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있다. 순간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짧은 머리칼을 한번 매만지고, 헛기침도 한 두번 해보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입을 벌리면서 안면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옷 매무새를 한번 만져보고 천천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다가갔다. 얼마 전부터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는 여성을 만났다. 처음엔 그냥 자주 보네 정도의 느낌만 가졌다. 이 버스는 우리가 타는 정류장에 올때쯤엔 늘 사람들로 꽉 차있다. 만원 버스라서 누가 먼저 타던 우린 바로 붙어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날엔 내가 그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가고, 어떤 날엔 등 뒤에서 그이의 시선을 느끼며 가곤 했다.

 

이틀 전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기에 무슨 일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이 버스는 경사가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이다. 과학 시간에 배운 관성의 법칙이 이런 걸까? 내 앞에 서 있던 그이가 다음 순간 내 품에 안겨있었다. "어머!"라고 높은 소프라노 톤의 비명이 버스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정작 내게 몸을 기댄 그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니 "아!"하고 작게 소리를 냈던 것 같기도 하다. 당황한 그이는 서둘러 몸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차기 기울어져 있어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안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팔을 살짝 벌려서 옆의 손잡이를 잡았다. 곧 버스가 출발하면서 그이는 몸을 바로 세웠으나, 다음 순간 다시 버스가 급하게 멈췄다. 그이는 또다시 내 품에 안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낯선 남자에게 두 번이나 안기다니! 처음과 달리 이번엔 거의 무방비여서 그이의 어깨가 내 가슴을 들이받을 때, 제법 충격이 느껴졌다. 버스는 시동을 다시 켜서 천천히 출발했다. 그이는 다시 몸을 일으켜 손잡이를 단단히 잡더니 내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마 5초쯤 되었을까? 그이가 안겨있던 그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만원 버스 안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얇은 면티셔츠를 통해 그이의 체온을 느꼈던 터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않는 척 했지만, 자꾸만 그이의 옆 얼굴을 훔쳐보게 되었다. 그이 역시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아마 내 쪽을 신경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문득 그이가 고개를 돌려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또 다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 그 눈빛을 마주 보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나를 보았을까? 내가 자길 힐끔거리는 게 기분이 나쁘다는 뜻일까? 지금도 보고 있을까? 짧은 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잠시 후 버스에서 우루루 사람들이 내렸다. 드디어 조금 여유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자세를 바꾸면서 그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던 그이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창밖으로 눈을 주고 있었다.

 

어제는 그이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평소보다 5분 늦게 나와 그 버스를 놓친 것이다. 사실 또 마주치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처음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수 없었다. 시간을 묻는 건 너무 뻔해보이고(우린 계속 같은 시간대에 같은 버스를 타고 있으니), 뜬금 없이 날씨 얘길 건네는 것도 웃기다. 뭔가 자연스레 말을 걸어볼 꺼리가 없을까? 고민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또 그이가 저기 버스 정류장 앞에 서있다.

 

 

 

그래. 너무 뻔해 보이긴 하지만 그냥 솔직하게 말을 걸어보자. 자주 마주치는데, 인사라도 한번 하고 싶다고 말이다. 그래서 반응이 괜찮으면 계속 말을 걸고, 반응이 좋지 않으면 그냥 그만두지 뭐. 생각은 이렇게 했지만, 막상 그이 근처에 다가서니 쉽게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몸은 더운데, 자꾸만 덜덜 떨렸다. 지금쯤 말을 걸어야 할텐데, 좀 있다 버스가 오면 기회를 놓치는데, 오늘은 꼭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자, 지금이야. 말을 걸어!

 

"저기"

"네?"

 

동그란 눈을 크게 뜨고 그이가 나를 본다. 놀란 듯한 표정.

 

"저, 저희 여기서 자주 마주치네요. 아침마다 계속 마주치니까, 인사라도 하면서 지내면 어떨까 해서요."

 

그이는 같은 표정, 같은 자세로 아무런 말이 없다.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침묵을 견디지 못하고 다시 뭔가 말을 꺼내야 할 것 같은 압박을 느낄 즈음, 그이가 입을 열었다.

 

"그러네요. 자주 뵈었던 것 같아요. 아, 그리고 엊그제는 죄송했어요."

"아, 아닙니다. 그 버스가 워낙 그. 그런 일이 자주 생기죠."

 

그이는 여전히 표정변화 없이 담담한 목소리로 사과하고, 고개를 숙였다. 나는 황급히 손을 내저으며 말하고는 뒷 머리를 긁으며, 애매한 웃음을 지었다.

 

그 뒤에도 매일은 아니지만 계속 그이와 마주쳤다. 난 반갑게 인사를 건넸고, 그이는 작은 목소리로 답하거나, 입은 열지 않고 그냥 고개만 숙여 인사했다. 하지만 인사를 나눈 후에 대화를 이어가지는 못했다. 뭔가 말을 걸어보고 싶은데 마땅한 꺼리가 생각나지 않았다. 게다가 어찌보면 무표정해 보이는 그이의 얼굴을 마주하면 왠지 말걸기가 어려웠다.

 

그 날도 우린 만원버스에 올라 사람들에게 틈에 간신히 끼어 있었다. 그날따라 기사 아저씨의 난폭운전은 극에 달했다. 버스는 빠른 속도로 달리다가 급하게 속력을 줄이고, 속도를 줄이지 않은 채로 크게 커브를 돌기도 했다. 그때마다 우리는 간신히 균형을 잡으며 사람들 틈에서 밀리고 또 밀렸다. 내리막 길에서 버스는 속도를 한껏 높였다. 버스가 기울어져서 사람들은 자연스럽게 한쪽 방향으로 쏠렸다. 문득 내 등을 짚는 그이의 손바닥이 느껴졌다. 다음순간 그이의 몸이 내 등에 닿았다.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이 닿은 후 그대로 체중이 실렸다. 손잡이를 잡은 팔에 힘을 꽉 주고, 앞으로 넘어지지 않으려고, 균형을 잃지 않으려고 애쓰며 버텼다. 이 내리막길이 이렇게 길었던가? 경사가 급한 크게 휘어지는 내리막길을 내려가는 내내 그이는 내게 기대어 있었다. 마침내 내리막길이 끝나자 내 등을 짚은 손바닥에 힘이 느껴지더니 등에 닿아있던 몸이 떨어졌다. 이마에 흥건한 땀을 손등으로 닦으며 아까 등에 닿았던 부드럽고 푹신한 느낌을 다시 한번 떠올렸다. 얼굴이 붉어졌다.

 

사람들이 많이 내려 차 안이 널널해졌을 때, 내가 앞 쪽 의자가 비었다. 나는 고개를 돌려 그이에게 보았다. 창밖을 바라보던 그이의 어깨를 살짝 건드렸다. 차분한 눈길이 돌아왔다. 나는 눈짓으로 빈 의자를 가르켰다. 그이는 잠시 생각하더니 사양하지 않고 어깨에 맨 가방을 벗으며 자리에 앉았다. 잠시 후 그이가 내 허벅지를 톡톡 건드렸다. 한 쪽으로 맨 내 가방을 가르키며 달라는 몸짓을 했다. 손을 내저으며 아니예요. 괜찮아요. 작게 말했다. 그래도 그이는 내 가방을 잡더니, 자기 무릎으로 당겼다. 아니. 괜찮아요. 근데 이거 무거울텐데. 억지로 내 가방을 무릎 위 자신의 가방 위에 올린 그이는 창 밖으로 눈을 돌렸다. 무얼 보는 걸까? 무슨 생각을 하는 걸까? 가만히 그 옆 얼굴을 살폈다. 선이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문득 묶어 올린 머리칼을 만져보고 싶다는 생각을 했다가 퍼뜩 정신을 차렸다.

 

그 해 여름 내내 같은 버스정류장에서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함께 탔던 우리는 잠시 사귀다가 여름이 끝나 가을로 넘어가던 무렵 헤어졌다. 나는 버스를 타는 시간대를 늦췄고, 그 후로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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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락방 2013-03-13 15:2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지난번 새벽의 글도 그렇고, 이 글도 좋아요, 감은빛님.
:)

감은빛 2013-03-14 17:52   좋아요 0 | URL
다락방님께서 좋아해주시니 영광입니다! ^^
 
생명공학 소비시대 알 권리 선택할 권리 - 한국인 식탁에 등장하는 GMO와 복제 쇠고기를 둘러싼 쟁점
김훈기 지음 / 동아시아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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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가을 [동물해방]을 읽은 후 스타워즈 프리퀄의 첫 시작인 [보이지 않는 위험]을 언급하면서 글을 썼다. 이번에도 역시 이 영화의 제목으로 글을 시작한다. 저자는 서문에서 GMO와 복제 동물 식품의 특징 두 가지를 언급한다. 첫 번째는 ‘위험이 예측되지 않는다는 점’이라고 했고, 두 번째는 ‘위험의 대상인 식품이 소비자 눈에 잘 띄지 않는다는 사실’이라고 했다. 이 두 특징을 한 마디로 줄이면 바도 ‘보이지 않는 위험’이다. 이것이 바로 현대 식품산업이 갖고 있는 가장 큰 특징이라고 볼 수 있다.

 

눈에 보이고 어느 정도 예상되는 위험과 보이지 않고 예측하기 어려운 위험 중에 어떤 것이 더 위협적일까? 단연 후자라고 생각한다. 예를 들어 방사능이 황사처럼 눈에 보인다면 그래도 조금은 덜 무서울 수도 있을 거라 생각한다. 적어도 볼 수 있고, 가능한 한 노출이 덜 되도록 피할 수 있을 테니까. 하지만 인체에 치명적인 위험을 끼치는 방사능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 위험을 쉽게 인식하지 못하고, 심지어는 그 위험 자체를 부정하거나 무시하기도 한다.

 

굳이 손자병법을 언급하지 않더라도, 무섭고 치명적이면서 보이지 않는 적에게 대응하기 위해서는 조금이라도 더 알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어렵고 복잡해보이는 이 생명과학의 영역에 발을 들여놓기 위해서는 많은 용기가 필요하다. 특히 과학에 대해 기초 지식이 부족한 나로서는 더욱 망설여질 수 밖에 없었다. 다행히 이 책은 아무런 배경 지식이 없는 내가 읽기에 크게 어려움이 없을 정도로 설명을 잘 해준다. 내용이 쉬운 것은 아니지만 이해하기 쉽게 단계를 밟아가며 차근차근 설명해준다. 친절한 설명과 예를 따라가다보면 어느새 고개를 끄덕이게 된다. 이것이 이 책이 가진 가장 큰 장점이자 매력이다! 더불어 이 책은 2013년 1월 현재 한국 생명공학의 최신 뉴스와 쟁점들을 모두 모아 잘 정리해주었다. 쉽고 친절한 설명에 이어 다루어야 할 꺼리들을 모두 다 담아냈다면 더 생각할 필요도 없이 최고라는 말을 붙여줘도 좋겠다.

 

책은 GMO라는 용어에 대한 정리부터 시작한다. 과학 용어도 상당히 정치적이라는 사실을 알려주면서 각자의 관점에 따라 다르게 부르는 다양한 용어를 알려준다. 그리고 Q&A 형식으로 우리가 자주 궁금해하고 혼동하는 내용들을 정리했다. 이거 정말 처음부터 큰 도움이 되었다. 유전자 조작(변형)을 통한 농산물과 육종을 통한 농산물의 차이부터 왜 그 많은 GMO가 한국 소비자들 눈에는 잘 안보이는지까지 하나하나 잘 몰랐던(하지만 꼭 기억해두어야할) 사실들을 알려주었다.

 

다음으로 우리나라와 같은 GM 농산물 수입국의 쟁점을 다루고 있는데, 이 부분이 이 책의 핵심이다. 저자에 의하면 우리는 세계에서 다섯 번째로 GM 농산물 승인 건수가 많다. GM 농산물을 직접 재배하는 나라들을 제외하고, 우리처럼 순수 수입만 하는 나라 중에서는 무려 2위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앞에서도 얘기했듯이 우리는 그 실태를 잘 모르고 있다. GM 농산물을 수입하기 위해서는 먼저 인체에 유해한지를 잘 검증하고, 생태계 교란 가능성에 잘 대비하고, 정부의 심사 과정이 제대로 이뤄질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춰야 한다. 아울러 GM 농산물 표시제에 의해 소비자들이 반드시 알고 선택하도록 해야 한다. 하지만 알다시피 우리는 수입국의 입장에서 이러한 쟁점들을 잘 대비하지 못하고 있다. 하루빨리 개선되어야 할 내용이다.

 

개인적으로 가장 재밌는 부분은 두 번째 챕터인 GM 농산물을 만드는 과정이었다. 처음 듣는 용어들을 친절하게 잘 설명해주었고, 각 진행과정 역시 상세하게 알려주어서 흥미롭게 읽었다. 또 복제 동물의 위험성에 대한 부분도 흥미로웠다. 오랜만에 황우석이란 이름을 되새겨 보기도 했다.

 

우리는 우리 식탁에 오르는 식품들에 대해 잘 알고 선택할 권리가 있다. 저자가 이 책을 쓴 이유다. 이 보이지 않는 적에 대해 친절하고 쉬운 설명을 들려준 저자에게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 곧 우리나라가 GM 농산물을 재배하는 생산국이 될 수 있다는 사실과 곧 우리 밥상에 복제 쇠고기와 같은 복제 동물의 고기가 올라올 수 있다는 사실을 생각하면 정말 끔찍하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이 지금 널리 읽히고, 소비자 단위에서 공론화가 필요하며, 이를 바탕으로 다양한 층위에서 대책이 마련되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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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 못 드는 밤

 

시끄러운 음악 소리가 귀를 울렸다. 맞은 편에 앉은 후배가 전화기를 꺼내더니 몸을 일으켰다. 나와 내 옆의 친구에게 고개를 숙여 양해를 구한 후배는 황급히 술집 밖으로 나가면서 전화기를 귀에 갖다 댔다. 음악 소리 때문에 제대로 듣진 못했지만 한참 떠들어대던 후배 녀석이 자리를 비우고 나니 대화가 끊겼다. 친구 녀석은 술잔을 들어 올렸고, 나는 고개를 끄덕이며 쓴 소주를 입에 털어 넣었다. 통화가 길어지는 건지, 한참이 지나도 돌아오지 않는 후배를 기다리며 나도 울릴 리가 없는 전화기를 꺼내보았다.

 

화장실을 갔다가 테이블로 돌아오려다가, 귀를 울리는 음악 소리 때문에 머리가 멍해서 잠시 바람을 쐬려고 술집 밖으로 나섰다. 밤인데도 더운 열기가 확 얼굴을 덮쳤다. 담배를 피워물고 잠시 하늘을 올려다보는데, 저쪽에서 아까 나간 후배와 또 한 사람이 걸어왔다. 서너 살 어린 여자 후배였다. 학생회 일로 몇 번 얘길 나눠본 적이 있었는데, 제법 호감 어린 눈길로 바라보던 친구였다. 그런데 아까 한창 영양가 없는 얘길 떠들다 나갔던 후배 녀석이 이 친구의 어깨에 손을 얹고 있었다.

 

알고 보니 둘은 전부터 사귀는 사이였다고,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둘이 먼저 술집으로 들어가고 담배를 마저 피우다가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술집에선 또다시 남자 후배 녀석이 떠들어대고 있었다. 그 옆에 다소곳이 앉은 여자 후배. 원래 그렇게 조용한 성격이었던가. 남자 친구 옆이라고 저러고 있는 건가. 애초에 별로 끼고 싶지 않은 자리였건만, 이제 더 앉아 있고 싶은 생각이 사라졌다. 남아있던 술잔을 급히 비우고, 가방을 챙겨 들고 나섰다. 깜짝 놀란 후배들과 친구에게 피곤해서 그런 거라고 둘러대고 등을 돌렸다.

 

학교 앞 자취방은 언덕길을 이십여 분 걸어 올라가야 했다. 술을 한 병 사서 갈까 말까. 고민하며 담배를 빼어 물고 걷는데, 이미 걸음이 비틀거리고 있었다. 벌써 제법 취했구나. 원치 않는 술자리에선 말도 별로 안 하게 되고, 괜히 술만 더 빨리 들이켜게 된다. 비틀거리는 발걸음마다 자꾸만 떠오르는 얼굴이 있었다. 1년 반을 만났던 여자. 2달 전에 헤어진 여자. 어지러운 정신에 그 여자와 아까 만났던 여자 후배의 얼굴이 겹쳤다. 전혀 닮지 않은 두 사람인데, 왜 그 아이를 보고 그녀가 떠오르는 걸까? 난 단지 후배들을 질투하는 것인가?

 

 

 

결국, 소주와 과자 하나를 사서 자취방으로 들어섰다. 가방을 던져놓고, 땀에 젖은 옷을 벗어서 방구석에 내팽개치고, 욕실로 들어가 샤워했다. 찬물을 맞으니 조금은 취기가 가시는 듯했다. 몸을 제대로 닦지도 않고, 물이 뚝뚝 떨어지는 채로 방으로 들어섰다. 옷을 입기도 전에 잔을 찾아 술을 따랐다. 짜릿한 감각이 식도를 타고 내려갔다. 담배를 피워물고 맨바닥에 드러누웠다.

 

자꾸만 그녀의 옆얼굴이 떠올랐다. 가만히 눈을 내려 책을 보던 그 얼굴. 옆에서 빤히 쳐다보는 나를 의식하고 있을 텐데, 책에만 눈길을 주고 있던 그 얼굴, 간혹 손을 들어 귀밑머리를 넘기면서도 눈길을 계속 책에 주고 있던 그 얼굴. 손을 뻗어 머리칼을 만지고, 뺨을 쓰다듬어 주고 싶었지만, 그 조용한 모습을 흩트리고 싶지 않아 참고 또 참았던 바로 그 순간이 자꾸만 떠올랐다.

 

소주 몇 잔을 거푸 마시고, 과자를 씹고, 담배를 몇 대 피우다 보니 시간은 새벽 1시 15분. 자꾸만 전화기로 손이 가는 것을 참고 또 참았건만, 어느새 전화기가 손에 쥐어져 있다. 울리지 않는 전화. 울릴 리가 없는 전화. 헤어지고 며칠 후 술에 취해 새벽에 전화를 걸었고, 그 다음 날 아침 머리를 벽에 박아대며 전화번호를 지워버렸건만, 어느새 머릿속에 입력되어 버린 그 번호는 잊고 싶어도 쉽게 잊히지 않았다. 다른 번호는 절대 못 외우건만, 심지어 십 년 넘게 같은 번호를 쓰고 있는 집 전화번호도 못 외우건만, 왜 그 번호는 잊히지 않는 걸까?

 

참아야 해! 참아야 해! 술 기운에 전화를 하고 싶진 않아! 아니 전화해서 무슨 말이 하고 싶은 거야? 보고 싶다고? 사랑한다고? 더는 유효하지 않은 말들을 함부로 내뱉지는 말자! 아무리 머릿속으로 생각을 해도 손은 어느새 전화기 폴더를 열었고, 손가락은 익숙한 그 번호를 누르고 있었다. 젠장! 전화기를 벽에 던져버리고 남은 술을 입에 던지듯 털어 넣었다. 젠장! 오늘도 또 취하지 않으면 잠들지 못하는 여름밤이다.

 

==========================================================================

 

나는 새벽 1시에서 2시 사이에 감정적으로 가장 예민해진다. 그 시간까지 잠들지 못하는 경우가 종종 있고, 그런 날이면 거의 술을 한잔 마신 날이다. 어제도 그랬다. 후배 하나가 술을 사달라고 해서 12시까지 술을 마시고, 돌아와서 씻고, 컴퓨터를 켠 시간이 대략 1시였다. 뭔가를 끄적거리려고 문서 창을 하나 띄워놓고, Lady Antebellum 의 Need You Now 를 들었다. 한동안 자주 듣던 음악. 언젠가 이 노래로 글을 하나 써야지 싶었는데, 시간을 보내 딱 1시 15분이다.

 

Its a quarter after one, I'm a little drunk,
And I need you now.
Said I wouldn't call but I lost all control and I need you now.

 

이 가사를 오래 되새기며 자판을 두드려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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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극곰 2013-03-08 09:1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남자 후배에겐 썩 좋지 않은 감정을, 여자 후배에겐 제법 좋은 감정을 갖고 있던 터라 이야기를 듣는 순간부터 불쾌해졌다." 이것만큼 짜증나는 일은 없죠. :)

감은빛 2013-03-08 13:29   좋아요 0 | URL
그렇죠? ^^
오늘 서울은 미세먼지 비상이라더니,
목이 칼칼하고 눈도 불편하고 그러네요.
환절기에 감기 조심하시고, 즐거운 주말 보내시길 바랍니다!
 
몸에 대한 이야기
고미숙의 몸과 인문학 - 동의보감의 눈으로 세상을 보다
고미숙 지음 / 북드라망 / 2013년 1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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며칠 전 친한 선배네 돌잔치에 다녀왔다. 막내아들의 돌이었다. 위로 딸이 둘 있고 아들이 셋째다. 덩치 큰 선배가 한복을 입고 검은 두루마기를 입고 있었다. 이렇게 말하면 좀 미안하지만, 돌잔치를 치르는 아빠라고 하기엔 좀 나이가 많아 보였다. 실제로 나이가 많긴 하다. 40대 초반이니까 아마 우리 아버지 세대였다면 벌써 큰 애가 대학을 갔을 수도 있는 시기다. 실제로 예전에 나를 많이 아껴주고 챙겨주셨던 형님은 40대 초반에 큰딸이 대학생이었다. 그 딸은 대학을 졸업하고 결혼해서 아이도 낳았고 덕분에 그 형님은 40대 후반에 벌써 할아버지 소릴 들었다.

 

요즘 전반적으로 결혼과 출산의 시기가 너무 늦춰지고 있다는 생각이 든다. 물론 사람에 따라서 일찍 결혼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고, 늦게 하는 사람도 있을 수 있으며, 결혼을 하지 않는 사람도 있을 수 있다. 다만 사회의 분위기가 일찍 결혼하기 어려워지는 것은 문제라고 본다. 이른바 ‘3포 세대’ 라는 말을 청년들이 많이 한다고 들었다. 연애와 결혼 그리고 출산을 포기한 세대라는 말이다. 결혼과 출산은 뭐 개인의 선택에 따라 더 늦게 할 수도 있고, 하지 않을 수도 있지만, 연애마저 포기라니! 그 반짝반짝 빛나는 나이에 연애를 포기한다니! 게다가 연애를 포기하는 이유가 돈이 없어서라니. 이 얼마나 서글픈 말인가.

 

게다가 대학과 대학원, 공무원 고시를 비롯한 각종 시험 및 취직 준비로 사회 진출 시기마저 점점 늦춰지고 있다. 최근 누군가에게 들었는데, 요즘 젊은 세대는 이전 세대와 비교하려면 실제 나이에서 10살 정도 빼고 생각해야 적당하다고 했다. 확실히 요즘 서른 살 언저리의 후배들을 보면 김광석의 ‘서른 즈음에’ 와는 다르다고 느껴진다.

 

이 책에서 고미숙 선생은 [동의보감]을 인용하면서 “여성의 생체 주기는 7단위로 변화한다.”고 했다. 14세에 초경을 하고, 49세에 폐경이 된단다. 그리고 “남성은 8단위다.”라고 말하면서 16세부터 남자가 되고, 64세에 생식력이 그친단다. 그래서 여성은 14세, 남성은 16세부터 성인이라고 했다. ‘이팔청춘’이란 말은 여기서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20세기가 되기 전에는 모두 이팔청춘에 혼례를 올렸다고 했다.

 

그러고 보면 나는 딱 그 나이 때 내가 충분히 한 사람 몫을 해내는 성인이라고 생각했다. 학교에만 갇혀서 어른들(부모와 교사들)이 바라는 삶을 살아가야 하는 현실이 무척 끔찍했다. 쓸데없는 죽은 지식을 외우기 위해 아까운 시간을 버리기보다는, 다른 의미 있는 일을 하고 싶었다. 책을 읽고 싶었고, 몸을 써서 일을 하고 싶었고, 맘껏 놀고 싶었다.

 

좋은 대학을 가기 위해, 좋은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남들보다 더 빨리 진급하기 위해, 좀 더 좋은 조건의 사람을 만나고 결혼하기 위해, 좀 더 넓은 집과 큰 차를 가지려고 우리는 얼마나 많은 시간을 허비하고 있을까? 이 끝없는 경쟁의 구조에서 한 발만 벗어나서 생각해본다면 이게 얼마나 어리석고 무의미한 짓인지 잘 알 수 있을 것이다. 신체적으로, 정신적으로 십 대 후반이면 이미 성인과 크게 다르지 않다. 스스로 판단하고 그 판단에 대해 책임질 수 있는 나이다. 그렇다면 사회의 분위기와 다른 사람들의 시선과 관계없이 알아서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으리라. 더 이상의 헛된 교육과 쓸데없는 준비는 필요 없다. 그저 온 몸으로 삶에 부딪쳐나가면 그 뿐이다. 상처가 났다가 다시 아물고, 넘어졌다가 다시 일어서면서 사는 것이 더 현명하고 자연스러운 일이다.

 

그럼에도 다 자란 청년이 아직도 덜 자란 어린이처럼 보호받고, 간섭받고, 스스로 인생을 결정하지 못하고, 서른 살이 넘어서야 사회 활동을 시작하고, 마흔이 다 되어야 결혼하고 아이를 낳는 지금 현재의 모습은 참 비정상적이다. 이는 생태적으로 생각해본다면 엄청난 낭비인 셈이다. 이렇게 이 사회는 전혀 자연스럽지 않고, 바람직하지 않은 질서로 돌아가고 있지만, 대개는 그것을 자연스럽고 바람직한 것으로 받아들이고 있다.

 

그냥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고 살아갔으면 좋겠다. 몸이 다 자랐으면 성인으로 받아들여서 모든 결정권을 줘야 한다. 투표권도 주고, 직업도 갖게 하고, 결혼도 할 수 있게 해야 한다.(이미 이 나이 때의 학생들은 이성교제도 하고, 알바도 뛰고 있고, 어른들보다 더 많은 정보를 갖고 있고, 현명한 판단을 내릴 줄도 안다.) 그러기 위해서는 현재의 초등학교와 중학교 교육도 물론 바뀌어야 한다. 지금처럼 경쟁과 입시만을 위한 방식이 아닌 정말로 살아가는 것, 즉 삶에 대해 가르쳐야 한다.

 

이 책은 몸을 화두로 해서 내 삶과 정치와 경제 그리고 사회 현상에 대해 이야기한다. 읽다 보면 우리가 몸에 대해 참 무지하다는 사실을 깨닫고, 사회가 각 개인이 몸에 대해 생각하고 탐구하지 못하도록 만들어가고 있다는 섬뜩한 현실을 깨닫게 된다. 신문연재를 묶은 것이라 글 하나의 호흡이 짧고 간결하다. 군더더기가 없어서 좋을 수도 있지만, 이야기를 꺼내다 만 느낌이라 아쉽기도 하다. 개인적으로 곁가지가 좀 뻗었다가 돌아오고, 곧장 가지 않고 굽이굽이 돌아가는 글을 좋아하는 편이라 아쉽다는 느낌이 남는다. 어쨌거나 고미숙이란 이름만으로 이미 그 내용이 보장되는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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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 몸에 대한 이야기
    from 가보지 못한 길 2013-03-06 15:34 
    추운 날 "아 뚜" 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찬 바람이 쌩! 아가는 금방 얼굴을 찡그리며 '아 뚜'를 연발한다. "우리 예쁜이가 추워요?"라고 물으면 고개를 끄덕이며 "응" 하고 답한다. 비탈길을 내려간다. 아가는 내 어깨를 감싸안으며 다시 한번 "아 뚜"하고 소리를 낸다. 아가의 소리에 대답하듯 나도 "아이 추워!"하고 과장이 섞인 말투로 따라한다. 그리 먼 거리가 아닌데, 어린이 집에 도착할 때쯤되면 아가의 뺨은 이미 얼음장처럼 차갑다. 희고 차가운
 
 
blanca 2013-03-07 10:08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는 얼마 전 친구 결혼식에 다녀왔는데 남편이 40대 초반이었답니다.^^;; 축가를 불러주는 친구들 머리도 희끗희끗했어요. 아직 결혼 안한 친구들도 제법 있고요. 점점 성인이 되는 나이도 부모로 독립하는 나이도 늦어지는 것 같은데 이게 사회의 추세이긴 하지만 몸의 성숙이나 노화 나이와는 분명 맞지 않는 것 같아요. 수명도 늘어가고 있긴 하지만 노화 그 자체의 속도가 늦어지는 것은 아니니까요. 고미숙 씨 글은 술술 잘 읽히는 것 같아요. 리뷰 잘 읽고 갑니다.^^

잘잘라 2013-03-07 17:25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즘 이 책 읽어요. 화장실에서 한개씩 읽기 딱 좋아요. ^^;;

감은빛 2013-03-08 12:29   좋아요 0 | URL
그렇네요! 화장실에서 한 꼭지씩 읽기 딱 좋네요.
이게 원래 신문 연재꼭지여서 그런 듯 해요.

단발머리 2013-03-07 19:2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안녕하세요, 감은빛님. 저도 이 책 읽고 있어요. 재미있어서 한 개씩 아껴써요.
생체 주기 이야기 너무 실감나요. 고미숙님 해석이 수긍이 되구요.
저는 곧 성인 자녀를 둔 중년 주부 되나요? ㅍㅎㅎ
리뷰 잘 읽고 갑니다~~~ 그럼 안녕히~~~

감은빛 2013-03-08 13:09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단발머리님.
하나씩 읽어나가는 재미가 있는 책이죠.
나중에 관련있는 꼭지만 찾아 읽기도 좋구요.

자녀가 곧 청소년기에 들어서나요?
스스로의 권리와 책임을 잘 알려주고,
친구같은 부모가 되시면 좋겠어요!
저도 그런 부모가 되면 좋겠다고 생각하거든요.

글 읽어주시고, 말씀 남겨주셔서 고맙습니다!

북극곰 2013-03-08 09:0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요 책 읽고 있어요. :)
지난 번 감은빛 님 페이퍼에서 보고 사놨다가 요즘처럼 정신없는 와중에 후다닥 읽고 있지요. '나운설'이랑 '..누드 글쓰기'를 재밌게 읽었는데 중복되는 내용도 많고... 저도 요 책은 살짝 아쉬워요.

잘 지내시죠?
저는 큰 아들 초등입학에 작은 딸 유치원 입학에 아주 정신없는 나날입니다.

감은빛 2013-03-08 13:17   좋아요 0 | URL
안녕하세요. 북극곰님.
아, 제 글을 통해 구매하셨다니, 조금 책임감을 느끼게 되네요.
네, 말씀하신 것처럼 중복되는 내용들이 좀 있죠.
저자 스스로 말한 것처럼 '동의보감'이란 하나의 재료를 갖고,
3번째 쓴 책이라서 아마 더 그런 것 같아요.

아들과 딸의 입학을 축하드립니다!
아이들도 부모도 정신 없는 날이겠어요.
저희 집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새학기라 선생님이 바뀌어서 아이도 부모도 모두 적응해야 하니까요.
큰아이는 1학년때는 거의 정년퇴음을 앞둔 나이많은 선생님이었는데,
이번 2학년에는 젊은 선생님을 만났어요.
작은아이는 작년에 같은 반의 친구 숫자가 적었고,
선생님도 한 분이었는데,
이번에는 친구들이 확 늘어났고, 선생님도 두 분으로 바뀌었구요.
작은아이는 선생님이 바뀐 영향이 바로 나타나네요.
요며칠 계속 집에서 짜증을 많이 내고, 어리광을 많이 부리네요.
시간이 해결해주겠죠.
그때까지 잘 쓰다듬어주고 도닥여줘야겠습니다.

순오기 2013-03-10 10:0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이 책은 읽어보지도 않고, 이웃 작은도서관 동아라 '역학연구회'에 추천했는데...
제가 읽어보고 싶은 책이기도 하고요.^^

감은빛 2013-03-11 13:20   좋아요 0 | URL
글의 호흡이 짧아 쉽게 읽히는 책입니다.
일단 시작하면 금방 읽으실 거예요.
 
나를 부르는 숲 - 미국 애팔래치아 산길 2,100마일에서 만난 우정과 대자연, 최신개정판
빌 브라이슨 지음, 홍은택 옮김 / 동아일보사 / 2008년 3월
평점 :
구판절판


마치 비를 흠뻑 맞은 것처럼 온몸이 땀으로 젖었다. 젖은 머리칼이 자꾸 이마에 달라붙었다. 코로 흡입하는 산소로는 도저히 터질듯한 허파를 채우지 못해 입으로 가쁜 숨을 쉬어야 했다. 한발 한발 오르는 발걸음이 무거웠고, 허벅지와 종아리 근육이 비명을 질러댔다. 무거운 배낭은 어깨를 짓눌렀다. 눈으로 흘러내리는 땀방울을 닦기 위해 손등을 가져가는 동작조차 힘겨웠다. 무엇보다 목이 타들어 갔다. 물은 다른 일행의 배낭에 들어있었다. 내 배낭엔 쌀과 참치캔 등 식사거리만 잔뜩 들어있었다. 설마 다른 일행들과 떨어지리라곤 상상도 못했었다. 물을 딱 한 방울만 마셔도 소원이 없을 것 같았다. 철퍼덕 바닥에 쓰러져버리고 싶은 마음을 간신히 다잡고 한발씩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빌 브라이슨의 『나를 부르는 숲』을 읽다가 오래된 옛 기억이 떠올랐다. 그와 그의 친구 카츠가 무거운 배낭을 메고 숲과 언덕을 걸어가는 모습이 마치 그날의 내 모습처럼 느껴졌다. 대학 1학년 때, 설악산이었다. 어려서부터 산동네에서 자랐고, 산을 자주 오르내렸기에 산행은 자신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일행과 떨어져 혼자라는 것을 깨닫게 되면서부터 조바심을 내기 시작했고, 곧 페이스를 잃어버려 거의 탈진 직전의 상황까지 갔다. 초반에 카츠가 힘들어하는 모습을 조소를 보내며 읽다가, 곧 그때의 내 모습을 떠올리고는 부끄러워졌다. 또 산행을 이어가면서 다양한 상황들이 등장할 때마다 다른 기억들도 떠올랐다. 영하의 날씨와 폭설로 힘들어하는 모습을 읽을 때는 군대에서 겪었던 한겨울 혹한기 훈련이 생각났고, 며칠씩 비를 맞아가며 걷는 모습을 읽을 때는 여름 유격훈련이 생각나기도 했다.

 

빌 브라이슨과 카츠가 시도했던 ‘애팔래치아 트레일’은 험난한 산길을 3천 360킬로미터를 걷는 것이다. 역자 후기에 의하면 백두산에서 지리산까지 백두대간을 종주한다면 대략 1천 400킬로미터 가량 될 거라고 한다. 애팔래치아 트레일의 절반도 안 되는 거리다. 그리고 책 마지막에 빌 브라이슨 스스로 걸었다고 밝힌 거리와 거의 비슷하다.(그는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1천 392킬로미터 걸었고, 그건 전체 길이의 39.5%밖에 안 된다고 한다.)

 

비록 도중에 차를 얻어타거나, 택시를 타고 일부 구간을 건너뛰기도 했고, 바쁜 일 때문에 몇 달을 집으로 돌아와 지내기도 했고, 결국 종착지인 캐터딘을 밟지 못했지만, 그들은 온 힘을 다해 걸었다. 그것은 분명 그들의 인생에서 아주 중요한 전환점이 되었을 것이다.

 

친하게 지냈던 후배는 대학 졸업을 1년 앞두고 학교를 그만두는 중요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하고 싶은 일을 하기 위해 지금껏 막대한 등록금과 시간을 바친 학교를 떠났다. 그 결단을 내리기 전에 부산에서 강원도 양구(자신이 군 생활을 했던)까지 걸었다. 당시에 나는 왜 그런 짓을 하는지 이해하기 어려웠다. 후배는 더위에 시달리고, 비를 맞으며 약 한 달을 걸었다. 돌아와서 홀가분한 마음으로 학교를 정리했다.

 

이 책을 읽고 나서야 빌 브라이슨과 카츠와 그들이 만난 수많은 종주객들과 양구를 행해 걸었던 후배가 부러워졌다. 그리고 최근 몇 년간 제주 올레를 시작으로 전국 곳곳에 걷는 길이 유행되는 현상도 이해가 되었다. 사람은 걷다보면 절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6개월이나 애팔래치아를 걸을 수는 없겠지만, 가깝게 갈 수 있는 산과 숲을 자주 걸어봐야겠다는 생각을 해본다.

 

주위에서 많은 사람들이 공통으로 추천한 책이었다. 단순히 애팔래치아 트레일을 걸었던 경험만을 담아낸 책은 아니다. 빌 브라이슨의 다른 책을 읽었다면 아마도 잘 알 것이다. 특유의 위트와 유머 그리고 방대한 지식과 성찰이 엮인 훌륭한 작품이다. 그와 카츠의 좌충우돌 여행기도 재미있지만, 국가 정책이나 자본주의 문명 자체를 시니컬하게 비판하는 대목들도 흥미롭다. 가끔 등장하는 마치 신문기사 같은 느낌의 구체적인 사건사례나 역사적 지식들도 이 책을 풍성하게 만들어주는 감초 역할을 해준다. 가장 중요한 것은 숲과 자연을 존중하는 그의 철학적 태도와 사색들이다. 이 책을 통해 알게 된 여러 지식과 그를 관통하는 위대한 사색에 감사하는 마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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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크pek0501 2013-02-18 13:52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사람은 걷다보면 절로 복잡한 생각과 마음을 정리하고 또 새로운 결심을 굳히게 되는 것이 아닐까 싶다."

- 맞아요. 저는 아주 춥거나 비 많이 오는 날을 빼면 거의 하루 한 시간을 걷는 날이 많은데, 생각 정리에 정말 도움이 많이 되어요. 스트레스 해소에도 좋다고 의사가 말하던데요, 그건 걸으면서 심각한 생각을 하는 사람은 없어서래요. 걷는 건 한가롭게 머리를 식히는 행위라고 하네요. 산책의 효용이 되겠죠. 걸으면서 어떤 아이디어가 떠오르기도 해요.
걷는 건 몸과 마음의 건강을 찾는 일이라고 생각하는 바입니다. 2005년부터 걷는 취미를 가진 자로서 드리는 말씀입니다. ^^

감은빛 2013-03-06 15:44   좋아요 0 | URL
답이 엄청나게 늦었네요! 죄송!

걷는 취미를 갖고 계시다니, 좋네요!
저도 평소 지하철역이나 버스정류장 두세 개 거리는 걸어다녀요.
좀 빨리 걸으면, 그리 시간차이가 나지도 않더라구요.

걷다보면 자꾸 글감이 떠오르는데,
빨리 컴퓨터 앞에 앉아서 자판 두드리고픈 생각이 듭니다.
그런데 막상 돌아와서 앉으면 또 멍하니 빈 화면을 보고 있기도 합니다.

순오기 2013-02-19 20:2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저도 바쁘지 않으면 한 시간 정도의 거리는 걸어갑니다.
생각도 정리하고 운동도 하는 일석이조의 시간이죠.
이 책 우리 도서관에서도 구입해야겠어요.
3월부터 11명의 숲해설가들이 지역아동센터 아이들과 매달 1회의 숲해설 프로그램을 진행하게 되었어요. 그래서 생태관련 도서를 더 장만하려는데 좋은 책 소개 고맙습니다!
두 공주님들은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지요? 많이 컷겠네요.^^

감은빛 2013-03-06 15:56   좋아요 0 | URL
답이 늦어 죄송합니다!
순오기님도 많이 걸으시네요.
생태관련 도서를 저도 많이 읽으려하는데,
시간도 부족하고 게으리기도 하고 생각만큼 잘 안되네요.

큰아이는 초등 2학년이구요.
작은아이는 어린이집 잘 다니고 있어요.
기억해주셔서 고맙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