깜짝 놀랐다. 정말 좁디좁은 철창 속에 갇힌 닭들은 숨 쉴 틈조차 없어 보였다. 채식을 하는 아내는 기회를 놓치지 않고 아이를 공략했다. 저기 좁은 곳에 갇혀서 팔려가는 닭들이 어떻게 자라고, 어떻게 가공되어 우리 입으로 들어가게 되는지 아이가 쉽게 이해할 수 있는 말들로 설명했다. 아이는 금방 “닭이 너무 불쌍하다!”는 감상을 내놓고, “이제부터 닭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선언을 했다. 불쌍한 닭의 상황을 알게 되어 더 이상 닭고기를 먹지 않겠다는 아이의 반응은 솔직하고 당연한 것이다.

 

아이가 닭고기를 안 먹겠다는 선언을 한 이후로 곤란해진 것은 나였다. 아내는 약 10여 년 전부터 유제품만 먹는 락토 채식을 하고 있다. 나와 아이들이 육류나 생선을 먹는 것을 이해하지만, 함께 채식을 하기를 바라는 마음이기 때문에 아이의 반응이 무척 반가웠을 것이다. 나는 평소 밖에서 먹고 싶은 것을 충분히 먹는 편이지만, 간혹 아내가 늦게 들어오는 저녁에 꼬마 녀석을 데리고 치킨에 맥주를 마시는 일에 재미를 붙이고 있었다. 당시 우리가 살던 동네에 새로 치킨집이 생겼는데, 다른 곳에 비해 훨씬 맛있었다. 아마도 신선한 기름에 튀기기 때문인 것 같았다. 게다가 이 집은 맥주도 무척 맛있었다. 덕분에 꼬마 녀석과 나는 이 집의 단골손님이 되어 있었다. 그런데 돌연 녀석의 선언 덕분에 나는 더 이상 그 치킨 집을 갈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그래도 하나의 희망은 있었다. 아이가 그 집 치킨을 얼마나 좋아했는지 알기 때문에, 그 선언이 오래가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면서 기다렸다. 그런데 생각보다 아이의 고집은 완고했다. 먹고 싶지만, 엄마와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참는 녀석을 보면서 대견하고 자랑스럽게 느껴지기도 했다. 결국 나중에 시간이 많이 지나서 아이는 닭고기는 안 먹지만 치킨은 먹겠다(아마도 삶은 고기는 먹지 않고, 튀긴 고기는 먹겠다는 뜻인 듯)고 말을 바꾸기는 했지만 아직 어린 아이(당시 5살)가 단 한번 닭장차에 실려 가는 닭들을 본 충격이 제법 컸기 때문에 그만큼 오래 약속을 지킨 듯하다.

 

어렸을 때의 습관이나 생각은 어른이 되어도 오랫동안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한다. 가끔 티비에서 비만에 걸린 아이들을 언급하면서 햄버거, 피자, 치킨 등의 패스트푸드를 이야기하곤 한다. 한번 그런 음식에 맛을 들이면 다 큰 어른들도 쉽게 그 유혹에서 벗어나기 어렵다. 단지 비만의 문제가 아니라 축산 농장과 식품산업의 여러 가지 문제 때문에라도 되도록 패스트푸드뿐만 아니라 육식을 줄이거나 중단 하는 것이 좋다고 생각한다. 작년의 구제역 파동과 최근 소 사료값 인상으로 인해 벌어지는 사태를 보면 더더욱 채식에 대해 관심이 생긴다.

 

만약 아이들에게 공장식 축산농장과 식품가공산업과 패스트푸드 산업의 문제점 등을 알아듣기 쉽게 잘 설명할 수 있다면, 아이들도 채식의 가치에 대해 잘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우리 큰아이가 단 한 번의 충격으로 제법 오래 실천을 했듯이 이 설명을 잘 알아들은 아이들은 대다수가 채식을 실천하게 되리라 예상된다. 또한 나중에 이 아이들이 어른이 된다면 생명을 존중하고, 자연환경을 생각하고, 행동으로 실천하는 사람이 될 확률이 높으리라.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정말 꼭 필요한 책이고, 훌륭한 교재이다. 루비 로스의 동물 그림은 독특하고 재밌다. 아이들이 금방 관심을 가질 만큼 귀엽다. 하지만 그 귀여운 동물들이 좁은 철창에 갇혀 고통 받고 있다는 내용은 적절한 자극을 줄 것이다. 이 책은 당위의 논리를 펴는 것이 아니라 각 개별 동물들에 대해 관심 가지도록 권하기 때문에 아이들 스스로 오로지 (인간을 위한)고기가 되기 위해 태어나고 길러지는 각 동물의 입장을 생각해보게 만든다. 제인 구달 역시 이 점을 강조하고 있다. 책 뒤에는 여러 유명인들의 추천사가 들어있는데 그 중에서 특히 동물보호단체 <카라>(www.ekara.org)의 추천이 눈에 띈다. 게다가 이 책의 수익의 일부는 <카라>에 기부한다고 한다. 그리고 이 책의 옮긴이는 <풀꽃평화연구소> 연구원으로 참여하고 있다. 여러모로 의미가 있는 책인 만큼, 많은 어린이들이 읽었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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굿바이 2012-01-19 00:23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제 조카도 가축으로 분류되는 동물을 먹는 행위에 대해 진진하게 생각하더라구요.
그래서 몇 가지 책들을 선물했는데 이 책도 도움이 될 것 같습니다.
좋은 책 소개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2-01-26 10:05   좋아요 0 | URL
댓글을 벌써 읽어놓고, 여유가 없어서 답이 많이 늦었네요.
죄송합니다!

조카분이 범상치 않군요.
어렵고 딱딱한 책들 보다는 이 책이 훨씬 더 감수성을 자극하는 듯 합니다.
고맙습니다!

숲노래 2012-01-19 03:4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튀김닭은
닭공장(닭 사육장)에서 오래 키우지 않은 작은 닭(으레 한 달 즈음 키운 녀석)을
몇 번 쓰지 않은 기름더미에서 튀기고
사람들 입에 잘 맞는 양념을 쓰면
다들 '맛있다'고 해요...

튀김닭으로 쓰는 닭이랑 백숙으로 쓰는 닭은
닭공장에서 키우는 기간이 달라요.

대기업 닭공장이든 시골 작은 닭공장이든
하루라도 더 살을 찌워 사료값 줄이려고
아주 빨리빨리 키워낸답니다.
(다 아는 이야기일까요?)
(닭공장 튀김닭은 한 달 남짓 키운 닭이기 일쑤예요. 알에서 깬 뒤부터.)

맥주 안주로 더 좋은 먹을거리도 많으니까
아이하고 함께할 좋은 먹을거리를 찾아보셔요~

감은빛 2012-01-26 10:10   좋아요 0 | URL
된장님. 안녕하세요.

다행인지 불행인지 그 맛있는 튀김닭집이 있는 동네에서 이사온지 몇년 지났어요.
그 이후로는 튀김닭을 자주 먹지는 않습니다.
아이하고 함께 할 좋은 먹을거리에 늘 고민이 많습니다.
그나마 생협에서 사먹는 것들이 도시에서는 가장 안전하고 괜찮다 생각합니다.

요즘 녹색당에서 술자리를 하다보면 채식을 하는 분들이 많아서,
술안주에 대한 고민도 많아졌습니다.
페스코 채식을 하는 분들은 그래도 함께 먹을 것들이 제법 있는데,
락토나 비건이라면 일반 음식점이나 술집에서 먹을 게 거의 없더라구요.
이런 고민들을 하는 분들이 더 많아지면
좋은 재료로 음식을 만드는 식당이나 술집이 더 늘어나겠죠?

차트랑 2012-01-20 01:0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식생활이 당사자들에게 그 얼마나 큰 영향을 끼치는지 알고나면
음식에 대한 인식의 변화가 분명하게 일어나리라 생각합니다.

최근 페이퍼의 강력한 힘을 절감하고 있습니다 ㅠ.ㅠ
이렇게 좋은 페이퍼들 덕분입니다.

좋은 페이퍼를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감은빛님~

감은빛 2012-01-26 10:12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차트랑공님
답이 늦어서 죄송합니다!

저도 현대 식품산업의 문제와 먹거리의 위험성에 대해 눈을 뜬지 오래되지 않았습니다.
개인적으로 충격적인 일들이 몇 번 있었는데,
아무리 주변에 얘기해도 큰 반응과 실천을 이끌어내기가 쉽지 않더라구요.
그래도 요즘 자주 나가는 녹색당에서는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진 분들 많이 계십니다.

칭찬해주셔서 고맙습니다!
차트랑공님께서도 좋은 글 많이 써주셔서 고맙습니다!
 
나의 올레는 어디인가 - 길.사람.자연.역사에서 찾다
서승범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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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고향,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자주 볼수 없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평생 살면서 보았던 눈 보다 더 많은 눈을 본 것은 군생활을 하면서였고, 그 이후로 눈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말부터 먼저 나왔지만, 그 날만은 눈을 보면서도 신비롭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나는 숲 속을 걷고 있었다. 등산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출근하는 중이었다.

 

당시 내 출근길은 주로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내려서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균관대학교 후문에서 내린 다음 와룡공원 입구 직전에 산길로 접어들어, 숲을 지나서 서울 성곽길을 살짝 지나쳐서, 성북동 골목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걷는 시간으로 따지면 약 15분 거리. 빨리 뛰면 10분 안으로 돌파할 수도 있었다. 몇 분 안되는 거리지만, 나는 이 숲길을 걷는 것이 참 좋았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만 걷다가 포근한 흙을 밟으며 걸으면 발의 감각도 일단 좋고, 조용하고 차분한 숲의 분위기도 좋고, 왠지 출근길이 아닌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도 든다.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달동네에 살고 있는 터라, 겨울에는 매일 등산화를 신고 다녔기에 그 걱정은 금방 털어버렸다. 우리 동네는 눈이 안와도 햇빛이 잘 안드는 골목길 구석에는 늘 얼음이 얼어있다. 자칫 미끄러지면 다치기 때문에 늘 등산화를 신고 다닌다. 성대 후문에서 버스를 내려서 빠르게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와룡공원 입구 바로 아래에서 숲길로 접어들면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렀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색이 다 흰 색이다. 길과 숲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온통 새하얀 눈이 깔려있다. 누구 하나 밟은 적이 없는 흰 눈길을 뽀드득 뽀드득 밟는 기분이 야릇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새하얀 세상. 흰 눈이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린 세상 속에서 나만이 홀로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오는 개심사를 찾는 까닭 - 서승범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마치 내가 화자가 되어 내 여행이야기를 펼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때가 종종 있었다. 세상을 향한 시선이 특히 그러하다. 한 편으로 냉소적이고 무심한 듯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따뜻하고 또 정겨운 시선이다. 홀로 떠나기를 좋아하는 습관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시장통이나 뒷골목 따위를 돌아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읽다가 마침내 이 사진을 만났다. 나는 아직 개심사에 가본적은 없지만, 마치 내가 찍은 사진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눈을 맞으며 출근하던 길에 잠시 멈춰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그 짧은 숲길에서 눈을 맞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저자가 왜 눈오는 날 개심사를 찾았을까? 그는 저 눈덮힌 산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은 사람이 만든다. 그 길은 누가 걷는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제주 올레의 큰 성공 이후 전국 여기저기서 걷는 길이 만들어졌다. 울진의 금강소나무숲길,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부산 이기대 갈매길 등 걷는 길들은 멋진 풍경과 함께 사색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다.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의 갈피를 붙잡기도 하고, 잘 안풀리던 일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한동안 소원했던 누군가가 문득 그리워지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어떤 장소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 책은 제목만 봐서는 제주 올레는 소개하거나, 좀 전에 언급한 걷는 길들을 다룬 책인 것 같지만, 실제로 차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저자는 제주 올레길과 북한산 우이령길 뿐만 아니라 서울성곽과 혜화동 낙산공원, 수원 화성과 팔달문시장, 전주 한옥마을, 강화도 전등사,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담양 소쇄원, 남한산성, 인천 자유공원 일대 등 다양한 공간에서 자신만의 올레길을 찾고 있다. 여기서 올레길은 단순히 걷는 길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성찰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사람내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경 따윈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찌 없겠는가만, 보다 보면 오십 보 백 보일 테니, 그보단 자신에게 의미있는 나름의 '비경'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게다. '그 시절'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그 담벼락과 골목이, 이제는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걸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인연이 만든 비경 첫 구절

 

 

 

 

나만의 추억이 깃든 길은 어디일까?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홀로 훌쩍 떠났던 몇몇 장소들도 떠오르고, 누군가와 함께 했던 어떤 기억들도 떠오른다. 그것은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날에는 몽골 사막에서 바라보았던 밤 하늘의 별이 생각날 것이고, 또 어떤 날에는 여수 돌산 공원에서 내려다보았던 돌산대교가 생각날 것이고, 어느 날에는 설악산 아래 어느 민박집에서 혼자 소주잔을 비우던 밤이 생각날 것이다. 지금 나는 저 눈 내리는 숲의 모습이, 온통 흰 색으로 가득찬 숨막히는 풍경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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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1-09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좋은 길 이야기
하나하나 들려주셔요~

아마 그동안
수많은 좋은 길을 걸어 보셨겠지요~

감은빛 2012-01-10 16:18   좋아요 0 | URL
수많은 까지는 아니예요.
저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길들은 제법 있을 것 같네요.
기억의 저편을 좀 방황하면서 찾아봐야겠지만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12-01-09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오랜만에 댓글 남겨봅니다.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눈 쌓인 나무가 있는 사진이 정말 아름다워요. 눈 오는 겨울이라는 먼저 춥다는
생각 밖에 안 드는데 저 사진은 오히려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뜻하게 느껴지네요.
눈 덮인 산길도 사람 키만하게 안 쌓인다면 걷는 것도 좋을거 같아요.
제가 추억하는 눈 덮인 산길이라면 제 군대 시절 혹한기 훈련 밖에 없네요 ㅎㅎ
그닥 좋은 추억도 아니었고요.. ^^;;




감은빛 2012-01-10 16: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루스님.
저도 요즘 통 다른 분들 서재 방문을 못해요.
먼저 인사 건네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곧 답방 가겠습니다. ^^

제 혹한기 훈련도 그닥 좋은 추억은 아닙니다. ^^

차트랑 2012-01-10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에게 의미있는 나름의 '비경'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
이 대목에 정말 공감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2-01-17 13:01   좋아요 0 | URL
댓글을 보고서도 답글을 미처 달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늘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 만이 진짜 감동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죠.
한눈에도 와! 하고 감탄할만한 멋진 풍경이야 없지 않겠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골목길이나 재래시장 같은 곳이
오히려 나만의 비경이 될 수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