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에서 김밥 먹기


오전에 편도 1시간 반 이상 걸리는 곳으로 출장을 다녀왔다. 점심시간 직후 4월 초에 있을 탈핵 행사 준비를 위한 현장답사 일정이 있어서 서둘러 돌아와야 했다. 급하게 나오는데, 평소 자주 만나지 못하는 선배 한 분이 나를 붙잡는다. 나는 시계를 보며 마음이 급했지만, 차마 그 분의 말씀을 끊을 수 없어서 10여분간 이야기를 나눴다. 말이 빠른 편이고, 차근차근 순서대로 설명하는 것이 아니라, 중간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하는 편이라 그 분이 말씀하실 때에는 맥락을 잘 살피며 듣지 않으면 무슨 말인지 이해하기 어렵다. 몇 가지 주제에 대해 와르르 쏟아내듯 말씀하신 내용들을 들으며 적절한 반응일거라 여기며 대꾸했다. 마음은 계속 늦었다는 사실에 머물러 있었고, 시선은 자꾸만 손목시계로 향하고 싶었지만, 억지로 참으며 그 분의 눈을 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 10여분이 참 긴 시간처럼 느껴졌다.


마침내 그 분과 인사를 나누고 지하철을 탔다. 돌아가는 시간도 1시간 반 가까이 걸렸다. 약속시간과 이동시간을 고려하니 밥 먹을 시간이 없었다. 배가 고파서, 벌써부터 꼬르륵 소리가 났다. 약속 장소 근처에서 김밥이나 라면이나 잔치국수나 뭔가 금방 나오는 음식을 먹어야겠다고 생각했지만, 도무지 그럴만한 시간이 나지 않을 것 같았다.


가는 시간도 돌아오는 시간도 무척 지겨웠다. 하필 이어폰을 놓고 나와서 음악을 들을 수 없었다. 최근 바쁜 일정에 쫓겨 페이스북을 거의 들여다보지 못했는데, 왕복 3시간 이동하면서 계속 페북만 들여다봤다.


마침내 약속장소 근처에서 시계를 보니 5분 가량 여유가 있었다. 어디라도 식당에 앉을 시간이 안 될 듯 했다. 김밥 한 줄을 사서 걸어가면서 먹었다. 하필 걸어가는 길에 아는 사람을 세 명이나 만났다. 다들 김밥을 손에 들고 먹으며 걷는 나에게 "왜 길에서 먹고 있느냐?"고 질문했다. 나는 김밥을 씹으며, "밥 먹을 시간이 없어서"라고 답했다. 같은 질문을 세 번 듣고, 같은 답을 세 번 해야 했다. 아마 곧 동네에 소문이 날 지도 모르겠다. 저 양반 밥 먹을 시간도 없어서 길에서 김밥을 먹으며 다닐 정도로 바쁘다고.


공원에서 김밥 먹기


이주일쯤 전에는 소공원 벤치에 앉아서 김밥을 먹었다. 오전에 한 서너군데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만났다. 마지막으로 만나야 할 분이 갑자기 연락이 되지 않아 기다리다가 밥 시간을 놓쳤다. 그 분은 점심시간 직후에 연락이 닿아 만났다. 사무실로 돌아가는 길에 무척 배가 고팠다. 근처에서 뭔가를 먹고 가고 싶은데, 마땅한 식당이 없었다. 배는 고팠지만 딱히 먹고 싶은 것도 없었다. 돌아다니다가 김밥 파는 가게를 하나 찾았는데, 앉을 자리가 아예 없는 포장 판매만을 하는 가게였다. 즉 테이크아웃 전문점인 셈이다. 그 가게 외에는 달리 식당을 찾기 어려워 일단 김밥 한 줄을 샀는데, 길에서 먹고 싶지는 않았다. 마침 멀지 않은 곳에 소공원이 있어서 그리로 발길을 옮겼다. 


아무리 배가 고프고 아무리 먹을 곳이 없어도 찻길 근처에서 자동차 매연과 소음에 그대로 노출된 채로 뭔가를 먹고 싶지 않았건만, 그 소공원은 크기가 작아서 도로의 매연과 소음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었다. 적당히 안쪽에 사람이 없는 벤치를 골라 앉아 김밥을 먹었다. 아, 그런데 내가 의식해서 그런 것인지 공원을 지나가는 어르신들이 유독 내 주위를 자주 스쳐가는 느낌, 그 어르신들이 유독 나를 쳐다보고 지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하긴 여기가 외국 영화나 드라마에 나오는 그런 공원도 아니고, 점심시간이 좀 지난 오후에 여기서 홀로 불쌍하게 물도 없이 김밥을 씹고 있는 젊은이(어르신들 기준에서)를 보는 게 이상할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나도 모르게 씹는 속도가 빨라지고, 순식간에 김밥 한 줄을 뱃속으로 몰아넣고, 자리를 일어섰다. 시간을 재 보지는 않았지만, 아마 김밥 한 줄을 먹는 시간으로는 신기록이 아니었을까? 아니 그 옛날 새만금 방조제에 기습 침투했던 날, 꼬박 스무 시간 가까이 굶었다가 나오자마자 김밥 열 줄 이상을 흡입했던 날의 기록은 깨지 못했을 것 같기도 하다.


다 먹고 살자고 하는 일


사실 어렸을 때 소풍가는 날을 제외하면 김밥은 그리 좋아하는 메뉴가 아니다. 어렸을 때 소풍 때에도 소풍에 대한 설레임 때문에 김밥도 좋았던 것이거나, 자주 먹을 수 있는 음식이 아니라 일년에 한 두 번 소풍가는 날에만 먹을 수 있었기 때문에 좋았던 것이지, 김밥 자체가 좋았던 것도 아니었다. 요즘은 비교적 싼 가격에, 간단히 한 끼를 해결할 수 있어서 찾는 것일 뿐이다. 게다가 비교적 싱겁게 먹는 입맛 탓에 모든 김밥은 내게 너무 짜다. 김밥을 바로 말아서 싸는 집에서 주문할 경우에는 단무지를 빼달라고 주문하지만, 미리 싸서 은박지에 포장까지 되어 있는 김밥을 받아나오는 경우에는 어쩔수 없이 단무지만 빼고 먹는다. 그래도 내겐 짠 음식이다.


다 먹고 살려고 하는 일인데, 밥은 잘 먹고 살라는 말을 자주 듣는다. 특히 작년 여름 혼자 살게 된 이후 주변에서 지인들이 걱정어린 시선으로 자주 하는 말이다. 그러면서 가끔 밥을 사주거나, 술을 사주거나 한다. 뭐 나라고 잘 먹고 싶지 않겠나? 바빠서 잘 못 챙겨 먹거나, 입맛이 없거나, 배는 고프지만 딱히 먹고 싶은게 없는 날들이 대부분이라 대충 때울 수 밖에 없는 날이 많다.


그놈의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을 그만두지 않는다면 앞으로도 이렇게 대충 때우는 날이 많을 것이다. 가끔 일을 그만두고 싶다는 생각을 한다. 내 한 몸 사는 데는 그리 큰 돈이 들지 않기 때문에, 매일 출근하는 일을 하지 않아도, 가끔 이런저런 비정기적인 일을 하면서 살 수 있을 것이다. 가끔 글을 써서 원고료를 받고, 가끔 강연을 나가서 강사료를 받고, 가끔 외주 교정일을 해서 교정비를 받고, 가끔은 몸을 써서 일을 하기도 하면 충분할 것이다. 그러나 아이들 양육비를 생각하면 그럴 수가 없다. 아무리 하기 싫은 일이라도 매일 출근해야 양육비를 댈 수 있다. 그러고 보면 이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은 내가 먹고 살자고 하는 일이 아니라 가족들 먹이려고 하는 일인 것 같다.


삶이란 누구에게나 어렵고 힘든 일이다. 먹고 사는 일은 참 어렵고 구차하다. 그러나 오늘도 또 내일도 그 어렵고 구차한 일을 이어가야 한다. 그게 삶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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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03-31 07:45   URL
비밀 댓글입니다.

2017-04-27 17:23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3-31 10:07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군 입대하기 전에 새벽에 알바를 한 적 있었어요. 그래서 아침 식사를 일찍 할 수밖에 없었어요. 그때 김밥을 많이 먹었어요. 일하기 전에 일하는 사람들과 같이 먹을 김밥 서너 줄 사옵니다. 계속 먹게 되니까 김밥이 짜게 느껴졌어요.

감은빛 2017-04-27 17:26   좋아요 0 | URL
사먹는 김밥은 대체로 밥의 양에 비해,
안에 들어간 재료가 많아 짠 편이죠.
저는 오래전부터 남들보다 싱겁게 먹는 편이라,
김밥을 사면 백 프로 짜다고 느낍니다.
예전엔 짠 것을 참으며 그냥 먹었는데,
요즘은 단무지를 빼고 먹어요.
그자리에서 바로 김밥을 싸주는 집은 단무지를 빼달라고 하는데,
그런 요청을 받으면 이상하게 여기는 분들이 많아서 귀찮기도 하더라구요.

한 달 늦은 답글이네요.
시루스님, 잘 지내시죠?
 


악력을 길러라


조합원들에게 소책자와 출자증서 등을 담은 우편물을 발송했다. 주소 확인이 되지않은 분들을 제외하고 대략 230여명에게 보낼 우편물을 준비했다. 새 도로명주소와 바뀐 우편번호 때문에 일이 훨씬 많아졌다. 주소를 싹 정리해서 라벨용지를 출력하고, 일일이 봉투에 붙이고, 사람 이름을 찾아서 출자증서를 비롯한 서류들과 소책자를 담았다. 그리고 풀칠 시작. 단체 활동가로 일하면서 이런 대량 발송에 익숙하다. 십여개의 봉투를 잘 배열해 한번에 풀칠하는 기술은 신입활동가였던 15년 전에 익혔다. 그간 몇몇 분들이 내가 풀칠하는 것을 보고 감탄하기도 했다.


예전에 우체국에서 내가 속한 자치구와 그 외 지역으로 우편물을 분류해달라고 요청했던 것을 기억해서 각각 나눠 담고 갯수를 세었다. 근처에서 자주 만나기에 굳이 우편으로 보낼 필요가 없는 분들 우편물은 따로 빼놓고, 총 200여개의 우편물을 박스에 담고 출발했다. 서둘렀는데도 우체국 마감 시간이 15분 밖에 남지 않았다. 박스 하나와 큰 종이봉투 하나를 한번에 들어올리는데, 무게가 만만치 않았다. 작년까지 여러차례 혼자 끙끙대며 우편물을 들고 가느라 힘들고, 시간도 오래걸렸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택시를 타리라 마음 먹었다. 무게도 무겁고, 급하기도 했다.


건물을 나서서 몇 걸음만 걸으면 지하철 역 앞에 택시들이 대기하고 있다. 무거운 짐을 들고 뒤뚱뒤뚱 뛰듯이 걸어갔는데, 한 대 남아있던 택시를 갑자기 튀어나온 사람이 눈 앞에서 타버렸다. 허탈한 마음에 박스를 잠시 내려놓았는데, 박스가 찢어지면서 우편물이 쏟아지려 했다. 황급히 한쪽 발로 찢어진 부위를 받치고, 빈 택시를 찾았는데 없다. 평소 몇 대씩이나 기다리던 택시가 왜 하필 이 급한 시간에는 없는 거냐! 시계를 보고 도로를 살피기를 수십번 반복하고 있는데, 마침 저쪽에서 빈 택시 한 대가 좌회전해서 다가왔다. 우편물이 쏟아지지 않게 조심해서 박스를 싣고 택시를 탔다. 


우체국은 큰 사거리 하나만 지나면 있다. 평소 걸음으로는 7~8분이면 가고, 작년에 이번보다 더 무거운 우편물을 들고 갔을 때는 중간에 몇 차례 쉬어가느라 거의 30분이 걸렸다. 택시를 탄 시간이 대략 47분. 중간에 신호 대기했다가 택시에서 내린 시간이 52분이었다. 이제 우체국이 그리 멀지 않은데, 찢어진 박스와 역시 찢어지려는 큰 종이가방을 겹쳐 들고 걷는데, 자꾸만 짐이 쏟아지려 한다. 급한 마음에 뛰려는데, 짐이 있으니 마음처럼 뛰어지지 않는다. 간신히 56분에 우체국 도착.


예전에는 스티커를 받아서 일일이 붙였는데, 요즘은 도장을 찍으라고 하더라. 직원분께 말씀드려 도장을 받아서 찍기 시작했다. 이것도 몇 년째 하다보니 요령이 생겼다. 빠른 속도로 도장을 찍어나갔다. 6시 1분에 우편물을 접수하고 결제를 했다. 진짜 짧은 시간 안에 급하게 일을 마쳤다. 풀칠의 달인이자 도장찍기의 달인이 안 되었다면 시간 안에 보내기는 불가능했을 것이다. 


이미 정문 셔터를 내려서 뒷문으로 나오는데, 목덜미와 등줄기에 땀이 주르륵 흐르고 있었다. 아까 택시에서 내려 우체국까지 올 때 짐을 제대로 들지 못하고, 왜 자꾸 흘러내리려 했을까를 생각했다. 무겁긴 했지만, 그 정도 거리를 옮기지 못할 무게는 아닌데 라고 생각하는데, 가만 되짚어 보니 악력이 모자라서 짐을 붙들고 있는 손가락이 자꾸 풀어지려 했던 느낌이었다. 그러고보니 작년에도 봄과 가을에 두 번 우편물 보낼 때마다, 팔은 괜찮은데, 어느 순간부터 손가락에 힘이 풀려 자꾸만 박스를 놓칠 것 같아서 할 수 없이 박스를 길바닥에 내려놓고 몇 차례 쉬어갔던 기억이 났다. 그때도 아마 그 생각을 했던 것 같다. 팔힘이 좋아봐야 짐을 들고 멀리 이동하는데는 별로 소용이 없구나. 악력을 길러야 짐을 들고 이동할 때 쓸모가 있구나. 무거운 짐을 순간적으로 들어올리거나, 들고 짧은 거리를 이동할 때는 느끼지 못했던 것이다. 비록 젊은 시절이긴 하지만 쌀 배달도 해봤고, 공사장에서 막노동 할 때 등짐을 지거나, 시멘트 포대 등 무거운 걸 옮기는 일도 많이 해봤는데, 이렇게 손 힘이 부족해서 짐을 놓칠뻔한 기억은 거의 없었다. 나이가 들어서 악력이 많이 약해졌거나, 그때보다 훨씬 장거리 이동이라 그 시간을 버티기에 악력이 부족하거나, 뭐 그런 것이겠지. 암튼 이제부터 악력을 좀 길러야겠다.


몸매 자랑


겨울이 시작될 무렵부터 먹는 양과 횟수를 줄였다. 식사는 거의 하루 1끼, 저녁만 먹거나, 저녁에도 밥이 아닌 술과 안주만 먹어서 아예 밥을 안 먹는 날도 많았다. 이상하게 사무실에 앉아있어도 배가 안 고프거나, 밥 먹을 여유도 없이 바쁘거나 했고, 의식적으로 식사 시간을 늦춰서 늦은 점심 겸 저녁이 되도록 먹기도 했다. 즉 일부러 굶은 것은 아니고, 자연스럽게 덜 먹게 되었다는 말이다.


또 하나의 큰 변화는 연말에 특정 기간을 제외하면 평소 술 약속을 별로 잡지 않아서, 술과 안주로 배를 채우는 횟수도 확 줄였다. 물론 밖에서 먹는 술자리는 확 줄였지만, 집에서 아이들과 혹은 혼자 마시기는 했다. 그래도 거의 매일 마셨던 예전에 비해서는 술 마시는 횟수가 줄었다.


최근 전신거울을 들여다보면 확실히 몸매 변화를 느낄 수 있다. 꾸준히 운동을 해도 사라지지 않던, 아랫배와 옆구리에 살짝 잡히던 군살이 이젠 거의 사라졌다. 전에는 배에 힘을 줘야 간신히 윤곽이 드러나던 복근이 이젠 가만히 서있기만 해도 윤곽이 보인다. 그런데 그 겨울동안 사실 운동을 그리 열심히 하지는 않았다. 예전에 한창 운동했던 때에 비하면 거의 안했다고 말해도 될 정도다. 날이 춥고 몸 움직이기 귀찮고, 거의 바깥 온도와 비슷한 (그래서 새벽에 타일위에 얼음이 얼어있기도 한) 화장실에서 샤워까지 하기가 싫어서 일부러 땀을 많이 안 흘리기도 했다. 물론 화장실이 그렇게 춥기 때문에 아침에 화장실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몸을 좀 움직여서 체온을 올려놓아야한다. 그래서 아침과 밤에 잠깐씩 딱 몸이 더워지기 시작할 정도로만 운동을 했다. 본격적인 온동까지는 가지 않고, 준비운동 정도만 했다는 의미다.


암튼 이로써 식사량을 줄이고, 술을 줄여야 복근을 볼 수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런데 분명 20대의 나는 식사량을 줄이지 않고, 술도 줄이지 않고 복근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5년쯤 전에 다시 결혼 전 몸매로 돌아가리라 마음 먹고 운동을 시작하면서 식이요법에 대해서는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예전에 많이 먹으면서도 복근을 유지했던 기억 때문에 식사량 조절 같은 건, 필요없다고, 먹고 싶은대로 먹고, 술도 매일 같이 마셔도 복근 만들수 있다고 생각했었다. 그런데 그간 꾸준히 운동을 해서 뱃살의 상당부분을 줄이고 허리 사이즈를 줄이는데 까지는 성공했지만, 아랫배와 옆구리에 살짝씩 잡히는 군살은 아무리 해도 없어지지 않았었는데, 며칠 전에야 비로소 군살 없이 가벼운 몸이 되었다. 운동은 별로 하지 않고, 순전히 술과 밥을 덜 먹어서 만든 몸매이니, 내 생각과는 완전 반대로 만들어진 결과다.


이제 봄부터 초여름까지 꾸준히 운동을 하면 좀 더 선명한 복근을 만들 수 있겠지. 비로소 결혼 전 몸매로 돌아가겠다는 의지를 어느정도는 실현한 것 같다. 날이 좀 풀리면 다시 운동을 해야겠다.


인터뷰


며칠 전 방송대학티비 촬영팀과 인터뷰를 했다. 어느 선배에게 소개 받았다며, 내 본명이 아닌 감은빛 국장님을 찾는 전화를 받은 건 지난 주였다. 그 선배가 당시 내 이름은 잘 기억나지 않고, 평소 페이스북으로 자주 접하던 내 덧이름을 알려줬구나 싶었다. 암튼 인터뷰를 요청해서 별로 대수롭지 않게 여기고 날짜를 정했다. 사전에 질문지를 받아보니 내용도 그리 어렵지 않았다.


그간 인터뷰는 아니었지만, 공중파를 비롯해서 몇몇 채널에서 촬영을 해갔기 때문에 방송 카메라 앞에 서는 것도 그리 긴장되지는 않았다. 굉장히 가볍게 생각하고 피디님과 촬영팀을 만났는데, 이 팀은 그간 만나왔던 다른 촬영팀과 달리 준비를 많이 하더라. 나는 발전소 주변을 비롯해서 그냥 실내 공간에서 촬영할 거라 여기고 따로 미팅 장소를 예약해놓지도 않았는데, 담당 피디는 계속 닫힌 공간을 찾더라. 짧게 쓰면 되겠지란 생각에 예약도 하지 않은 빈 회의실 하나를 찾아 들어갔는데, 헉! 조명 세팅에만 무려 30분 이상을 쓰더라. 


난 속으로 혹시 누군가 이 회의실을 쓰려고 들어오면 당장 비켜줘야 하는데, 빨리 촬영하고 끝내고 싶다고 생각했지만, 이 분들은 계속 그림자의 위치와 농도 등을 따지며, 보조 조명을 하나 더 설치할까 말까, 각도를 조금 옮겨라 말아라, 조명 색을 노란 계통으로 갈지, 분홍이나 파랑 계통으로 갈지 등을 논의하더라. 헐! 방송 인터뷰라는게 이렇게 조명을 공들여 설치해야 한다는 것 자체를 몰랐다. 조명 기사님은 혼자 무거운 조명을 몇 개나 가져오셨는지 보조조명까지 해서 여러개의 조명이 나와 주변을 눈부시게 비췄다. 


예전에 짧은 인터뷰 때에는 야외나 복도에서 했기 때문에 그냥 자연스럽게 서서 몇 마디 말을 하고 끝냈는데, 이번에는 담당 피디 맞은 편에 앉아서 조명을 받으며 했다. 내가 어떤 설명을 하면서 손동작을 하고 몸을 움직이자, 카메라 기사님이 자세를 바로 잡고, 가능한 한 몸을 틀지 말아달라고 하더라. 그 말을 의식하고 나니 말을 하다가 자꾸 흐름이 끊어지고, 자연스럽게 이어지지 않았다. 강의를 하거나 발표를 할 때 내가 얼마나 손과 몸을 많이 움직이는지 깨달았다. 손과 몸의 움직임을 봉쇄당하고 나니 말이 매끄럽게 연결되지 않았다. 담당 피디님과 함께 리허설도 짧게 했는데, 오히려 본 촬영에 들어가고 나서 말을 더 못한 것 같다.


요즘 부쩍 흰머리 지적도 많이 받고, 피곤해보인다거나 늙어보인단다는 소리도 많이 듣는데, 과연 방송에 내 몰골이 어떻게 나올지 걱정이다. 아무리 조명을 많이 비추면 뭐하나. 얼굴이 받쳐주지 못하는 것을. 게다가 내 목소리도 불만이다. 자주 회의록을 만들기 위해 녹취 파일을 들으며 작업하는데, 내 목소리는 정말 마음이 들지 않는다. 정말 남들이 듣는 내 목소리는 저렇단 말인가? 예전에 내가 사회를 봤던 행사 동영상 파일을 누군가 페이스북에 올렸길래, 아이들과 함께 봤는데, 내 목소리가 너무 이상해서 아이에게 물어봤다. 아빠 목소리가 평소 저렇게 들리는 거 맞냐고 했더니 큰 아이가 맞다고 고개를 끄덕끄덕 하더라. 아, 저 싫은 목소리가 내 목소리란 말이지? 난 트리거포인트가 목소리라고 몇 번 글에도 쓰고, 남들에게 말하고 다니는데, 정작 내 목소리는 이렇게 마음에 들지 않는다니 슬프다.


사고 픈 책은 많고, 읽은 시간은 적고














작년 연말부터 장바구니에 10여권의 책을 넣었다 뺐다 하면서 계속 주문을 미루고 있다. 당장 사도 읽을 여유가 없다는 것을 잘 알기 때문에 결제하기 버튼을 누르다가도 잠시 고민하다가 창을 닫기를 반복한다. 초겨울에 산 책들도 대부분 아직 손도 못 댔다. 연말에 잠시 짬이나서 관심있는 소설책 서너권을 몰아서 읽기는 했지만, 일상 생활 속에서 책 읽을 여유는 거의 없다. 집에서는 씻고 뻗거나, 뭔가를 틀어놓고 술을 마시고 뻗거나 둘 중 하나다. 사무실과 집의 이동 거리는 책을 읽기는 너무 짧다. 사무실에서는? 도저히 책을 읽을 수 없다. 주말에도 아이들과 지내거나 누군가를 만나거나, 집회를 나가거나 해야 한다.


어쨌거나 읽은 여유는 없는데, 사고 싶은 책은 왜이리 많은지. [조선의 생태환경사]는 보는 순간 바로 사서 읽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책이었다. 장바구니에 담고 결제 버튼을 누르기 전에 이미 담겨있는 책들을 다시 살피며 한 두 권을 빼고 어쩌고 하면서 시간을 보내다가, 결국 결제를 하지 않고 또 한번 미룬다. 일단 오늘 구매해도 열흘 가까이는 도저히 시간을 낼 수 없다. 열흘 후에 조금이라도 여유가 생기면 그때 사서 읽어야지.


3월 초까지는 바빠서 정신을 차릴 수가 없을 정도다. 그렇다고 3월 초가 지나면 좀 나아지느냐? 그렇지도 않을 것 같다. 그때는 또 다른 이유로 계속 바쁘겠지. 혼자라면 당장 일을 때려치우고 좀 여유를 찾고 싶은데, 아이들 생각하면 도저히 그럴 수가 없다. 언제쯤 좀 여유를 가지려나? 아이들이 다 클 때까지 기다려야 하려나? 그런 생각이 들면 우울하다! 오늘은 야근 마치고 술 한 잔하고 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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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목처럼 세상의 모든 지도를 보여주면 더 좋았겠지만, 그러려면 분량이 어마어마하게 많아야 하겠지. 아니 말 그대로 모든 지도를 보여주는 건 불가능하겠지. 저자가 모든 지도를 다 알 수도 없을테니.

실제로 이 책에서 아쉬운 점은 서양의 지도에 비해 동양의 지도는 거의 다루지 않고 있다는 것이다. 중국과 일본은 그래도 몇점을 다루는데, 우리나라는 단 한점 그것도 일본 지도를 베낀 것만 다루었다. 동남아시아나, 인도, 중동 지역은 거의 다루지 않았다.

재미있는 건 고대인들의 상상력이었다. 저 지평선 너머, 저 바다 너머의 세상을 상상만으로 그렸던 걸 보면서 이렇게 생각했구나 알 수 있어서 흥미로웠다.

이런것도 지도인가 싶은 것도 많았다. 단순한 그림인 것 같은데 지도라고 소개하고 있었다.

매머드의 상아에 그렸다는 구석기 인이 만든 지도는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지도라고 한다. (만약 이걸 지도라고 인정한다면) 또 구석기 시대 사람들이 수세기에 걸쳐 기록한 이탈리아의 벽화 지도도 흥미로웠다. 문자 기록이 남아있지 않은 그 옛날에도 지도를 만들어 남겨두었구나 싶었다.

중세 이탈리아인이 그린 지도에는 일부러 사람을 그려 이슬람 전사들이 군사용으로 정보를 취하지 못하도록 했다고 저자가 소개했다. 이슬람 교리에는 인간의 형상물을 보지 못하게 규정했다고 한다. 정말로 당시 이슬람 군인이 이 지도에 그려진 사람 형상 때문에 보지 못했는지는 알 수 없지만, 요런 역사적 사실들은 재미있다.

중반 정도까지는 그야말로 다양한 지도를 볼 수 있어서 진짜 푹 빠져서 봤는데, 뒤로 갈수록 좀 지루해기도 했다. 어딘지도 모르는 어느 곳을 소개한 지도가 계속 반복 되는 것은 지겨웠다. 세부지도의 경우가 특히 그랬다.

다양한 세계지도는 한창 지겨울만한 때에 딱 등장해서 다시 흥미를 되살려주었다. 중국은 역시 자기 땅을 딱 중심에 두고 전 세계가 다 작고 길게 주위를 에워싸고 있는 걸로 그렸고, 유럽인들은 항상 지중해를 중심으로 지도를 그렸고, 아프리카 북부와 서아시아 일부까지만 세상의 전부라고 여겼다.

유럽 국가들이 식민지를 만들기 위해 혈안이 되었던 소위 말하는 대항해시대에 해안선을 보다 정확하게 그려서 침략을 돕기 위해 지도가 사용되고 지도를 그리는 기술이 더욱 발전했다.

유럽 중심의 시각이 아닌 좀 다양한 지도를 담은 다른 책도 보고 싶다. 특히 아시아 여러 지역의 지도 라던가, 유목민들의 지도라던가 이런거 소개한 책은 없으려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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cyrus 2017-01-22 14:50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지도는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져요. 한번은 동· 서양 지도를 모으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

samadhi(眞我) 2017-01-22 17:55   좋아요 1 | 댓글달기 | URL
그런 지도를 보려면 저자가 아시아 출신이어야겠지요.
 


해가 바뀌자마자 출판계는 날벼락을 맞았다. 국내 대형 도매상 중에서 거래량 규모로 2위인 송인서적이 부도를 맞았다. 페이스북 지인들 중 출판계 선후배가 많아서 금방 이 소식을 접했다. 나도 모르게 긴 한숨이 나왔다. 만약 내가 아직도 출판 영업자로 일하고 있었다면 그야말로 뒷목을 잡고 쓰러질만한 소식이다. 순간 수많은 얼굴들이 스쳐갔다. 중소형 출판사 영업부장을 맡고 있거나, 창업해 1인출판사를 운영하는 친구들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고, 송인서적에 아주 오랫동안 일해왔던 친구가 떠올랐고, 여러 선배들 얼굴이 떠올랐다.


부도 소식을 접하자마자 곧바로 떠오른 생각은 '중소형 출판사 피해가 어마어마하겠구나' 였다. 송인서적은 예전부터 그런 경향이 있었다. 큰 출판사들은 오히려 거래 규모에 비해 잔고도 낮고, 수금도 현금으로 받아가고, 중소형 출판사들은 잔고가 높고, 지불을 4개월짜리 어음으로 받아가야 했다. 최근에는 그래도 은행 어음이나 전자어음으로 바뀌었다고 들었지만, 예전에는 문방구 어음이라 부르는, 4개월 후에 송인서적에서만 다시 현금으로 바꿀 수 있는 종이조각을 지불했다. 오래전 맨 처음 영업자로서 이 문방구 어음으로 지불받았을 때 너무 황당해서 웃음이 났다.


게다가 송인은 북센에 비해 재고도서 파악이 잘 안 되고, 잔고에서 전국 서점에 깔려있는 도서와 송인 창고에 보관되어 있는 도서를 뺀 금액(업계 용어로 '공간'이라 부름)도 알 수 없는 구조다. 그래서 힘없는 중소형 서점들은 더욱 제대로 된 수금이 어렵다. 이는 거래량에 비해 계속 잔고가 높아지는 악순환으로 이어진다. 나중에 어디 지역 소매 서점 하나가 폐업하거나 부도나면 반품 폭탄을 맞기도 한다.


한편 송인은 '일원화'라고 부르는 다른 도매상과 거래하지 않고, 송인하고만 거래하는 출판사가 꽤 많은 곳이다. 내 주변에 그런 출판사가 제법 있었다. 어차피 규모가 작을 때는 여러 도매상에 책을 뿌리는 것 보다는 한 곳을 통해 배포하는 것이 나을 수 있고, 일원화 출판사에 대한 배려나 혜택이 분명 존재하기 때문이다. 하지만 부도가 난 지금 송인에 대한 의존도가 높은 일원화 출판사들은 더 큰 폭탄을 맞았을 것이다.


나는 첫 출판사에서 영업 일을 시작할 때부터 마지막 출판사에 있을 때까지 지속적으로 송인서적의 잔고를 줄이고, 현실적인 수금을 받기 위해 노력했다. 처음에는 수금액을 결정하기 위한 전무님과의 면담이 무척 어렵고 힘들었다. 한편으로 부당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시간이 많이 지나 나중에는 그 전무님과 많이 친해져서 대부분 내가 원하는 수준의 수금을 받아갈 수 있었다. 


오늘 저녁 몇몇 친구들과 선배들과 통화를 했다. 피해액을 물었더니 대개 예상 범위였다. 좀 적으면 1천만원에서 2천만원, 좀 많으면 3천만원에서 4천만원. 경우에 따라 많이 다르겠지만, 중소 규모 출판사에서 3천~4천만원은 1년치 순수익의 3분의 1이나 절반(어쩌면 그 이상)에 해당할 수 있는 돈이다. 실로 어마어마한 타격이다. 어렵게 만들어 유통시킨 책들과 수금받아온 어음들이 한순간에 종이 쓰레기로 전락하는 순간이다. 아니 연기처럼 흩어져 사라졌다고 표현해야 할까?


마지막으로 일했던 출판사 대표님에게 전화를 걸었다. 일을 그만두고 거의 3년 동안 딱 한 번, 그것도 볼일이 있어서 찾아갔을 뿐, 연락을 한 적은 없었다. 전화를 받자마자 큰 일이 닥치니 연락이 왔다며, 놀랍다는 반응이었다. 바빠서 연락을 못드려 죄송하다는 의례적인 인사를 건네고, 피해 규모를 물었다. 구체적인 액수를 말하지는 않았다. 그만둔지 꽤 되었지만, 매출 규모를 뻔히 짐작하는데, 굳이 알려주지 않는 이유는 뭘까? 암튼 내가 그만둔 이후로도 지속적으로 잔고를 줄여서 생각만큼 피해가 크지는 않다고 했다. 하지만 그래도 타격이 크다는 말도 잊지 않았다. 마지막 출판사를 그만두면서 나는 대표님께 전달한 인수인계 문서에는 이렇게 적어놓았다. "송인서적에는 신간을 최소한의 수량(10권 이하)으로 보낼 것"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금방 잔고가 늘어날 위험이 있었다. 신간을 적게 보낸 것이 다행이었다고, 내가 인수인계 문서에 적어놓은 말 덕분에 피해가 줄었다는 말을 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갑작스런 내 연락에 친구들은 한결같이 "송인 부도 덕분에 네 연락을 다 받아보네!" 하는 반응이었다. 인정한다. 바쁘다는 핑계로 그간 출판계 친구들과 선후배들과 거의 연락을 안 하고 살았다. 업계를 떠난 이후로 대화 주제나 공감대가 달라진 것이 이유이기도 하고, 정말 물리적으로 바쁜 삶을 살기도 했다.


이번 부도에 대한 대책은 사실상 없어보인다. 구체적인 상황은 모르지만 짐작컨데 방법이 없을 수 밖에 없다는 생각이 든다. 이 말은 중소형 출판사들 중 피해액이 큰 업체들의 연쇄 부도 가능성을 의미한다. 쓰레기 조각이 되어버린 어음은 고스란히 빚(대개 4개월이 되기 전에 인쇄소, 지업사 등 거래처에 현금대신 지불하므로)이 되고, 전국 소매서점과 송인 창고에 묶여 있을 도서들은 송인 채권단에게 압류 당할 게 뻔하다. 그리고 그 압류된 도서들이 나중에 다른 유통망을 통해 반품도서로 돌아오면 2중 피햬를 당한다. 안 그래도 책이 안 팔려 단군이래 최대 불황이라는 말을 해마다 갱신하는 판에, 이정도 피해를 견디고 버티기는 쉽지 않다. 출판계에 어마어마한 쓰나미가 불어닥치지 않을까 두렵다.


마침 다음 아고라에 '부도난 송인서적에 공적 자금 투입 필요합니다!'라는 청원이 올라왔다. 송인은 이미 IMF 시절에 한번 부도가 났다가 출판계의 수혈을 받아 간신히 다시 살아난 도매상이다. 이번에도 외부의 도움으로 살아날 수 있을까? 잘 모르겠다. 속으로 무척 안타깝지만 나는 이제 외부자의 시선으로 이 사태를 보고 있다. 정작 당사자들의 속은 얼마나 타들어가고, 썩어들어가고 있을지 짐작조차 할 수 없다. 부디 이 사태를 잘 이겨내시길 바란다!


http://bbs3.agora.media.daum.net/gaia/do/petition/read?bbsId=P001&articleId=1975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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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madhi(眞我) 2017-01-03 22:44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우리 선배 둘도 중소출판사를 운영하는데 화가 미치지 않기를 바라네요. 걱정입니다. 안 그래도 불황의 나락에서 허덕이는 출판계가 얼마나 더 떨어지게 될지...

2017-01-04 09:37   URL
비밀 댓글입니다.

cyrus 2017-01-04 15:4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IMF 때처럼 출판사가 문 닫는 일이 없었으면 좋겠습니다. 문체부는 개인 업체의 부도라고 해서 자금을 지원하지 않겠다고 합니다. 정유라 챙겨줄 때부터 알아봤지만, 문체부야말로 해체되어야 합니다.
 

뜀박질과 성격


작은 아이는 늘 뛰어다닌다. 집 안에서도, 밖에서도 늘 뛴다. 뭐가 그리 좋은지 까르르 웃으며 뛰어다닌다. 큰 아이는 조금 달랐다. 가끔은 뛰어다니기도 했지만, 주로 걸었던 것 같다. 나는 어땠을까? 잘 기억나지 않지만, 나도 늘 뛰어다녔던 것 같다. 그리고 지금도 나는 늘 뛴다. 아침에 집을 나서 버스정류장으로 갈때 뛰고, 일터 건물 안에서 화장실을 다녀 올때도 뛰고, 회의실로 이동할 때도 뛰고, 외근을 나갈 때에도 늘 뛴다. 퇴근후 버스를 타러 가거나, 버스를 내려 아이들을 데리러 갈 때도 뛰고, 약속이 있어 누군가를 만나러 갈 때도 뛴다.


작은 아이가 뛰는 모습을 보면서 처음엔 어린이들은 늘 뛰는 구나. 나도 늘 뛰는데, 그럼 나도 아직 어린아이처럼 사는 건가 하는 생각을 잠시 했다가, 가만 생각해보니, 큰 아이는 그렇게 뛰지 않았던 것 같다고 기억하면서, 그럼 이건 성격의 문제인가 싶기도 하다.


큰 아이는 어렸을 때부터 뛰어다녔다는 기억이 거의 없기도 하고, 어느 기억 때문에 잘 뛰지 않는 아이라고 기억한다. 한 서너살 때였다. 잡화점 지하에서 아이가 어느 물건에 잠시 한눈을 파는 사이, 내가 물건을 찾기 위해 진열장을 여기저기 돌아다니고 있었는데, 어느 순간 정신이 든 아이가 내가 보이지 않는 것을 깨닫고 불안한 마음에 나를 찾기 위해 우다다다 뛰어다녔던 것이다. 아이의 뜀박질 소리만 듣고도, 녀석이 불안해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고, 큰 소리로 아이 이름을 부르며 나도 뛰었다. 마침내 진열장 모퉁이에서 마주쳤을 때 아이는 울음을 터뜨리며 안겼다. 나는 녀석을 번쩍 안아 올려서 등을 토닥이며 달랬다. 아빠를 잃어버린 줄 알고 깜짝 놀랐으리라. 그러면 큰 소리로 아빠를 불러 찾았으면, 내가 대답을 했을텐데, 녀석은 겁을 먹고 무조건 뛰기 시작했다. 암튼 그때 아이가 그렇게 뛰었던 것이 의외였던 기억이 확실히 남아있다.


또 한 번은 비슷한 시기였던 것 같은데, 집앞 공터에 아이가 어린이집 선생님과 친구들과 함께 산책을 나온 걸, 애들 엄마가 보고 얘기해주었던 기억이다. 큰 아이는 유난히 겁이 많아 울퉁불퉁 바닥이 고르지 않은 흙길을 무서워했다. 넘어질까봐 겁을 먹었던 것이다. 다른 친구들은 모두 신나서 뛰어노는데, 우리 아이 혼자만 꽤 오랫동안 가만히 서 있었다고 한다. 그 공터에 아이 손을 잡고 가끔 놀러 가는데, 아이는 조금만 경사가 진 길을 만나면 걸음을 멈추고 양 팔을 벌렸다. 안아 달라는 뜻이었다. 나와 둘이서 그렇게 산책을 나가서도 아이는 내 손을 꼭 잡은 상태에서만 뛰어 놀았다. 작은 아이는 반대다. 내가 손을 잡고 있으면, 내 손을 뿌리치고 혼자 뛰어다닌다. 이건 확실히 성격(혹은 기질) 차이인것 같다.


서오능 한 바퀴


크리스마스 날 점심 무렵 아이들을 만났다. 일주일 만의 만남이었다. 지난 주는 저녁 내내 일정이 있었다. 평일에 한 번도 만나지 못해서, 아이들이 무척 보고 싶었다. 분식집에서 가볍게 배를 채우고 어디론가 놀러가려고 했다. 아이들은 공원에 가자고 했는데, 아주 작은 소공원 말고, 좀 놀만한 곳은 가장 가까운 공원조차도 버스나 지하철로 한참을 이동해야 했다. 그러다가 서오능이 생각났다. 그나마 버스 이동거리가 짧은 곳이었다. 예전에 차를 팔기 전에는 주말에 종종 갔었다. 몇 해 전 차를 팔고 나서는 한번도 안 갔던 것 같다.


버스를 내려 입구를 찾는데, 풍경이 많이 변해있었다. 대대적인 공사를 한 모양이다. 얼마나 오래 안 왔던 건지 실감했다. 작은 아이는 우리 중 제일 최근에 어린이집에서 친구들과 함께 왔던 모양이다. 입구를 잘 알고 있었다. 그런데 나는 계속 옛날 기억만 떠올려 익숙한 풍경이 나오기를 기다리며 입구를 지나쳐 더 걸었다. 결국 한참을 들어가도 내 기억에 있던 그 입구는 나타나지 않았다. 다시 아까 지나쳤던 입구로 돌아가야 했다. 작은 아이는 본인 말이 맞았다며 큰 소리를 냈고, 난 미안하다고 사과했다.


서오능 안에서 아이들은 열심히 뛰어다니며 놀았다. 나도 가끔 그 장난에 합류했다가 아이들 사진을 찍다가 하면서 돌아다녔다. 예전에 마지막으로 왔을 때, 장희빈의 묘 근처에서 가파른 오르막을 만나, 아이들 둘 다 그 오르막을 오르기를 거부해서 다시 돌아나왔던 기억이 났다. 이번에는 과연 한 바퀴를 다 걷는데 성공할 수 있을까? 아이들이 좀 컸으니 가능할 수 있겠다고 내심 기대하며 걸었다.


이번에 아이들은 장희빈 묘를 만나기도 전에 다리가 아프다며, 배가 고프다며, 피곤하다며, 졸리다며 다시 돌아가자고 졸랐다. 나는 이런저런 말들로 좀 설득을 해보다가 안 되자, 그냥 애들을 두고 혼자 성큼성큼 걸었다. 일단 장희빈 묘까지 가서 다시 생각해볼 예정이었다. 아이들은 아빠가 자신들을 버리고 올라가버리자 불안했는지 결국 장희빈 묘까지 따라왔다. 묘 앞에서 잠시 장난을 치고, 사진을 찍고 돌아나와서 오르막길로 더 올라갈 것인지 내리막길로 가서 입구로 돌아갈 것인지 정해야 했다. 아이들은 양쪽에서 내 팔을 하나씩 붙잡고 찰싹 달라붙어서 돌아가자고 졸랐다. 나는 몇 년 전에 왔을 때, 여기서 너희가 돌아가자고 해서 그냥 갔는데, 오늘은 꼭 한 바퀴를 돌아보고 싶다고 설명하고, 일단 갈 수 있는데까지는 좀 더 가보자고 했다. 더 떼를 쓸 줄 알았던니, 아이들은 어쨌든 따라왔다.


애들에겐 조금 가파른 오르막을 다 올라가니 갈림길이 나왔다. 내리막길로 가면 더 크게 한 바퀴를 도는 셈이고, 좀 더 가파른 오르막을 오르면 길은 더 힘들지 모르나, 시간과 거리상으로는 더 이득이었다. 아이들에게 설명했더니 그냥 왔던 길로 되돌아 가자고 했다. 나는 이제 그렇게 돌아가는 길이 더 멀거라고, 여기 오르막이 제일 빠른 길일거라고 설득했다. 아이들은 그 흙길을 무서워했다. 양 손으로 아이들 손을 꼭 붙들고 오르막을 올랐다. 조금만 오르면 평탄한 길이 나오리라 예상했는데, 아니었다. 크고 작은 오르막 내리막이 반복되었다.


그러다 짧지만 가파른 오르막 계단을 하나 만났고, 조금 더 앞으로 가서 아주 길고 가파른 내리막 계단을 만났다. 아이들은 조금 무서워도 내 손을 꼭 잡고 따라왔는데, 여기서는 둘 다 무척 겁을 내며 걸음을 멈췄다. 어른인 내가 보기에도 확실히 가파른 계단이었다. 폭이 좁아서 양 쪽에 아이들을 데리고 내려갈 수 없었다. 하지만 둘 다 내 손을 잡지 않으면 내려갈 수 없었다. 아니 아이들은 무서워서 못 내려가겠다고 계속 소리를 질렀다.


간신히 설득해서 작은 아이를 옆에 두고 큰 아이는 왼손을 뒤로 뻗어 손을 잡고 한 걸음씩 천천히 걸어 내려왔다. 내가 마치 아이들을 세뇌시키듯 안 무섭다 안 무섭다 하고 반복해서 말했다. 작은 아이가 떨리는 목소리로 따라했다. 이 계단은 가파르기도 하지만, 왜 이렇게 또 길어서 끝날 것 같지 않았다. 어쨌든 시간이 오래 걸리긴 했지만, 긴 계단을 모두 내려왔다. 밑에서 우리가 내려왔던 계단을 올려다보며 아이들에게 잘 했다고 격려하며 이마에 입을 맞췄다. 남은 길은 꼬불꼬불 돌아 내려가는 완만한 내리막이었다. 도중에 벤치를 만나서 잠시 쉬었다가 왕릉 하나를 더 살펴보고 입구로 돌아갔다.


밑에서 찍은 사진이라 별로 가팔라 보이지 않는데, 위에서 볼때는 엄청 가팔랐다.



나는 처음으로 한 바퀴를 다 돌아서 무척 재미있었다. 아이들도 신나하긴 했지만, 그 계단을 다시 가고 싶지 않다고 생각하는 듯했다. 입구를 나오자마자 아이들은 다리가 아프다, 배가 고프다 난리가 났다. 근처에 음식점들이 많아서 바로 뭔가 사먹을까 생각했는데, 큰 아이가 계속 메뉴가 마음에 들지 않는다고 싫다고 했다. 결국 버스를 타고 동네로 돌아가서 닭한마리 집을 갔다. 큰 아이는 처음에 그 집도 싫다고 했으나, 달리 갈 곳이 마땅치 않아 결국 아이가 양보했다. 대신 아이가 좋아하는 떡 사리를 시켜주기로 했다. 오랜만에 다시 왔더니 아이들도 예상외로 맛있게 먹었다.


재밌게 놀면서 산책도 하고, 맛난 음식으로 배도 채웠으니 성공이었다. 다음 날이 휴일이라면 함께 늦잠을 자며, 이불 속에서 뒹굴거리며 장난을 칠 수 있을 텐데, 월요일이라 아쉬웠다. 게다가 난 출근할 생각에 급 우울해졌다. 닭과 함께 소주 한 병을 비웠건만, 술이 땡겨서 막걸리를 샀다. 아이들은 과자를 먹고, 난 막걸리를 마시며 하루를 마무리했다.


책 읽고 싶어, 기타 치고 싶어















올해 마지막으로 구매한 책은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의 책들이다. 예전에 [체르노빌의 목소리]를 앞부분만 조금 읽다 말았는데, 그 책부터 먼저 읽고 하나씩 마저 읽어야지. 연말에 바쁘긴 하지만 꼭 하루 휴가를 내서 책을 읽어야겠다.



아이와 함께 갔던 광화문 집회에서 "근혜는 아니다 근혜는 아니다" 노래를 들은 큰 아이가 크리스마스 노래라고 알아듣길래, 집에 와서 이 영상을 보여줬다. Walk off the Earth 는 예전에도 기타 하나를 다섯명이 연주하는 동영상을 보여줬는데, 이번에는 [펠리즈 나비다]를 그렇게 연주했다.



이 동영상은 한동안 계속 무한 반복으로 봤었다. 기타를 다섯명이 치는 것도 신기했지만, 그 연주 솜씨가 훌륭해서 더 놀라웠고, 세 명의 보컬 모두 개성있는, 매력적인 목소리가 좋아서 또 놀라웠다. 처음엔 여성 보컬의 외모에 자꾸 눈이 갔는데, 자꾸 반복해서 보다보니 화면 맨 오른쪽에 수염 기른 아저씨가 제일 귀여워서 그 아저씨만 보고 있게 되었다.


아, 다시 기타를 치고 싶다는 생각이 자꾸 든다. 고향집에 있는 기타는 네크가 휘어서 못 쓸텐데, 하나 새로 살까 말까 하는 생각을 벌써 2년째 하고 있다. 사려니 사놓고 칠 시간이 없어서 그냥 묵혀둘까봐 걱정인데, 가끔 이렇게 치고 싶은 때는 아쉽다. 큰 아이가 기타에 관심을 가지면 가르쳐준다는 핑계로 그냥 확 사버릴텐데, 녀석은 가야금과 바이올린을 배우고 있다. 2년 전 술 자리에서 나와 같이 기타가 치고 싶다고 막 공감했던, 그래서 곧바로 기타를 샀던 친한 형은 이후 기타를 몇 번 만져보지도 않고 방치해 두고 있다고 했던 말이 그나마 위안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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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호랑이 2016-12-27 21:30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감은빛님께서는 기타를 치시는군요^^: 자신만의 악기를 가지고 계신분들이 부럽습니다.

감은빛 2016-12-28 17:09   좋아요 1 | URL
기타를 안 친지 거의 20년이 다 되었어요.
물론 그 동안 가끔 기타를 잡아서 몇 번 튕겨볼 기회는 있었지만,
제대로 안 친지 벌써 그만큼 되었네요.

이젠 코드도 많이 잊어버렸고, 주법도 예전만큼 안 되겠지만,
다시 연습하다보면 또 금방 되리라 생각해요.
문제는 늘 시간이 없다는 것이겠죠.

마녀고양이 2016-12-28 10:57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서삼릉이랑 서오릉 완전 좋아요.
사람도 많지 않고, 고즈넉하고, 다리 운동하기 딱 좋고.

음..... 출근할 생각을 하면 급우울해진다는 말에 백번 공감하며,
내년에는 즐거운 일, 행복한 일 가득하세요. ^^

감은빛 2016-12-28 17:10   좋아요 0 | URL
서삼릉은 아직 가보지 못했어요.
다음에 가봐야겠네요.

마녀고양이님도 내년에는 즐겁고 행복한 일이 많아지기를 바랍니다.
고맙습니다!

yureka01 2017-01-01 11:46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새해에도 또 시간의 트랙위를 달려야죠..
한해도 늘 활기차게 달려기로 해요..

새해도 화이팅~되시길 바랍니다 ~

서니데이 2017-01-01 13:51   좋아요 0 | 댓글달기 | URL
올해는 더 좋은 일들과 함께하시기를 기원합니다.
감은빛님, 새해 복 많이 받으세요.^^