저기 있다. 순간적으로 몸이 긴장했다. 짧은 머리칼을 한번 매만지고, 헛기침도 한 두번 해보고, 얼굴을 찡그렸다가 입을 벌리면서 안면근육의 긴장을 풀었다. 옷 매무새를 한번 만져보고 천천히 버스 정류장을 향해 다가갔다. 얼마 전부터 아침마다 같은 시간에 같은 버스를 타는 여성을 만났다. 처음엔 그냥 자주 보네 정도의 느낌만 가졌다. 이 버스는 우리가 타는 정류장에 올때쯤엔 늘 사람들로 꽉 차있다. 만원 버스라서 누가 먼저 타던 우린 바로 붙어 있게 되는 경우가 많다. 어떤 날엔 내가 그이의 정수리를 내려다보면서 가고, 어떤 날엔 등 뒤에서 그이의 시선을 느끼며 가곤 했다.
이틀 전이었다. 오르막길을 오르던 버스가 갑자기 급정거를 했다. 사람들 틈에 끼어 있었기에 무슨 일인지는 알수 없었지만, 이 버스는 경사가 급한 오르막과 내리막을 오르내리기 때문에 자주 있는 일이다. 과학 시간에 배운 관성의 법칙이 이런 걸까? 내 앞에 서 있던 그이가 다음 순간 내 품에 안겨있었다. "어머!"라고 높은 소프라노 톤의 비명이 버스 여기저기서 터져나왔다. 정작 내게 몸을 기댄 그이는 아무런 소리도 내지 않았다. 아니 "아!"하고 작게 소리를 냈던 것 같기도 하다. 당황한 그이는 서둘러 몸을 바로 세우려 했지만 차기 기울어져 있어서 쉽게 빠져나오지 못했다. 나는 의도치 않게 안은 모양새가 되어버린 팔을 살짝 벌려서 옆의 손잡이를 잡았다. 곧 버스가 출발하면서 그이는 몸을 바로 세웠으나, 다음 순간 다시 버스가 급하게 멈췄다. 그이는 또다시 내 품에 안겼다. 얼굴이 보이지 않아, 표정은 알 수 없었지만 아마 무척 당황했을 것이다. 낯선 남자에게 두 번이나 안기다니! 처음과 달리 이번엔 거의 무방비여서 그이의 어깨가 내 가슴을 들이받을 때, 제법 충격이 느껴졌다. 버스는 시동을 다시 켜서 천천히 출발했다. 그이는 다시 몸을 일으켜 손잡이를 단단히 잡더니 내 쪽을 향해 살짝 고개를 숙여보였다. 아마 5초쯤 되었을까? 그이가 안겨있던 그 짧은 시간이 무척 길게 느껴졌다.
뜨거운 여름이었다. 만원 버스 안은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흘렀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얇은 면티셔츠를 통해 그이의 체온을 느꼈던 터라,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의식하지 않는 척 했지만, 자꾸만 그이의 옆 얼굴을 훔쳐보게 되었다. 그이 역시 모르는 척 하고 있지만 아마 내 쪽을 신경쓰고 있을 것이다. 그렇게 얼마나 갔을까? 문득 그이가 고개를 돌려 차분하고 조용한 눈빛으로 나를 보았다. 또 다시 얼굴이 확 달아오르는 느낌. 그 눈빛을 마주 보기가 어려워 고개를 돌렸다. 왜 갑자기 나를 보았을까? 내가 자길 힐끔거리는 게 기분이 나쁘다는 뜻일까? 지금도 보고 있을까? 짧은 시간 별의별 생각이 다 들었는데, 잠시 후 버스에서 우루루 사람들이 내렸다. 드디어 조금 여유가 생겼다. 자연스럽게 보이길 바라며 자세를 바꾸면서 그이 쪽으로 눈을 돌렸다. 어? 그런데 바로 옆에 있는 줄 알았던 그이는 어느새 저만치 떨어져 창밖으로 눈을 주고 있었다.
어제는 그이를 만나지 못했다. 내가 평소보다 5분 늦게 나와 그 버스를 놓친 것이다. 사실 또 마주치면 어떻게 할까 고민을 많이 했다. 한번 말을 걸어보고 싶었지만, 처음에 뭐라고 해야 좋을지 알수 없었다. 시간을 묻는 건 너무 뻔해보이고(우린 계속 같은 시간대에 같은 버스를 타고 있으니), 뜬금 없이 날씨 얘길 건네는 것도 웃기다. 뭔가 자연스레 말을 걸어볼 꺼리가 없을까? 고민을 거듭해도 답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오늘 또 그이가 저기 버스 정류장 앞에 서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