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올레는 어디인가 - 길.사람.자연.역사에서 찾다
서승범 지음 / 자연과생태 / 2011년 1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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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이었다. 눈이 내리고 있었다. 내 고향, 따뜻한 남쪽 지방에서는 자주 볼수 없는 눈이 내리고 있었다. 평생 살면서 보았던 눈 보다 더 많은 눈을 본 것은 군생활을 하면서였고, 그 이후로 눈이라면 지긋지긋하다는 말부터 먼저 나왔지만, 그 날만은 눈을 보면서도 신비롭다는 생각부터 먼저 들었다. 나는 숲 속을 걷고 있었다. 등산을 나선 것은 아니었다. 그저 나는 출근하는 중이었다.

 

당시 내 출근길은 주로 안국역에서 지하철을 내려서 마을버스 02번을 타고 성균관대학교 후문에서 내린 다음 와룡공원 입구 직전에 산길로 접어들어, 숲을 지나서 서울 성곽길을 살짝 지나쳐서, 성북동 골목길을 따라 걸어 내려갔다. 걷는 시간으로 따지면 약 15분 거리. 빨리 뛰면 10분 안으로 돌파할 수도 있었다. 몇 분 안되는 거리지만, 나는 이 숲길을 걷는 것이 참 좋았다. 아스팔트나 콘크리트로 포장된 길만 걷다가 포근한 흙을 밟으며 걸으면 발의 감각도 일단 좋고, 조용하고 차분한 숲의 분위기도 좋고, 왠지 출근길이 아닌 어디 멀리 여행을 떠나는 듯한 기분도 든다.

 

눈이 내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 길을 갈 수 있을지 걱정이 되었던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달동네에 살고 있는 터라, 겨울에는 매일 등산화를 신고 다녔기에 그 걱정은 금방 털어버렸다. 우리 동네는 눈이 안와도 햇빛이 잘 안드는 골목길 구석에는 늘 얼음이 얼어있다. 자칫 미끄러지면 다치기 때문에 늘 등산화를 신고 다닌다. 성대 후문에서 버스를 내려서 빠르게 오르막길을 걸어올라갔다. 와룡공원 입구 바로 아래에서 숲길로 접어들면서 나도 모르게 탄성이 흘렀다. 시야에 보이는 모든 색이 다 흰 색이다. 길과 숲이 구분이 안갈 정도로 온통 새하얀 눈이 깔려있다. 누구 하나 밟은 적이 없는 흰 눈길을 뽀드득 뽀드득 밟는 기분이 야릇한 쾌감을 불러일으킨다! 새하얀 세상. 흰 눈이 모든 것을 다 덮어버린 세상 속에서 나만이 홀로 존재하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다.

 

 

                                                    눈오는 개심사를 찾는 까닭 - 서승범

 

이 책을 읽어나가다가 마치 내가 화자가 되어 내 여행이야기를 펼치고 있는게 아닌가 싶은 착각이 들때가 종종 있었다. 세상을 향한 시선이 특히 그러하다. 한 편으로 냉소적이고 무심한 듯 하면서, 다른 한 편으로는 따뜻하고 또 정겨운 시선이다. 홀로 떠나기를 좋아하는 습관도 마찬가지다. 일부러 이름난 곳을 찾아다니기보다는 시장통이나 뒷골목 따위를 돌아다니는 것도 마찬가지다.

 

이런저런 이유로 고개를 끄덕여가면서 읽다가 마침내 이 사진을 만났다. 나는 아직 개심사에 가본적은 없지만, 마치 내가 찍은 사진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한참을 생각하다가 그날의 기억을 떠올렸다. 그날 눈이 많이 내리던 날. 눈을 맞으며 출근하던 길에 잠시 멈춰 핸드폰 카메라로 찍은 사진이 생각났다. 그 짧은 숲길에서 눈을 맞으며 나는 무슨 생각을 했을까? 이 사진을 오래도록 들여다 보고 있었다. 저자가 왜 눈오는 날 개심사를 찾았을까? 그는 저 눈덮힌 산길에서 무슨 생각을 했을까?

 

길은 사람이 만든다. 그 길은 누가 걷는냐에 따라 성격이 달라질 것이다. 제주 올레의 큰 성공 이후 전국 여기저기서 걷는 길이 만들어졌다. 울진의 금강소나무숲길, 지리산 둘레길, 북한산 둘레길, 부산 이기대 갈매길 등 걷는 길들은 멋진 풍경과 함께 사색의 길로 들어서게 해준다. 평소에 생각지도 못했던 고민의 갈피를 붙잡기도 하고, 잘 안풀리던 일의 실마리를 찾기도 한다. 한동안 소원했던 누군가가 문득 그리워지기도 하고, 오랫동안 가보지 못했던 어떤 장소를 떠올리기도 한다.

 

이 책은 제목만 봐서는 제주 올레는 소개하거나, 좀 전에 언급한 걷는 길들을 다룬 책인 것 같지만, 실제로 차례를 살펴보면 그렇지 않다. 저자는 제주 올레길과 북한산 우이령길 뿐만 아니라 서울성곽과 혜화동 낙산공원, 수원 화성과 팔달문시장, 전주 한옥마을, 강화도 전등사, 부산 보수동 책방골목, 담양 소쇄원, 남한산성, 인천 자유공원 일대 등 다양한 공간에서 자신만의 올레길을 찾고 있다. 여기서 올레길은 단순히 걷는 길을 의미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것은 때로는 성찰이 될 수 있고, 때로는 위로가 될 수 있고, 때로는 사람내음이 될 수도 있는 것이다.

 

 

 

비경 따윈 없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어찌 없겠는가만, 보다 보면 오십 보 백 보일 테니, 그보단 자신에게 의미있는 나름의 '비경'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이 현명하다고 생각하는 게다. '그 시절' 그토록 벗어나고 싶었던 그 담벼락과 골목이, 이제는 사무치게 그리워지는 걸 보면 그게 맞는 것 같다.

 

                                                                         인연이 만든 비경 첫 구절

 

 

 

 

나만의 추억이 깃든 길은 어디일까? 나에게 위안을 주었던 곳은 어디였을까? 홀로 훌쩍 떠났던 몇몇 장소들도 떠오르고, 누군가와 함께 했던 어떤 기억들도 떠오른다. 그것은 그 날의 기분에 따라 달라질 것이다. 어떤 날에는 몽골 사막에서 바라보았던 밤 하늘의 별이 생각날 것이고, 또 어떤 날에는 여수 돌산 공원에서 내려다보았던 돌산대교가 생각날 것이고, 어느 날에는 설악산 아래 어느 민박집에서 혼자 소주잔을 비우던 밤이 생각날 것이다. 지금 나는 저 눈 내리는 숲의 모습이, 온통 흰 색으로 가득찬 숨막히는 풍경이 생각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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숲노래 2012-01-09 18:3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 님
좋은 길 이야기
하나하나 들려주셔요~

아마 그동안
수많은 좋은 길을 걸어 보셨겠지요~

감은빛 2012-01-10 16:18   좋아요 0 | URL
수많은 까지는 아니예요.
저 개인적으로 의미있는 길들은 제법 있을 것 같네요.
기억의 저편을 좀 방황하면서 찾아봐야겠지만요.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cyrus 2012-01-09 19:5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늦었지만 오랜만에 댓글 남겨봅니다. 먼저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 ^^
눈 쌓인 나무가 있는 사진이 정말 아름다워요. 눈 오는 겨울이라는 먼저 춥다는
생각 밖에 안 드는데 저 사진은 오히려 마음이 포근해지고 따뜻하게 느껴지네요.
눈 덮인 산길도 사람 키만하게 안 쌓인다면 걷는 것도 좋을거 같아요.
제가 추억하는 눈 덮인 산길이라면 제 군대 시절 혹한기 훈련 밖에 없네요 ㅎㅎ
그닥 좋은 추억도 아니었고요.. ^^;;




감은빛 2012-01-10 16:1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시루스님.
저도 요즘 통 다른 분들 서재 방문을 못해요.
먼저 인사 건네주셔서 무척 고맙습니다.
곧 답방 가겠습니다. ^^

제 혹한기 훈련도 그닥 좋은 추억은 아닙니다. ^^

차트랑 2012-01-10 18: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자신에게 의미있는 나름의 '비경'을 하나씩 만들어가는 것"
이 대목에 정말 공감하고 있습니다.
좋은 글 잘 읽었습니다.

감은빛 2012-01-17 13:01   좋아요 0 | URL
댓글을 보고서도 답글을 미처 달지 못하고 시간이 많이 지났네요.
늦어서 죄송합니다.

늘 자신에게 의미있는 것 만이 진짜 감동을 준다고 생각됩니다.
남들이 아무리 좋다고 해도 내가 느끼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없죠.
한눈에도 와! 하고 감탄할만한 멋진 풍경이야 없지 않겠지만,
아무도 눈여겨보지 않는 골목길이나 재래시장 같은 곳이
오히려 나만의 비경이 될 수도 있겠지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